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
스마트폰을 사고 나서 사흘이 지났다. 그는 그동안 인터넷을 통해 현재 세상을 파악하며 지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지구 연합이나 전략 특수군에 관한 자료를 찾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런 이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구 연합’은 상당히 흔했다. 동호회 이름이 지구 연합인 곳도 있었다. ‘전략 특수군’도 종종 검색됐다.
하지만 그중 어느 곳도 AI 전지인이 아는 곳은 아니었다.
“우리처럼 2082년과 관계된 누군가가 있을까 싶었는데, 없나 보다.”
- 우리처럼 정체를 숨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지금 시대엔 우리뿐이거나.”
피시방은 지난 며칠 동안 점심과 저녁 음식 장사로 대박이 났다.
주방장 특선 요리는 나강인이 피시방에 있을 때만 판매된다. 나강인이 주변 환경을 조사하러 외출했다가 식사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특선 요리를 팔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님이 많이 늘어났다. 밥만 먹고 가는 손님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왕 온 김에 피시방을 한두 시간이라도 이용하고 갔다.
손님이 많아지니 아르바이트 직원도 더 필요해졌다. 특히 사람이 몰리는 저녁때가 문제였다.
사장 차동석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지금 새 알바가 면접 보러 오는데, 강인 씨도 같이 볼래?”
나강인은 특선 요리만 맡는다. 피시방 관리는 그의 일이 아니다.
“제가 뭘 굳이.”
“바쁠 때만 가끔 일하는 알바지만 급할 땐 주방보조도 시킬 건데?”
“사장님이 알아서 뽑으시죠.”
“그럼 그럴까? 아. 저기 왔다.”
나강인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음?”
AI 전지인이 영상 자료를 AR 렌즈에 띄웠다.
난장판이 된 사무실에서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외치는 대학생 해커의 동영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 4일 전에 억류 상태에서 구출한 민간인 해커입니다.
“알아.”
차동석이 안성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이리 와요. 이력서는?”
“여기요.”
“이야. 한국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컴퓨터 잘하겠네?”
“네. 제가 옛날부터 진짜 잘했어요.”
“우리 가게에 지원한 이유는? 집에서 가까워서겠지?”
미안해서다.
안성환이 만든 조작 프로그램이 이 피시방에 테스트 목적으로 설치됐다가 나강인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프로그램은 안성환도 억지로 만든 것이지만 그래도 그 일이 조금 미안했다.
그렇다고 그게 이곳을 찾아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범한 일을 알바로 하고 싶어서요.”
“응? 안 평범한 일도 있나?”
“그게….”
안성환이 잠시 망설였다. 양심이 찔려서 이곳에 왔지만, 사실대로 다 말하기는 어려웠다.
“제가요. 어디 가둬진 채로 협박받으면서 일한 안 좋은 기억이….”
“저런. 그럼 그놈들은?”
“경찰이 다 잡아갔어요.”
“다행이다.”
면접은 금방 끝났다. 사장 차동석이 말했다.
“오늘부터 일해. 성환이 넌 바쁠 때만 땜빵으로 일하는 거 알지?”
“네! 저도 그게 편해요!”
“급할 땐 주방보조도 해야 하니까 여기 강인 씨한테 인사해. 아. 강인 씨는 요리사야. 원래는 다른 일은 안 하고 요리만 하는데, 컴퓨터 다루는 실력도 진짜 좋으니까 정 급할 때는 도와달라고 해.”
안성환이 꾸벅 인사했다.
“형. 안녕하세요. 안성환입니다.”
“음….”
- 구출 대상자와 같이 근무하면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나강인이 속삭였다.
“그래도 날 형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자르라고 하냐?”
-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결론이 아닙니다만?
“넌 평소엔 사람 같다가도 가끔 너무 차가울 때가 있다니까.”
그가 안성환에게 말했다.
“난 나강인이야. 반가워.”
“저도요.”
안성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요. 형.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 구출 대상자가 눈치챈 것 같습니다. 즉시 자르십시오.
“이 동네에 살면서 오다가다 봤겠지.”
“아하!”
***
이튿날 낮에 나강인이 동네에 있는 영화관 앞을 지나갔다.
그의 눈에 설치된 AR 렌즈에는 영상 재생 기능이 있다. 어제 AI 전지인은 안성환이 붙잡혀 있을 때의 영상을 AR 렌즈를 통해 보여주었다.
“지인아. AR 렌즈를 쓰면 침대에 누워서 영화를 볼 수 있냐?”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AR 렌즈로 영화를 보시려면 해당 콘텐츠를 구매하셔야 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그걸 파는 곳이 없잖아.”
- 그렇습니다.
“역시 넌 나를 놀리는 거 맞아. 내가 딱 알아봤어.”
그는 대형 마트에 들러 그곳에 전시된 전자제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인터넷으로만 수집한 정보와 실제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실물 확인을 위해 이곳에 들렀다.
그는 전자제품매장을 충분히 둘러본 후에 그 대형 마트의 식재료 매장에서 향신료 몇 가지를 샀다. 향신료는 재활용 봉투에 담았다.
그런 후에 피시방으로 돌아갔다.
골목 사이 지름길로 걸으면 좀 더 빨리 피시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AI 전지인의 정보 수집 대상이 되었다.
대낮의 주택가 골목은 지나가는 사람이 몇 명밖에 없었다.
갑자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화재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나강인의 앞쪽 5층 원룸 건물 중간에 반투명한 붉은색 동그라미가 겹쳐졌다. 그 동그라미는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보여주는 가상 이미지였다.
- 저곳에서 화재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물 화재경보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복도 창문 밖으로 불꽃이 살짝 보였다.
- 정보를 수정합니다. 이미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이 난 곳은 폭이 좁은 5층 원룸 건물이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2층을 태웠다.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 다급히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다.
나강인의 몸에는 인체 삽입형 전투지원 AI가 들어있다. 눈에는 증강 현실 장치가 있고 귀에도 보조 모듈이 있다. 다리의 근력도 강화되어 있다.
문득 머릿속에 저 불을 끌 특수한 방법이 떠올랐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저 정도 화재는 한 방에 진압할 수 있다.
그가 불난 곳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불길을 향해 손을 쭉 뻗으며 외쳤다.
“화재 진압용 빔 발사!”
AI 전지인이 즉시 반응했다.
- 미쳤습니까? 요원님.
“어…. 나한테 냉동광선 초능력은 없구나?”
- 있으면 그게 사람입니까?
나강인이 슬그머니 팔을 내리며 말을 돌렸다.
“지인아. 저 화재를 진압할 방법을 찾아.”
- 당연히 소화기나 소화전을 쓰셔야 합니다. 건물 내의 소화 장비를 사용하십시오.
나강인이 건물 1층에 들어갔다. 소화기 하나가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그걸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을 태우는 불길은 꽤 거셌다. AI 전지인이 소화기를 사용해야 할 지점을 찍어주었다. 하지만 그 불길에 소화기를 사용해도 화재는 진압되지 않았다.
“야. 이걸로는 불이 안 꺼져.”
- 위험합니다. 건물 밖으로 탈출하십시오.
“하랄 땐 언제고.”
그가 밖으로 나와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지. 저 건물에 아무도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
옥상에 사람 모습이 보였다.
-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
옥상에서 앳된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팔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임시 거점 피시방의 손님입니다.
화재를 구경하러 나온 동네 사람들이 옥상을 보고 당황했다.
“어? 어? 저기 사람 있다!”
“소방차는 왜 아직도 안 와?”
“아이고. 어떡해! 어떡해!”
나강인이 물었다.
“소방차 도착 예상 시간은?”
- 가까운 소방서까지의 거리와 이 지역 이 시간대의 평균 도로 상황을 고려하면, 빨라도 4분은 걸립니다.
“저 옥상에서 4분을 버틸 수 있을까?”
- 불가능합니다. 그 전에 불길이 옥상에 도달할 확률이 높습니다. 4분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틴다 해도 생존은 어렵습니다.
소방차가 도착해 물을 뿌린다고 해서 불이 바로 꺼지는 건 아니다. 사다리차도 사다리를 전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 소방차가 불을 끄기 전에 옥상의 민간인은 99% 확률로 사망합니다.
“어쩔 수 없네.”
- 어쩔 수 없습니다.
“손님인데 구하러 가야지. 내가 옥상으로 올라가서 데리고 탈출한다. 진입 경로를 찾아.”
AI 전지인은 군소리 없이 정보를 분석했다. 곧바로 건물 외벽에 반투명한 표시 여러 개가 나타났다. 경로 대부분은 창문틀과 겹쳐져 있었다.
- 2층 계단이 화재로 차단되어 실내에는 이용 가능한 통로가 없습니다. 표시한 지점을 잡거나 밟으면서 옥상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나강인이 가지고 있는 마스크를 확인했다. 미세먼지를 막을 수 있는 마스크였다.
“이걸로 저 연기를 막을 수 있냐?”
- 시각 정보만으로는 이 마스크의 차단 성능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역시 아는 게 없구나?”
- 유독가스를 전혀 막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움직이십시오. 연기를 피해 올라갈 수 있는 경로를 제안하겠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건물 벽면에 가상의 선이 주르륵 그려졌다. 그 경로에는 손으로 잡거나 발을 디딜 수 있는 외부 구조물들이 있었다.
“그래도 마스크를 안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가 마스크를 쓰고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러는지 깨닫지 못했다.
나강인이 건물 앞에서 슬쩍 점프해 창문틀 위쪽을 잡았다. 그런 후에 몸을 위로 솟구쳤다. 발에 창문틀 아래쪽이 닿았다. 그가 창문틀을 밟으며 위로 점프했다. 2층 창문 아래쪽 돌출부위가 손에 닿았다.
“어? 저 사람이 벽을 타고 올라간다!”
그는 그곳을 잡고 몸을 위로 다시 끌어올렸다. 그런 후에 위로 또 뛰었다.
“와아!”
점프하는 과정에서 각도가 틀어져 몸이 벽에서 떨어지면 아래로 추락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되기 전에 다음 층의 창문틀을 손으로 잡았다.
층과 층 사이에는 돌출된 구조물이 조금 있었다. AI 전지인이 적당한 구조물들을 표시해주었다.
그는 손과 발로 그런 것을 잡거나 밟으면서 균형을 잡았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 어? 설마 저렇게 옥상까지 올라가려는 거야?”
“와. 저게 되네.”
“너무 위험한 거 아냐?”
나강인은 위로 올라가며 AI 전지인에게 지시했다.
“다른 층에도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해.”
-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3층부터는 화재에 당하기 전에 옥상으로 대피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럼 2층은?”
- 2층은 창문을 열고 탈출할 수 있는 높이입니다.
“2층에 사람이 있었다면 이미 탈출했겠네.”
나강인은 보고를 들으며 위쪽 창틀을 잡았다. 팔에 힘을 주자 몸이 다시 위로 쑥 올라갔다.
그가 5층 창틀에 매달렸을 때 상황이 변했다. 3층 창문을 깨고 빠져나온 시뻘건 불길이 괴수의 혓바닥처럼 위쪽을 훑었다.
지상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 어? 어?”
“불이 위로 번진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불길이 퍼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빠릅니다. 이 건물은 내부에 난연성 소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좀 미리 알아내라.”
- 2022년 건축 자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화재 상황 예측에 오차가 발생했습니다.
나강인이 5층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런 후에 다리를 구부려 창틀 끝에 발끝을 걸고 그대로 박찼다.
강하게 점프한 덕분에 몸은 위로 올라갔지만, 완전히 수직으로 올라가진 못했다.
몸이 건물 벽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지상에서 비명이 들렸다.
“꺄악!”
AI 전지인이 고속 음성으로 말했다.
- 난간을 잡아요!
그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에 옥상 철제 난간의 수직 기둥이 잡혔다.
나강인이 팔을 당기며 공중에서 몸을 옆으로 눕혔다. 그런 후에 난간의 윗부분을 가볍게 타고 넘었다.
“쉽네.”
윤아름이 옥상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나강인을 보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 구해주러 오셨죠? 고마워요! 이 은혜 진짜 평생…. 어? 피시방 요리사 오빠?”
“내가 거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몇 번 안 봤을 텐데 날 알아보네? 마스크도 썼는데.”
“대박! 오빠니까 알아봤죠!”
4층 유리창이 터져나갔다. 불길도 치솟았다.
“꺄악!”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불길이 수정한 예상치보다 더 빨리 번지고 있습니다. 즉시 이 건물에서 탈출하셔야 합니다.
나강인이 옆을 보았다. 골목 건너편 건물도 5층이다.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얘 데리고 옆 건물로 점프하면 넘어갈 수 있을까? 얘가 몸무게는 가벼워 보이잖아.”
그는 며칠 전에 대학생 해커 안성환을 구출하면서 두 놈을 걷어찼다. 그때 그는 전력을 다해 찬 게 아니다. 오히려 힘 조절을 했다. 그런데도 상대는 책상을 부수며 날아갔다.
“내가 작정하고 점프하면 얘랑 같이 건너편 건물 옥상까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투지원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지상에 목격자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 한 명을 들고 건너편 건물 옥상까지 점프하는 모습이 다수의 인물에게 목격되면, 정체를 의심받습니다. 그러면 잠입 적응 임무가 실패할 확률이 굉장히 높아집니다.
“알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그가 옥상을 둘러보았다. 빨랫줄로 쓰던 줄이 보였다.
“저걸 써서 아래로 내려갈까? 레펠처럼.”
- 현재 건물 아래쪽은 화재로 인해 이동이 어렵습니다. 현재 모든 방향이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럼 건너편 건물 난간에 이 줄을 연결한 후에 외줄타기로 건너가는 건?”
즉시 건물 사이 허공에 반투명한 가상의 직선이 그어졌다.
-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