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민등록증
나강인은 옷을 산 후에 피시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근무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사장 차동석이 물었다.
“강인 씨. 주간 풀타임? 아니면 야간 풀타임? 어느 시간대를 원해?”
나강인은 현재 세계의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러려면 외부 활동이 필요하다. 근무 시간이 너무 길게 고정되면 곤란하다.
“파트타임 근무를 원합니다.”
“어? 파트타임?”
“주간, 야간, 특정 시간대만 근무하며, 그 시간도 고정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평범한 피시방 알바를 채용한다면 그런 조건을 받아줄 리 없다.
그런데 차동석이 나강인을 원하는 건 피시방 알바가 아니다. 요리사 역할이다.
“어…. 그럼 점심이나 저녁처럼 밥 주문이 많을 때 위주로 해줬으면 하는데.”
“다른 일이 없을 때는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안쪽에 안 쓰는 공간이 있더군요. 간이침대도 하나 있고요.”
“그거? 창고로 쓸까 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대신에 당분간 잠은 거기서 자겠습니다.”
“어? 진짜?”
야간 알바 중에는 여자 직원도 있다. 돌발상황이 생기면 같은 편은 많을수록 좋다.
차동석이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매장이 시끄러워지면 자던 중이라도 일어나서 좀 도와주겠지? 좋네!’
차동석이 물었다.
“대신에 알바비는 일한 만큼 시급으로?”
“물론이죠.”
결론은 금방 나왔다.
‘풀타임으로 해달라고 고집하다가 우리 가게에서 일 안 한다고 하면 나만 손해지. 특별 요리 주문이 될 때마다 돌발 이벤트처럼 하면 되니까.’
그렇게 해도 이익이 나면 났지 손해는 아니다. 나강인이 일하는 시간이 짧으면 나가는 돈도 적다. 중요한 건 나강인을 붙잡는 것이다.
차동석이 말했다.
“콜. 그러자. 내일까지 신분증 꼭 가져오고. 그게 있어야 알바비를 줄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야간 알바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일했다. 심야에는 남자 한 명만 남는다.
그날 저녁에는 손님에게 요리를 팔지 않았다. 아직 정식 알바가 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강인은 주방에서 그가 먹을 저녁밥을 만들었다.
피시방 식재료를 쓰면서 혼자 먹을 것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넉넉히 만들었다.
야간 알바가 음식 맛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와. 대박.”
자정이 되자 남아있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야간 알바도 남자 한 명만 남아 졸고 있었다.
나강인은 피시방 제일 구석에 앉았다. 이제부터 신분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전산망을 해킹할 수 있겠냐?”
AI 전지인이 큰소리쳤다.
- 침투 작전용 해킹 스킬이 있습니다.
“그 스킬은 2082년 네트워크 시스템 기준 아니야? 지금은 2022년인데?”
- 구형 시스템을 사용하는 낙후된 지역에 침투했을 때를 대비해, 21세기 초의 해킹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습니다.
“어? 잠깐. 그럼 지금 시대의 컴퓨터를 다 해킹할 수 있어? 어느 분야든? 은행 계좌도? 나 혹시 일할 필요 없냐?”
- 아닙니다. 현지 침투와 관련된 해킹 스킬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 현지인으로 신분을 위조하는 스킬입니다.
“혹시나 했다.”
- 민간 AI는 해킹 기능이 아예 없습니다. 저는 군용 전투지원 AI라서 침투용 해킹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시겠지.”
- 해킹 방어는 높은 레벨의 스킬이 기본 탑재되어 있습니다.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아. 그러세요? 그걸로 뭘 방어하게? 이 피시방이 해킹되는 걸 방어하나?”
- 다른 군용 해킹 스킬을 원하시면 정부와 세계 연합의 허가를 받은 후에 별도의 옵션을 구매해 설치해야 합니다.
“그 옵션을 어디서 파는데?
- 자연로보틱스입니다.
“그 회사가 2022년에 2082년용 옵션을 팔고 있다고?”
- 그건 아닙니다.
나강인은 어이가 없었다.
“야. 인공지능은 초기화되면 머리도 나빠지나?”
- 요원님의 기억도 초기화되었습니다.
“난 초기화가 아니라 전문용어로 기억상실이라고 하는 거다. 그리고 난 2022년 세상에서 아주 익숙하게 행동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너보단 낫지.”
나강인이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혼잣말로 떠들어도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작하자.”
- 제가 정보 단말에 물리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손의 임시 제어권을 요청합니다.
“허락한다.”
AI 전지인이 그의 두 손을 제어했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몇 가지 공개 소프트웨어를 인터넷에서 받아 설치했다. 그 소프트웨어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몇 개 새로 만들었다. 그런 후에 그것들을 이용해 정부 전산망 중에 침투할 수 있는 곳을 조사했다.
“잘 안 되냐?”
- 이 시기의 한국 정부 행정 전산망은 외부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외부 접속이 실패하면 요원님이 주민센터에 침투해서 직접 조작해야 합니다.
“너 실력이 영….”
- 행정 전산망과 연결된 외부 장비를 찾았습니다.
“외부와 분리되어 있다며?”
- 유지보수 업체에서 정부 행정 전산망에 임시로 연결한 장비를 찾았습니다. 내일 오전 6시 이전에 행정 전산망과의 연결이 해제될 예정입니다.
“일회용이네. 그럼 서둘러서 내 신분을 만들어.”
그의 손가락이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렸다.
- 시간은 충분합니다. 요원님과 유사한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해당 정보를 기반으로 새로운 신분을 생성….
모니터에 떠 있던 정보가 바뀌었다.
-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가 어쩐 일로 한 번에 해결하나 했다. 뭔데?”
- 나강인의 인물 정보가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지.”
- 지문도 일치합니다.
나강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야. 그게 말이 되냐?”
-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강인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이거 지구 연합의 특수 작전용 군복이라며.”
- 그렇습니다.
“소속은 전략 특수군이고.”
- 전략 특수군의 패치를 확인했습니다.
“2022년엔 지구 연합군이 없고.”
- UN과 주요 국가, 인터넷에서 조회 가능한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지구 연합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름의 가상 단체들만 있을 뿐입니다.
“너는 2082년에 만들어졌고.”
- 2082년식이므로, 조기 생산되었다고 해도 2081년 후반부여야 합니다.
“그런데 2022년에 내 주민등록정보가 있어? 지문까지? 어떻게?”
- 정보가 부족하여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강인이 잠시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이것도 이제부터 내가 알아내야 하는 것 중 하나야. 여기가 지구가 맞는지, 진짜 2022년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지구 연합군과 연락할 방법은 없는지에 더해서, 내 주민등록정보가 왜 2022년에 존재하는지도 알아내야지.”
- 그렇습니다.
“어쨌든 내 신분은 위조할 필요가 없네?”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습니다.
나강인이 지시했다.
“그럼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는 절차나 알아봐. 아니, 그 전에 여기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좀 알아보자.”
- 요원님과 이 나강인이 동일인물이라고 판단하신 겁니까?
“지문이 같다며. 어차피 기억도 없는데 이게 나라고 가정하고 현지 적응 단계를 진행하자.”
- 알겠습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개인정보를 화면에 띄웠다. 나강인이 흥미를 갖고 그걸 확인했다.
“와. 나 대학교도 나왔구나. 군대도 다녀왔고. 어디 특수부대 같은 데 나왔나?”
- 행정전문부대 출신입니다.
“그러냐. 아. 나 회사는 어디 다녔냐?”
- 국민연금 납부 기록이 없습니다.
“응?”
- 쭉 백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니면 공식적인 활동을 일부러 피했을지도 모르지. 비공식적인 자료도 찾아봐.”
AI 전지인이 인터넷을 뒤져 정보를 수집했다. 나오는 건 별로 없었다.
그가 기록된 정보를 확인하다 물었다.
“지난 2년은 왜 기록이 아예 없냐?”
- 2020년부터 SNS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카드 사용 내역도 없습니다.
“왜?”
- 알 수 없습니다.
“음…. 그 이유도 알아내야겠다.”
- 앞으로의 현지 조사 계획에 나강인의 지난 2년간 활동 내역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추가하겠습니다.
***
이튿날 나강인은 근처 주민센터를 찾아가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았다. 그가 거기 찍힌 강원도 주소를 보며 물었다.
“이곳은 어떤 곳이야?”
-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오래된 주택입니다. 그 주택은 1년 전에 인근에서 발생한 산불로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쯧. 거기에 내가 쓰던 물건이 남아있는지 조사해보려고 했더니, 쉽게 되는 게 없네.”
***
나강인이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면 먼저 활동 거점이 필요하다. 지금은 피시방이 그 거점이다.
그가 피시방으로 돌아가 사장 차동석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사장은 그 정보를 알아야 알바비 같은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다.
알바비는 어제 말한 대로 일한 시간만큼만 받기로 했다. 시급은 다른 알바보다 높은 시간당 2만 원으로 정했다.
음식을 조리하는 직원은 보건증이 필요하다. 그 문제는 어젯밤에 이미 해결했다.
나강인이 인터넷으로 발급받은 보건증을 꺼내며 AI 전지인에게 물었다.
“이거 안 들키는 거 확실하지?”
- 안심하십시오. 2082년의 침투 작전용 해킹 기술을 사용해 정보를 조작했습니다.
AI 전지인이 어젯밤에 정부 전산망에 접속해 보건증과 관련된 정보를 조작했다. 다른 지역 병원 서버도 해킹해 그곳에서 검사를 받은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안심하라니까 더 찜찜하잖아.”
오늘은 점심때 두 시간만 일하기로 했다. 어제 산 식재료 덕분에 할 수 있는 요리가 늘었다.
AI 전지인이 그의 손을 빌려 요리를 시작했다.
나강인이 대량으로 조리되는 음식을 보며 물었다.
“이건 이름이 뭐냐?”
- 야전 취사형 복합 전투식량 레시피 중 2075-B형으로 조리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 이걸 그런 이름으로 팔면 참 좋겠다. 그치?”
- 보통은 잡탕밥이라고 부릅니다.
***
피시방 손님이 물었다.
“특선 요리라고 써진 이거는 뭐예요?”
사장 조카인 주간 알바 차은서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 초빙 요리사님 실력이 진짜 끝내주거든요. 메뉴는 그때그때 바뀌는데 오늘은 그 특선 요리를 만드신대요.”
야전 전술 요리법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대량의 음식을 조리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는 몇 시간씩 재료를 숙성시키는 요리는 만들지 않는다.
손님이 화면에 써진 글씨를 마저 읽었다.
“전가복 스타일 잡탕밥?”
“맛은 비슷한데 해삼이나 전복처럼 비싼 재료는 안 들어가요. 대신에 싸잖아요. 오늘 점심때 딱 두 시간만 팔 거예요.”
“그럼 오늘은 어제 그 맛있는 볶음밥은 안 팔아요?”
“네. 그건 어제 초빙 요리사님이 예고편을 보여드린 거예요. 정 볶음밥을 원하시면 제가 직접 볶아드릴까요?”
손님이 어제 먹은 볶음밥을 생각해보았다. 이 피시방에서 이전에 팔았던 냉동 볶음밥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아니요. 이 잡탕밥이 어째 족보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난 이걸로.”
주문한 요리는 금방 나왔다. 오늘 요리는 야전 전술 요리법을 사용해 대량으로 만든 것을 밥에 부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음…. 겉보기에는 그럴듯한데….”
그가 먼저 젓가락으로 채소를 집어 먹었다.
“음?”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그가 얼른 숟가락으로 밥과 요리를 같이 떠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음식이 감칠맛을 자랑하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우와! 이거 장난 아니게 맛있다!”
그 목소리는 충분히 컸다. 곧바로 주문이 쏟아졌다.
먼저 와서 잡탕밥을 먹어본 사람이 친구를 불렀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렇게 불려온 사람은 밥을 먹기 위해서 짧으면 30분이라도 피시방을 이용했다. 더 길게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두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재료가 모두 소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