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0화 (10/411)

10. 불 II

나강인이 바닥에 놓인 빨랫줄을 잡았다. 빨랫줄의 끝에는 쇠파이프가 묶여 있었다.

- 직접 던지시면 제가 세부 동작을 조정하겠습니다.

“응? 네가 내 손을 써서 던져주는 게 아니고?”

- 신체 전체를 사용해 그 쇠파이프를 던지는 행동은 투창 등의 공격 행동과 유사합니다. 제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손으로 요리는 해도 되지만 그런 공격 행동은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그렇습니다. 직접 하셔야 합니다. 저는 세부 동작 보정만 할 수 있습니다.

“세부 동작 보정의 효과는?”

- 명중률이 높아집니다.

“뭐, 그거면 됐지.”

그는 줄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 확인한 후에 그 쇠파이프를 건너편 건물 옥상 난간을 향해 던졌다.

쇠파이프가 빨랫줄을 매단 채로 날아가 철제 난간 사이에 쏙 들어갔다.

나강인이 즉시 빨랫줄을 당겼다. 쇠파이프가 난간에 걸렸다. 빨랫줄은 팽팽해졌다.

그는 빨랫줄을 강하게 당겨 이쪽 옥상 철제 난간에 단단히 묶었다. 가상으로 그어진 선과 실제 빨랫줄의 라인이 거의 일치했다.

윤아름은 나강인이 뭘 하려는지 깨닫고 겁을 덜컥 먹었다.

“요리사 오빠. 설마 혼자 도망가시는 건 아니죠?”

“그럴 거면 여기까지 안 올라왔지.”

“하지만 전 외줄타기 할 줄 모르는데….”

“네가 타는 거 아니다.”

“네? 그럼요?”

건물 옥상 출입구가 터져나가며 시뻘건 불길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윤아름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나강인이 그녀를 두 팔로 안아 번쩍 들었다. 그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녀를 들고 그대로 빨랫줄 위로 올라갔다.

빨랫줄은 나강인이 단단히 당겨서 묶었는데도 두 사람이 올라가자 아래로 조금 처졌다.

그녀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지상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사람들도 당황했다.

“어? 어?”

“설마 저렇게 건너편까지 가려는 거야?”

“바닥에 뭐라도 쌓아봐! 저러면 백 프로 떨어진다고!”

이미 불길은 옥상을 빠르게 덮고 있었다. 화염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연기도 문제였다.

나강인이 그녀를 안고 줄 위를 뚜벅뚜벅 걸었다. 줄이 조금 흔들렸다. 윤아름의 비명이 커졌다.

“꺄아아악!”

AI 전지인은 나강인이 줄에 올라갔을 때부터 그의 팔과 다리 움직임을 보조해 중심을 잡았다.

나강인이 속삭였다.

“이 속도로 걸어가도 충분해?”

- 요원님은 현재 가장 안정적으로 건너편 옥상까지 이동할 수 있는 속도로 걷고 계십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

건물 아래쪽에서 불길이 위로 치솟았다.

AI 전지인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 돌발상황 발생! 예상보다 빨리 줄이 끊어질 겁니다!

“얼마나!”

- 건너편 옥상 도착 1초 전에 줄이 끊어집니다!

눈앞에 ‘긴급 상황 해결 방법 제안’이라는 제목과 함께 몇 가지 대안이 반투명한 글씨로 나타났다.

그걸 일일이 읽고 고를 시간은 없다.

AR 렌즈에 반투명한 경고 표시 여러 개가 동시에 떴다. AI 전지인의 다급한 음성도 들렸다.

- 줄이 끊어집니다! 대비하십시오!

나강인이 윤아름을 건너편 옥상을 향해 던졌다.

“꺄아악!”

짧은 거리를 날아간 윤아름은 건너편 옥상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래에서 올라온 화염은 이미 빨랫줄을 덮친 상태였다. 빨랫줄은 순식간에 불길에 녹아 끊어졌다.

나강인의 몸도 5층 옥상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지상에서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안돼!”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강인은 아래로 떨어지며 오른손을 뻗어 빨랫줄을 잡았다. 빨랫줄이 휘어지며 팔에 감겼다.

그는 오른손으로 빨랫줄을 잡은 채로 건물 외벽을 발로 밟으며 달렸다. 팔에 감은 빨랫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의 몸이 마치 그네를 타는 것처럼 반원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그가 한 손으로 줄을 잡고 건물 외벽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빨랫줄이 완전히 수평을 그렸다. 나강인은 난간을 박차고 뛰어넘으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지상에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살았어! 저 사람 살았다고!”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윤아름은 아직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나강인이 팔에 감긴 줄을 풀며 물었다.

“너 안 죽었지?”

옥상을 데굴데굴 구르던 윤아름이 벌떡 일어났다.

“으악! 오빠 살아있어요? 어떻게요? 막 하늘도 날고 그래요? 초능력자세요?”

“이 줄 잡고 올라왔어.”

윤아름은 그가 벽을 타고 달린 건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줄을 이용해서 올라왔다는 건 알아들었다.

“대박!”

나강인이 불길에 휩싸인 건너편 원룸 건물을 보며 작게 말했다.

“지인아. 너 계산이 자주 틀린다? 너도 전략 특수군 소속이니까 믿어도 된다며?”

- 대도시 콘크리트 건물 외벽에 인화성 소재를 사용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2082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022년에도 저런 건 쓰면 안 되는데, 쓴 건물이 많다더라.”

-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싸니까. 누군가 안전을 팔아서 돈을 벌었지.”

***

소방차가 도착해 화재 진압을 시작했다. 하지만 물을 뿌린다고 곧바로 불이 꺼지는 건 아니다. 건너편 옥상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윤아름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와. 나 저기 있었으면 죽었을 듯.”

“그런 소리를 그렇게 담담하게 하냐?”

“살았으니까요. 아깐 진짜 죽을 거 같아서 소리를 지른 거고요. 소리 너무 질러서 저 목 살짝 맛 간 거 들리죠?”

“내가 네 예전 목소리를 어떻게 안다고 그걸 구분하냐?”

“와. 난 오빠 목소리 아는데. 오빠도 나 아니까 말 놓은 거 아녜요?”

“음….”

긴급 상황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해 말을 놓았다. 그래야 그녀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킬 것 같아서였다.

“우리 피시방 손님인 것만 알지.”

그녀가 큰소리쳤다.

“피시방 자주 갈게요. 맨날 갈게요.”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구출한 민간인은 대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야.”

“네!”

“너 대학 신입생이지?”

“앗! 어떻게 알았지?”

“그러게. 어떻게 알았을까?”

- 피시방 직원에게 신입생 할인에 관해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윤아름이 물었다.

“혹시 오빠 나한테 관심이….”

“있겠냐? 너 우리 직원에게 신입생 할인 물어봤다며.”

그녀가 활짝 웃었다.

“히히. 진짜 나를 아는구나.”

“어쨌든 너 공부는 언제 하고 우리 가게를 매일 오겠다는 거야?”

“공부는 고등학교 때 실컷 했잖아요. 그리고 인생이 공부가 다인가요? 프로게이머라는 길도 있잖아요. 열심히 연습해서 미녀 프로게이머가 될게요.”

“너 네가 하는 게임에서 상위 1%에 들었냐?”

“아뇨.”

“너 미녀냐?”

“아뇨.”

“그런데 뭐가 된다고?”

그녀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럼 게임 스트리머가 되면 되죠.”

“콘텐츠는 생산해봤냐?”

그녀가 큰소리쳤다.

“물론이죠! 저 게임방송도 해요!”

나강인이 지난 며칠간 지낸 곳이 피시방이다. 그도 게임방송이 뭔지는 안다.

그가 물었다.

“구독자 몇 명?”

“실시간은 평균 열 명쯤이요.”

“야. 공부해.”

“넹.”

나강인이 먼저 옥상 출입구를 열었다.

“먼저 내려가라.”

윤아름이 계단을 내려갔다.

나강인이 뒤따라 내려갔다. 그래야 앞에서 걷는 윤아름에게 문제가 생기면 바로 알 수 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구출한 민간인의 심리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알아. 겁먹은 걸 숨기려고 허세를 부리고 있잖아.”

- 저 민간인은 요원님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어쩌겠냐. 마스크를 썼는데도 날 알아봤는데. 정체를 숨겨달라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해.”

그가 윤아름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저 건물 옥상에는 왜 있었어?”

“저 건물 원룸에서 자취해요. 옥탑은 바람 쐬러 올라갔어요.”

그들이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까지도 화재는 진압되지 않았다. 소방차가 몇 대 더 도착했다.

아까 건물 가까이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제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나강인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윤아름도 죽을 뻔한 곳에 있기 싫어했다. 그녀도 그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강인이 화재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윤아름에게 물었다.

“넌 갈 곳은 있냐?”

“방이 홀라당 타버렸으니까 일단 찜질방?”

“그래라.”

나강인이 피시방으로 돌아왔다.

사장 조카 차은서가 얼른 다가와 물었다.

“오빠. 이제 왔…. 어? 어디서 연기 냄새가 난다. 숯불구이 먹고 왔어요? 아닌데? 이거 그냥 연기 냄새인데? 아. 저쪽에 불났다던데 거기 구경 갔다 온 거예요?”

“어.”

“소스 사러 간다더니 오는 길에 그걸 봤구나. 그런데 왜 빈손이에요? 소스는요?”

그것까지 챙겨올 상황이 아니었다.

“샀는데, 봉투째로 화재현장에 놓고 왔다.”

“와. 불구경이 얼마나 신났으면 그걸 놓고 와요? 이미 누가 가져갔겠다.”

“내 알바비에서 까.”

“됐어요. 뭘 이 정도로.”

“네 돈 아니잖아?”

“우리 삼촌 돈이 내 돈이죠.”

나강인이 피시방 자재 구매용 신용카드를 돌려주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지인아. 방금 그 화재에 관해 기사 나온 거 있는지 좀 찾아봐라. 지나가던 사람이 피해자를 구했다는 정도로만 나오면 좋겠는데.”

AI 전지인이 그의 손을 제어해 정보를 수집했다.

- 현장 영상을 찾았습니다.

“영상까지 있냐?”

모니터에 화재 상황 영상이 재생됐다.

그가 벽을 타고 올라갈 때의 영상은 건물 다른 쪽에서 찍힌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건물 사이에 빨랫줄을 걸고 윤아름을 안은 채로 건너는 모습은 카메라에 확실히 찍혔다.

건물 아래에서 빠져나온 불길이 위로 치솟아 빨랫줄에 닿았다. 그 즉시 나강인이 윤아름을 건너편 옥상으로 던졌다. 그런 후에 줄이 끊어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가, 곧바로 환성이 터졌다. 나강인이 한 손으로 줄을 잡고 외벽을 달려 옥상으로 올라간 후에 영상이 끝났다.

나강인이 명령했다.

“지인아. 인터넷에서 이 영상 전부 삭제해.”

- 그런 해킹 스킬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 없어?”

- 저는 전투지원 AI입니다.

“그럼 해킹은 뭘 할 수 있는데?”

- 신분 조작용 해킹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이미 내 신분이 있어서 쓸모가 없었잖아.”

- 군용 해킹 방어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는 해커의 공격이 없어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나강인이 모니터 속 영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건 못 지운다는 거네?”

- 그렇습니다.

“장하다.”

그가 옷을 보았다. 불길이 몸에 직접 닿은 적은 없다. 그래도 연기 냄새가 조금 나긴 했다.

“좀 씻어야겠…. 아. 찜질방.”

나강인은 지난 며칠 동안 피시방에서 잠을 잤다. 머리는 이곳에서도 감을 수 있고 샤워도 밤에 화장실 문을 잠가놓고 하면 할 수 있지만, 편하지는 않다.

“활동 자금을 좀 벌었으니까 럭셔리하게 찜질방 가서 씻어야지.”

- 궁전 찜질방이 제일 가깝습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간식이 있습니다.

“궁전. 이름도 마음에 든다. 그런데 간식이라니?”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미각과 후각을 공유한다.

- 최근 조사 결과 궁전 찜질방에서 파는 살얼음이 살짝 언 식혜의 평이 굉장히 좋습니다. 진짜 맛있다고 합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그거였냐?”

***

화재는 거의 진압됐지만 건물에서는 아직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불이 난 곳 맞은편 건물 옥상에 형사 두 명이 올라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건너편을 보며 말했다.

“와…. 이 난간에 줄을 연결하고 저기서 여기까지 건넌 거야? 그것도 사람을 안고?”

“대단하지? 외줄타기 인간문화재 같은 거 아닐까?”

“누구래?”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아는 사람이 없어.”

“불난 거 구경하던 사람이라며. 옥상에 갇힌 사람을 보고 벽 타고 올라갔다고 해서, 우리가 굳이 CCTV 뒤져가며 찾을 필요는 없겠지?”

“당연하지. 그리고 누전이나 가스불 때문에 난 화재로 밝혀지면 우리 팀 사건도 아니야.”

형사 박기정의 스마트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박기정이 발신자를 확인한 후에 전화를 받았다.

“왜요?”

- 이 새끼는 팀장이 전화를 걸었는데 왜요는.

“휴가 또 자르니까 그러죠. 저 이번 휴가는 진짜 꼭 가고 싶어요. 제 열정은 범인 잡다가 다 타서 재만 남았다고요.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 야. 우리 엿 됐다.

“엿 하도 먹어서 이제 엿 싫은데…. 왜요? 누전이나 가스불이 아니라 방화예요?”

- 그건 아직 모르지. 그게 문제가 아니야. 3층에서 사망자가 발견됐다.

형사 박기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젠장. 화재 사망자는 없는 줄 알았는데….”

동료 형사도 한숨을 쉬었다.

“이러면 이제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란 건데.”

형사 박기정이 제안했다.

“그 외줄타기 고수가 여기에 뭐 흘리고 간 건 없는지부터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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