230.
율리안은 습관적으로 옆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그의 손에 잡히는 건 차갑게 식어버린 베개뿐이었다.
“레베카?”
잠이 확 달아난 율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을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율리안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어제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한 터라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또 아침을 만들러 간 건가?”
예전의 일이 생각나 율리안의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허둥거리며 옷가지를 챙겨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레베카, 요리는 내가…….”
“오. 백작님. 이제 일어나셨어요?”
하지만 그를 반기는 건 주방장과 고용인들뿐이었다.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레베카 못 봤나?”
“글쎄요? 오늘 아침에는 못 뵀는데요?”
율리안은 만나는 사람마다 레베카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산책하러 간 게 아닐까……?’
그는 산책로부터 시작해 숲속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레베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문득 어젯밤 계속해서 자신에게 달려들던 레베카가 떠올랐다.
그녀는 마치 마지막 밤을 보내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설마…….’
식은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레베카! 레베카!”
율리안은 미친 사람처럼 백작 성을 휩쓸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녀는 여기에 없어.’
“뭐?”
레오가 수풀 속에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레오는 여유롭게 율리안의 앞에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레베카는 널 구하러 갔다. 이제 네가 그녀를 구하러 갈 차례야.’
“무슨 말인지 제대로 말해!”
율리안의 윽박에도 레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혜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아. 움직여라, 율리안.’
그때 칸나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율리안에게 뛰어왔다.
“레베카 님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율리안이 휘청거리며 나무를 짚었다. 칸나는 땅바닥에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젠장! 젠장! 젠장!”
그가 나무를 발로 세게 찼다. 쌓여 있던 눈이 우수수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율리안은 제 머리 위에 쌓인 눈 뭉치를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가운 눈이 율리안의 머리를 잠시나마 식혀주었다.
‘생각해. 생각해내! 그녀가 뭐라고 했었지?’
율리안은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레베카가 중얼거렸던 말들을 떠올렸다.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러이 할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전언을 찾아낸 율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고르가 말했던 방법밖에 없나 봐…….’
그는 쉴 새 없이 한탄을 중얼거리는 칸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사나운 짐승 같은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칸나에게 물었다.
“당신, 뭐든지 하는 칸나라며.”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칸나가 그를 올려다봤다.
율리안이 냉엄하게 말했다.
“의뢰를 하나 하지. 지금 당장 이고르를 잡아와.”
* * *
정신이 혼미했다. 준비된 배를 타러 선착장에 간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뭔가에 크게 얻어맞은 후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이고르는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 맛을 느꼈다. 그리고 점차 정신이 깨어나자 온몸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마차가 제 몸을 밟고 지나간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대체 제 머리 위에 쓰인 자루는 뭐고, 자신의 팔을 잡고 끌고 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설마…… 황실 기사단?’
목이 뎅강 잘릴 거라는 생각에 이고르는 격하게 반항을 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건 지독한 침묵과 거센 발길질뿐이었다.
“데리고 왔습니다.”
오싹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자루가 벗겨졌다.
눈을 게슴츠레 뜬 이고르는 순간 사신을 마주한 줄 알고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악마냐? 악마의 자식이냐?”
“정신이 나갔나 보군.”
인간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에 이고르가 벌벌 떨며 다시 제 앞에 앉은 사람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율리안 요하네스였다.
그는 커튼이 드리워져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방 중간에 앉아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안이 음산하게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내 질문엔 답할 수 있겠지. 레베카에게 뭐라고 지껄인 거지?”
“뭐……?”
“내 인내심이 지금 별로 많지가 않아. 그러니 단번에 이야기해줘야겠어. 내 아내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냐고 물었다.”
“갑자기 납치해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곱게 말해선 알아듣지 못하나 보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칸나가 손을 들어 이고르의 뺨을 내리쳤다.
이고르의 눈앞에 별이 반짝 빛났다. 그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칸나를 올려다봤다.
여자의 몸에서 나올 만한 힘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묻겠어. 레베카에게 뭐라고 한 거야! 뭐라고 했기에 그녀가 사라졌냐고!”
“네 부인이 사라진 걸 왜 나한테 물어!”
율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이고르의 얼굴이 마룻바닥에 처박혔다.
“끄아아악!”
“분명 감옥에 갇히던 날 네가 레베카에게 했던 말이 있을 거다. 그걸 기억해 내!”
“가, 감옥? 잠시만! 알겠어! 나 기억이 났다고!”
율리안은 의심스러운 듯 눈을 좁혔지만 이내 그를 풀어줬다.
“말해.”
“네 저주를 푸는 방법을 묻길래 답해줬어.”
“저주를 푸는 법?”
“그래. 온전한 희생! 여신 앞에 순수한 피를 흘려야지만 너와 레오 님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율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입술이 격정적으로 떨렸다.
“그럼 누군가가 나 대신에 죽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 그렇다니까! 끄악! 이제 말했으니 이거 놓고 말해!”
율리안은 휘청거리며 이고르의 얼굴을 누르던 손을 뗐다. 그는 성마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그래서 레베카가…….’
그는 언제나 자신을 갈망하는 눈을 하면서도 자신을 밀어내던 레베카를 떠올렸다.
손에 쥐면 사라져 버리는 아름다운 눈송이처럼 그녀가 언젠가 제 곁을 떠나버릴 것 같다는 섬뜩한 예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왜 저주를 푸는 법을 제대로 묻지 않았을까.
왜 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율리안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려왔다.
칸나는 그를 흘깃 바라봤다. 율리안은 지금 레베카가 패닉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감상에 빠져 버리면 레베카를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칸나. 이번엔 네가 레베카 님을 구해드리는 거야.’
칸나는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눌러닦았다. 그러곤 이고르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말해! 거기가 어디지? 레베카 님이 죽으러 간다는 곳이 어디냔 말이야.”
“그, 그건 나도 잘…… 아아악!”
칸나가 더 세게 그의 머리채를 그러쥐고서 거칠게 뒤로 잡아당겼다. 머리가죽이 벗겨지는 것 같은 고통에 이고르가 울면서 소리쳤다.
“예상되는 곳이 두, 두 군데가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게 어딘지 말해!”
“처, 첫 번째로 세워진 데프리아교 신전과 데프리아 여신의 겨울 장미가 피어났다는 곳이야!”
율리안과 칸나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칸나는 망설임 없이 이고르를 놓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고르가 문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말해줬으니까 나는 풀어줘야지!”
율리안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 그렇지. 버틀리!”
“예. 백작님.”
“저 자식을 황실 기사단에 넘겨.”
버틀리가 멀어져 가는 율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고르가 사색이 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버틀리를 올려다봤다.
“자, 잠시만. 장난이지? 황실 기사단에 보내면 난 죽는다고! 죽어!”
“그게 원래 당신의 운명 아니었나?”
“안 돼! 기다려!”
이고르의 처절한 비명이 성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 * *
율리안과 레오, 그리고 칸나와 크로아가 말을 빠르게 몰며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오자 네 사람은 잠시 말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나눠서 가야 합니다.”
그때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넌 오른쪽으로 가. 그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장미 신전을 찾아.’
율리안은 어리둥절하게 레오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추궁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지.”
“그럼 나중에 여기 오기 전에 봤던 마을에서 만나는 걸로 하죠. 이랴!”
한시가 급했다.
레베카의 성격상 그녀가 망설이지 않을 것이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군터가 제 주인의 급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길게 울어 젖히며 최대 속도로 달렸다.
“너, 뭔가 알고 있지?”
율리안이 레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닫고서 침묵을 지켰다.
“진작에 알았으면 왜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거야?”
역시 이번에도 레오는 묵묵부답이었다.
율리안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그녀가 잘못되기만 해봐. 널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 거야. 그녀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으니.”
* * *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살을 엘 듯한 추위에 레베카는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썼다.
따뜻한 율리안의 품이 간절했으나 이제 그곳으론 영영 돌아갈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아야지.’
레베카는 연단에서 아래로 추락하던 율리안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젯밤 다리가 부러졌던 그를 떠올렸다.
자신이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질 때까지 그는 끝없는 굴레 속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계약을…… 이행하는 것뿐이야.’
제플린 데본셔는 지금쯤이면 지옥에 끌려가고 있을 것이다.
알리시아는 영원히 눈이 멀었다. 그녀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시골로 쫓겨났다고 들었다.
알리시아가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게 가난한 삶이었으니 이보다 완벽한 복수는 없었다.
“후련하게 떠날 수 있겠어…….”
레베카는 말고삐를 몰았다. 자신이 죽을 자리까지는 아직 길이 멀었다. 목적지에 당도하기 전에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레베카가 말에서 내린 곳은 어느 외딴 산골이었다.
으슥한 골짜기엔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깨끗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춰서 숨을 돌리던 레베카는 크로아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여신이 태어났다던 겨울 장미…… 그 장미꽃을 따라가다 보면 최초의 장미 신전이 나오지…… 그곳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장미로 심장을 찔러야 해. 그것만이 율리안을 살릴 테니……. 예! 여신님! 그리하겠습니다! 이 크로아가 공작님을 위해……! 쿨럭! 쿨럭!’
십여 년 전 큰 산사태가 나서 세상에 알려진 신전이 있었다.
동굴 입구 천장에 장미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고, 장미를 들고 있는 여신상이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장미 신전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