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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32화 (완결) (232/232)

232.

“고맙구나.”

“레오…….”

율리안이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가자 카디르가 그를 막아섰다. 그의 뒤로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너희의 차원은 다르다. 이 이상 가까이 오면 영혼까지 부서질지 모른다. 그래도 한때 인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넌 착한 아이다. 율리안. 너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모두 행복이었어. 이제 자유롭게 살아가거라. 네 모든 발걸음을 축복하지만 그 축복이 널 구속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디르는 곧이어 레베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혜로운 아이야. 네게 줄 또 하나의 기적이 남아 있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주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빛무리 하나가 튀어나와 레베카의 배 속으로 쑥 들어갔다.

레베카는 깜짝 놀라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빛이 들어간 것치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 그녀는 공연히 배를 문질렀다.

카디르가 뒤를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이젠 정말 작별이군. 잊지 말거라. 너희들이 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젠!”

그가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레베카가 용기를 내어 그를 붙잡았다.

“이제 율리안에게 저주가 없는 건가요? 릴리에게 저주가 이어지지 않는 건가요?”

카디르가 마지막으로 웃어 보였다.

“그래. 너희들의 앞날엔 빛만이 가득하다.”

이윽고 환한 광채가 신전을 가득 메웠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전 안에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와 율리안은 말없이 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율리안은 제 손을 쥐었다가 폈다.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피처럼 당연하게 여겨졌던 신성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조금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안은 다급하게 레베카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에서 눈물맛이 났다.

이윽고 입술을 뗀 율리안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 눈 색이 어때?”

레베카는 그의 다정한 검은색 눈망울을 마주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밤하늘…… 당신 눈에 밤하늘이 떠 있어.”

“맙소사.”

율리안이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당신과 키스했는데도 눈이 황금색으로 변하지 않는다니……. 끝났어. 레베카! 저주가, 이 빌어먹을 저주가 드디어 끝이 났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아까 한 말 진심이야?”

“어떤 말?”

“날 사랑한다는 거.”

그의 질문에 레베카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진실이야. 나의 진심이야. 당신을 사랑해. 사랑해, 나의 율리안.”

둘은 다시 한번 더 키스했다.

기나긴 입맞춤 후에 두 사람이 한참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동굴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 님!”

크로아와 칸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다른 신전에 레베카가 없는 걸 확인하곤 율리안의 뒤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칸나!”

레베카는 달려드는 칸나를 와락 껴안았다. 칸나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정말 죽지 않으신 겁니까? 제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혼비백산하는 칸나의 얼굴에 레베카가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미안하구나, 칸나. 걱정했지?”

“떠나시지…… 않을 거죠?”

레베카는 발갛게 부르튼 칸나의 뺨을 쓸어내리며 기쁘게 말했다.

“그래. 이제 떠나지 않을 거야.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난 이제 정말로 돌아온 거야.”

“레베카 님!”

칸나가 한 번 더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감격스러운 상봉을 지켜보던 크로아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동굴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전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크로아!”

율리안이 크로아를 와락 껴안았다.

“허억! 공작…… 아니 배, 백작님?”

크로아는 얼떨떨하게 우람한 율리안의 등에 손을 올렸다.

율리안이 적갈색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말했다.

“다 끝났어. 이제 나는 평범한 사람이야.”

“예?”

“저주가 끝났다고! 이제 내 몸엔 신성력이 흐르지 않아. 눈동자 색도 변하지 않아.”

크로아는 잠시간 눈을 끔뻑였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 차차 환희가 차올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이제 백작님이 돌아가실까 봐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레오 님 몸에 생채기라도 나실까 봐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랬어……?”

“맙소사…… 아니 어떻게 저주를……. 아닙니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주가 풀렸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나저나 레오 님은요?”

크로아가 기대에 찬 눈으로 두리번거리자 율리안과 레베카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율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 계시지.”

“예? 어디에요?”

레베카가 맞장구치며 웃었다.

“맞아. 항상 우리 곁에 계실 거야.”

순간 햇빛 한줄기가 동굴 안으로 비쳐들었다. 바닥에 동그랗게 번지는 빛무리가 마치 율리안과 레베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 * *

2년 후.

요하네스 백작 성에는 봄이 찾아왔다. 숲속은 연둣빛으로 물들어가고, 곳곳에서 꽃봉오리들이 방긋방긋 올라왔다.

요하네스가의 고양이들은 꽃 사이를 누비는 나비를 잡느라 온종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백작 성의 온 천지에 평화로운 기운이 스며들었지만 혼자 겨울 속을 거닐듯이 우중충한 얼굴을 한 사내가 있었다.

“아직도 멀었어?”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이는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괜찮은 거 맞아?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데?”

율리안이 초조하게 산실 앞을 어슬렁거렸다.

레베카의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핏기가 가신 새하얀 얼굴로 붙박인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안 되겠어! 들어가야겠어! 빌어먹을!”

그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는 걸 크로아가 기를 쓰고 말렸다.

“레베카 님이 들어오지 말라고 명하셨잖아요! 그리고 지금 들어가면 감염의 위험이 있다고요!”

“하지만……!”

율리안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퀭한 얼굴을 보며 크로아가 혀를 끌끌 찼다.

“누가 보면 백작님께서 출산하신 줄 알겠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레베카는 얼마나 아프다는 거야? 둘째는 절대 가지지 않겠어.”

“그거…… 레베카 님께서도 동의하신 일입니까?”

“그녀가 뭐라 하든지 상관없어. 어쨌든 둘째는 없어!”

그의 결연한 외침과 함께 산실 안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로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아버지가 되셨네요.”

아버지.

그 말에 율리안은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렀다.

뛸 듯이 기뻐할 거라 예상했던 크로아는 새파란 그의 낯빛에 당황했다.

“왜, 왜 그러세요?”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망치지는 않을까?”

크로아가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흠…… 글쎄요. 아무래도 형편없는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겠죠?”

“그렇지? 역시 난…….”

“하지만 백작님은 혼자가 아니시잖아요.”

“어……?”

“레베카 님도 계시잖아요. 두 분이서 힘을 합쳐 잘 해내실 거예요. 서툴면 좀 어떤가요. 다들 그렇게 부모가 되는 겁니다.”

율리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크로아가 그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니까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 마시고 얼른 들어가 보세요. 이대로 뭉그적거리다가 레베카 님께 미움을 사실지도 몰라요.”

“그, 그러지…….”

율리안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노크를 했다.

* * *

“거기 서서 뭐해? 얼른 이리 와.”

문 앞에서 한참을 쭈뼛거리고 있는 율리안에게 레베카가 손짓했다.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서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고 있는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그의 지나친 조심성에 레베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살금살금 올 필요는 없어.”

“당신, 몸은 괜찮아?”

“응. 온몸이 뻐근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아주 좋은 편이야. 그것보다 이것 봐, 우리 딸이야.”

“작다…….”

율리안은 눈도 뜨지 못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는 자신의 팔뚝보다 작았다.

레베카가 아이를 어르면서 말했다.

“당신처럼 짙은 검은색 머리야. 당신을 닮은 딸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내 소원을 들어주셨나봐. 어때, 예쁘지?

“응…… 너무, 너무 예뻐…….”

율리안은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의 자그마한 코가 쉴 새 없이 움찔거렸다. 율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찬찬히 번져나갔다.

“코가…… 당신을 닮았어.”

“뭐? 그걸 어떻게 벌써 알아?”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아이가 길게 하품을 했다. 작은 입이 벌어지는 순간 율리안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는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제 그는 이게 심부전증 따위가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이건 사랑에 빠졌다는 신호였다.

그는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레베카, 맹세할게. 내 남은 인생을 당신과 내 딸의 행복에 기꺼이 바칠 거야. 서툴지라도 항상 진심을 보여줄게.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매일 말해줄 거야. 사랑해, 레베카. 그리고 사랑해, 프시케.”

그의 고백을 잠자코 듣고 있던 레베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방금…… 뭐라고?”

“프시케. 이 아이의 이름은 프시케가 좋겠어. 방금 내 딸이 제 이름을 말한 것 같았거든. 물론 내 착각이겠지만 말이야.”

레베카는 제 딸을 내려다봤다. 아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사 같은 미소에 레베카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녀는 율리안에게 이전 생에 잃어버렸던 딸의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문득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겠다던 카디르 신의 말이 떠올랐다.

레베카는 믿기지 않은 얼굴로 아기를 내려다봤다.

‘정말…… 네가 프시케니?’

프시케가 대답하듯 하품을 크게 했다.

율리안이 아이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프시케, 넌 사랑스러운 내 딸 프시케야. 당신도 마음에 들…… 당신, 울어?”

율리안이 당황하며 그녀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레베카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기뻐서…… 기뻐서 그래, 율리안. 그래, 우리 딸은 프시케야. 어여쁜 내 딸 프시케.”

레베카의 눈물에 율리안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그는 벅찬 가슴을 문지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빠가 되게 해줘서 고마워, 내게 가족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레베카.”

율리안은 레베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레베카의 미소 위로 완연한 봄 햇살이 축복을 내리듯 내려앉았다.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 完>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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