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최초의 장미 신전은 처음엔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겨울 장미를 모티브로 한 거대한 신전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세간의 관심은 점차 사라졌다.
소수의 교인들만이 성지 순례하듯 이곳을 찾았다.
레베카는 쌓인 눈이 후드득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연신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가빠올수록 새하얀 눈 사이에 피어난 야생 겨울 장미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파란색 장미를 눈여겨봤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그녀는 마침내 바위 위에 흐드러지게 핀 겨울 장미 무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겨울 장미의 비호 아래 자그마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 번 무너졌던 게 정말인 듯 신전의 입구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안은 제법 넓고 깔끔했다. 관리하는 사람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것 같았다.
“여긴…….”
제단 앞에 앉아 촛불에 불을 붙인 레베카는 사방을 둘러봤다.
금이 가 있는 돌벽 사이로 이끼가 자라 있었다.
동굴 속의 전경을 찬찬히 살펴보던 그녀의 머릿속으로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흘러들어왔다.
“나……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어.”
어릴 적, 카디르 교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가족 여행을 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었다. 그리고 숲속에서 발견한 고양이의 뒤를 홀린 듯이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산사태가 나서…….
검은 고양이와 그만큼 머리가 새까만 소년을 기억해 낸 레베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레오와 율리안이었구나.”
검은 고양이와 수시로 몸을 바꾸던 이상한 소년은 분명 율리안일 것이다. 그런 이상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 제국에 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그때 날 살린 것도…….”
고양이 울음소리 덕분에 사람들이 그녀를 구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막상 그녀를 꺼내고 나니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지만.
“이걸 그동안 어떻게 잊고 살았을까……. 이미 난 그들에게 한 번 구원받았었구나.”
레베카는 힘없이 웃었다.
그래 결국 운명이었다. 그가 날 구해주고 나도 그 답례로 그를 구해주는.
신이 준비한 자신의 운명은 그런 것이었다.
“이젠 내 차례야. 율리안.”
레베카는 여신상이 쥐고 있던 장미꽃을 빼내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여신상과 달리 장미꽃은 철로 만든 조각상이었다.
조각상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녹슬지 않았다. 뾰족한 줄기 끝이 마치 단검처럼 날카로웠다.
레베카는 장미 조각상을 손에 들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부디 율리안이 행복하게 살기를.”
그녀는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주마등처럼 그와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행복한 두 번째 삶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그대로 심장을 향해 장미 조각상을 내리찍었다.
“레베카!”
낯익은 목소리에 레베카는 손을 멈추었다.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줄기가 그녀의 옷자락을 스쳤다.
율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환영인가 싶었다. 눈보라와 함께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그가 무척이나 찬란했기에.
하지만 절규하듯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레베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어떻게 날 두고 죽을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유, 율리안?”
율리안은 레베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레베카는 꿈결 같은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게 그런 눈빛을 하고선…… 그런 말들을 속삭여 놓고…… 그런 감정들을 가르쳐주고서 어떻게, 어떻게 감히 내게서 너를 앗아가?”
“하지만…….”
“안 돼. 당신 못 죽어. 그깟 저주, 풀지 않아도 돼. 그냥 내 곁에 있어 줘, 레베카. 그곳이 내겐 천국이야.”
차가운 돌바닥 위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레베카는 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하얀 입김이 둘 사이에 가득 퍼져나갔다.
“아니. 율리안. 난 당신을 떠날 거야. 난 이기적이라서 당신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없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야. 나 같은 건 금방 잊고…….”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디 한번 떠나 봐. 난 매일 괴로움 속에 살 거야.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머리에 총을 쏘고,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바다에 몸을 던질 거야. 당신은 그런 걸 원해?”
율리안이 거칠게 그녀의 손에 들린 장미를 바닥으로 내쳤다.
한없이 다정했던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절박하게 연인을 붙잡는 사내가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럼 릴리는……?”
레베카의 잔인한 질문에 율리안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레베카는 무너지듯 그의 품속으로 뛰쳐 들었다. 그러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애원했다.
“이 저주를 끊지 않는다면 릴리도 당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거야. 난 당신을…… 당신을 사랑해, 율리안. 그리고 릴리도 사랑해. 내 모든 걸 내줄 만큼 사랑해. 그러니 제발 당신을 구원할 기회를 나에게 줘.”
“애초에 구원 따위 존재하지 않았어. 미래에 어떤 비극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난 당신만 있으면 돼……. 당신만…….”
율리안은 다신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레베카를 세게 껴안았다. 그녀의 온몸이 으스러질 듯한 악력이었다.
“이거 놔줘 제발…… 율리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레베카를 끌어안은 채 허공을 보며 영혼까지 마른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레베카가 격하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그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텅 빈 신전에 메아리쳤다.
더는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게 됐을 즈음 레베카가 창백한 낯빛으로 버석한 입술을 달싹였다.
“내겐…… 아이가 있었어.”
율리안이 움찔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예쁜 딸이었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어. 그 아이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을 때, 난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지. 그런데…….”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 레베카가 꽉 막힌 음성으로 한마디씩 버겁게 내뱉었다.
“제플린이…… 내 아이를 빼앗아갔어. 알리시아가 백작저에서 도망친 날 밀고했고, 난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아이를 그 악마의 손에 빼앗겨야만 했어. 그리고 난 죽었어. 불구덩이 속에서 죽었어.”
레베카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레베카가 다정히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고백하듯 말을 내뱉었다.
“난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야. 그래서 당신의 최후와 릴리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아.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미래야. 그러니 나만…… 나만 죽으면 돼. 그저 나를 꿈이었다고 생각해. 꿈에서 깨고 나면 행복해질 거야.”
“네가 보고 온 미래는 오지 않아.”
“뭐?”
“모르겠어? 무도회에서 당신이 내 손을 처음 잡았던 그 순간부터 미래는 바뀌었어. 당신이 없다면 저주가 풀린다 하더라도 내 미래는 영원히 끔찍할 거야.”
레베카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율리안은 단호했다.
그는 정말 이대로 저주를 안고 갈 생각이었다. 레베카와 같이.
“율리안, 제발…….”
“그럼 같이 죽자.”
“뭐?”
“당신이 정 죽어야겠다면 나도 따라 죽을게. 당신이 죽은 뒤 저주가 풀린다면 나도 이제 마음껏 죽을 수 있을 테니. 그럼 우린 사후세계에서도 함께하는 거야. 릴리도 저주에 고통받지 않아도 돼.”
율리안은 정말로 그럴 셈인지 제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걱정하지 마. 난 고통 없이 죽을 자신이 있어.”
그는 당장이라도 제 가슴을 찌를 기세로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어딘가 초점이 나가버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레베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때 율리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레오?”
율리안이 눈을 크게 뜨고 레오를 바라봤다.
레오는 장미 조각상을 바닥에 거꾸로 세우고는 그 곁에 앉아 있었다.
뾰족한 줄기의 끝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레오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 여자에게도 전해줘.’
“그게 무슨…….”
“꺄악! 레오!”
말릴 틈도 없이 레오가 날카로운 철붙이에 달려들었다. 그의 심장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이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베카가 멍하니 있는 그의 팔을 흔들었다.
“괜찮아? 율리안……?”
멍하니 있던 율리안은 제 가슴팍을 더듬었다. 자그마한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하얀 셔츠엔 피가 한 방울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의 말에 레베카가 퍼뜩 장미 조각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있어야 할 레오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레베카는 축복서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숭고한 피의 희생…….”
영문을 몰라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찬란한 빛이 하늘에 떠올랐다.
천장이 무너져 태양이 쏟아져 내렸나 싶을 정도로 맑고 환한 빛이었다.
“드디어…….”
여자인 것 같기도 남자인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율리안과 레베카는 손가락 하나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위에서 뭔가가 강하게 누르는 힘에 두 사람은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그때 빛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공중에서 아래로 천천히 하강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앞에 섰다.
본능적으로 온몸이 떨렸다. 그의 인자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레베카는 감히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이여. 난 카디르 신이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진언이 이어졌다.
“신들의 전쟁에서 패배해 나의 딸 데프리아에게 사로잡혔지. 그 아인 날 고양이의 몸에 가둬둔 채 인간 세상에 던져두었다.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난 너희에게 구원받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카디르 신이 손을 얹었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따스한 기운이 온몸 곳곳에 퍼져나갔다.
“율리안, 그리고 레베카. 신의 농간에 놀아나게 두어 미안하다.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너희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두겠다.”
그가 손을 튕기자 율리안과 레베카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부엉이 가면을 쓴 카디르 신이 그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