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1화 (11/411)

11. 형사

나강인은 찜질방에서 몸에 묻은 화재 흔적을 깨끗이 씻어냈다. 그런 후에 넓은 방에 자리를 잡았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수분과 칼로리 보충, 체온 안정을 위해 살얼음이 살짝 덮인 식혜를 제안합니다.

“아직 여기서 흥청망청 쓸 만큼 활동자금을 벌지는 못했다.”

- 활동자금을 요원님의 컨디션 관리에 사용하는 건 흥청망청이 아닙….

AI 전지인의 말이 갑자기 빨라졌다. 내용도 바뀌었다.

- 2시 방향에서 오늘 화재현장에서 구출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아름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쪽으로 걸어옵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나강인에게 다가와 앞에 앉았다.

“와. 셰프 오빠. 나 따라온 거예요?”

“나도 씻으러 온 거야.”

“난 집이 다 타버려서 여기서 씻었잖아요. 근데 셰프 오빠는 왜 여기서 씻어요? 집 없어요?”

“어. 집이 없어.”

윤아름은 살짝 당황했다.

“엥? 집이 왜 없어요? 오빠네 집도 탔어요?”

“이 동네에 온 지 며칠 안 돼서 그동안은 피시방에서 잤어.”

“아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히히. 저기요. 오빠.”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목소리에서 불순한 의도가 감지됩니다.

“배고파요. 밥 좀 사주세요.”

“죽을 거 살려놨더니 배까지 채워달라네. 넌 돈 없냐?”

“집이 홀라당 타버렸는데 지갑 챙겨올 정신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찜질방에 올 돈은 있었나 보네?”

“주머니에 돈이 딱 여기 올 만큼만 들어있었어요. 밥 먹을 돈도 없어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재난 현장에서 구출한 굶주린 민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건 지구 연합군이 해야 할 당연한 조치입니다. 구호 물품으로 차가운 식혜와 구운 계란을 제안합니다.

나강인은 다른 해결법을 안다.

“다 씻었으니까 피시방 가자. 밥해 줄게.”

“와! 넹!”

***

나강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피시방으로 돌아왔다.

차은서가 물었다.

“오는 길에 잃어버린 양념도 찾아본다면서요. 찾았어요?”

“아니. 거긴 다 치워서 아무것도 없더라. 대신에 얘를 찾았어.”

차은서가 윤아름을 보며 살짝 당황했다.

“이분은 자주 오는 손님이라서 같이 온 줄 몰랐어요. 근데 이 손님을 찾다니요?”

“저 앞에 불난 건물에 살던 애야. 집이 타버려서 갈 곳이 없대.”

윤아름이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지갑도 집에 놓고 나와서 땡전 한 푼 없다길래 데려왔다.”

사장 조카 차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땡전 한 푼 없으면 피시방 이용료도 없겠네요?”

“넹. 히히.”

나강인이 설명했다.

“게임 하라고 데려온 게 아니야. 밥이라도 먹이려고 데려왔어.”

차은서가 툴툴댔다.

“아니, 우리가 뭐 식당인가?”

“그러는 넌 왜 집에 안 가고?”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밥이라도 먹고 가려고요.”

나강인이 차은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은서가 시선을 피했다.

“은서야. 너 뻔뻔하단 말 자주 듣지?”

“아! 요리를 파니까 우린 식당 맞네! 고급 레스토랑이네!”

***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잡다한 물건이 대충 쌓여 있었다.

형사 박기정이 물었다.

“여기 이 물건들은 다 뭐야?”

현장에 있던 순경이 대답했다.

“화재 진압에 방해되는 물건은 다 이쪽에 치워놓았습니다.”

“마트 비닐봉지도 있네?”

동료 형사가 말했다.

“누가 불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놓고 간 거겠지.”

박기정이 마트 비닐봉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사람을 구하려고 5층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당연히 두 손 두 발 다 써야겠지? 손에 마트 비닐봉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바닥에 내려놨을 테고.”

동료 형사가 물었다.

“이 비닐봉지가 그 외줄타기 고수가 놔두고 간 거라고?”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동료 형사가 봉투를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음식 만드는 데 쓰는 소스밖에 없어. 아. 영수증도 있다. 아니, 있었는데 물에 젖고 찢어져서 누구 건지 알아보긴 어렵다.”

“마트 이름은 알아볼 수 있잖아. 거기 가서 CCTV를 뒤져보면 누가 샀는지 알 수 있겠지.”

동료 형사가 물었다.

“사람을 구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찾을 필요가 있나? 범인도 아닌데.”

그들에게는 이것 말고도 해결해야 할 사건이 많다. 이번 화재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바람에 그들의 발등에도 불이 붙었다.

박기정이 툴툴댔다.

“그렇긴 한데, 과장님이 찾아내라잖아. 어쩌겠냐? 까라면 까야지.”

“젠장.”

***

나강인이 밥을 만들어 접시에 담았다.

윤아름이 그 밥을 먹으며 감탄했다.

“셰프 오빠 실력은 진짜 최고! 매일 먹고 싶어요!”

“아부해도 더 안 준다.”

“진짠데.”

“밥 다 먹었으면 가라.”

“집이 홀라당 타버렸다니까요? 지금 당장은 갈 데가 없어요. 돈도 없고요. 그런데!”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인 A4용지를 가리켰다.

“여기서 알바 뽑는다면서요. 아싸아!”

“난 모르는 일이야.”

차은서가 옆에서 말했다.

“우리 야간 알바가 사정 생겨서 그만둬야 한대요. 어쩐지 요즘 자꾸 늦더라. 그래서 새로 뽑기로 했어요. 그건 삼촌이 일단 출력해놓으라고 한 건데….”

윤아름이 얼른 A4용지를 뒤집어 모집 공고가 보이지 않게 놓으며 말했다.

“언니! 이런 거 붙일 필요 없어요. 저 지금 당장부터 일할 수 있거든요!”

“네? 제가 언니예요?”

“저 한국대 1학년이에요!”

“아….”

나이는 차은서가 더 많았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알바 중에도 한국대 1학년이 있는데.”

“걔랑도 친하게 지낼게요! 오늘 오나요?”

“걔는 바쁠 때만 부르는 애라서 오늘은 안 와요. 그런데 어차피 나한테 말해봐야 소용없어요. 알바를 뽑는 건 우리 삼촌이라서.”

윤아름이 눈을 깜빡거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제 집이 없어서 찜질방에서 살아야 해요. 근데 지갑이랑 핸드폰도 다 타버려서 찜질방 갈 돈도 없어요.”

“집에 불이 나면 화재 보험료 나오지 않나?”

윤아름이 진짜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 보험료가 어느 세월에 나오겠어요? 그거 나오기 전에 굶어 죽어요. 일단 일하게 해주세요. 네?”

그녀의 표정이 너무 간절하고 그녀의 몸짓이 너무 처량했다. 마치 추위에 떨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보였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연기하고 있습니다.

“어. 알아. 쟤 조금 전까지는 에너지가 넘쳤잖아.”

그녀의 연기가 차은서에게 통했다.

“알았어요. 좀 있다가 삼촌 나오시면 말해볼게요.”

“아싸아!”

***

사장 차동석은 간단한 면접만 보았다.

원래 야간 알바가 갑자기 그만둬서 당장 오늘 밤부터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없으면 차동석이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밖에서 하는 다른 일로 바쁘다.

게다가 윤아름의 처량한 연기는 사장 차동석에게도 통했다.

“어우. 이런 어려운 사정이 있는데도 안 뽑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지. 합격!”

***

나강인은 이튿날 낮에도 평소처럼 인터넷에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인터넷에서 현재가 2022년이 아니라는 주장을 다수 확인했습니다.

“설마.”

- 그중에서 신뢰할만한 것은 단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거봐. 2022년이라니까.”

- 하지만 2022년의 기술로는 제 존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치? 다국적기업의 대형 데이터센터 한 층을 통째로 AI로 만든 거라면 혹시 몰라도 신체삽입형은 지금 기술로는 무리지?”

AI 전지인은 신체삽입형 전투지원 인공지능이다.

-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쩌겠냐.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지금은 2022년인데.”

피시방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손님이 아니었다.

형사 박기정이 계산대로 걸어가 동네 마트 봉투를 위로 들었다.

사장 조카 차은서가 물었다.

“맡아드려요?”

“아. 그게 아니라요.”

박기정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그런 후에 몇 가지 소스와 향신료가 들어있는 봉투를 열어 보이며 물었다.

“이거 살 때 사용된 카드가 여기 것이던데요.”

차은서가 내용물을 보자마자 손뼉을 쳤다.

“어? 이거 그거다!”

“아시는군요? 이걸 누가 샀….”

“강인 오빠! 어제 불구경하다 잃어버린 양념을 경찰 아저씨가 가져오셨어요!”

박기정은 그 말을 듣고 실망했다.

‘이건 그냥 불구경하던 사람이 놓고 간 거였구나.’

차은서가 감탄했다.

“와. 우리나라 경찰 진짜 끝내주네요. 이런 것도 다 주인 찾아서 가져다주고.”

“어…. 그게 아니라….”

나강인이 피시방 구석에서 걸어와 봉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박기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뭘요. 이것도 다 경찰이 해야 할 일인데요.”

형사 박기정은 명함을 주고 돌아갔다. 나강인은 그 명함을 들고 구석진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AI 전지인이 그의 손을 빌려 인터넷을 검색했다.

- 박기정 경사.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진짜 형사입니다.

“그럼 가짜겠냐?”

형사 박기정은 화재 사건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래서 그곳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지인아. 그런 거 말고 어제 불난 건물이 어떻게 됐는지나 찾아봐.”

AI 전지인이 인터넷을 검색했다.

곧바로 관련 기사가 여럿 나왔다.

- 현장에서 사망자 1명이 발견됐습니다.

나강인이 인상을 썼다.

“거기서 우리가 놓친 사람이 있었나?”

그 원룸 건물은 좌우 복도식이 아니다. 한쪽에만 사람이 사는 구조다.

“화장실 같은 곳에 있었는데 못 본 건가?”

- 아닙니다. 어제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갈 때 지나간 방에서 발견됐습니다.

“그러면 창문을 통해 눈으로 직접 봤겠네. 그런데 못 봤다고? 난 못 볼 수 있지만 넌 못 볼 수가 없잖아.”

- 이동 경로상의 거주지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나 움직임, 생활소음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불이 그렇게 크게 났는데 멀쩡한 사람이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어. 술이라도 취해서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잠을 깊게 자고 있었나?”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어제 건물을 오를 때 지나간 방 내부 사진을 연달아 보여주었다.

- 침대 위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 침대 밑에 떨어져서 잤거나.”

눈앞에 떠 있는 AR 사진에 사각지대가 표시되었다.

- 약물에 취해 침대 밑 사각지대에 있었을 수는 있습니다.

나강인은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니면 그때 이미 사망해 있었거나.”

나강인이 의자를 옆으로 돌렸다.

“지인아. 너 혹시 적외선 투시 스킬 같은 거 있냐?”

- 저는 요원님의 눈을 통해 영상 정보를 수집합니다. 따라서 요원님이 본 것만 볼 수 있습니다.

“내 눈에 AR 렌즈가 끼워져 있다며.”

- AR 렌즈는 사용자에게 증강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이지 적외선 투시 장치가 아닙니다.

“혹시나 했다.”

그가 박기정 형사가 준 명함을 손가락에 끼워 흔들었다.

“어쨌든 살인사건일 수 있다는 거잖아. 이 형사를 다시 만나봐야겠어.”

- 요원님은 현재 확실한 신분을 확보한 상태이므로 형사와 만나도 안전합니다. 지역 경찰과 친해지면 향후 작전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 도움은 살인범 잡으면 딸려오는 덤 같은 거지.”

***

형사 박기정이 형사과에 있는 그의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했는데.”

옆자리 동료 형사가 물었다.

“왜? 건물 사이에서 외줄타기 한 사람 아니래?”

“응. 아니래. 불구경하다가 잃어버린 거더라고.”

“뭐 하는 사람인데?”

“용의자도 아닌데 그것까지 확인은 못 했지. 알바가 이름까지 아는 거 보니까 그 피시방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장기 고객이겠지.”

“백수?”

“분위기는 그랬는데…. 어?”

나강인이 형사과 사무실로 들어왔다. 박기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분실물 찾아드린 걸 가지고 뭘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하하하. 우린 음료수 같은 거 함부로 받으면 안 됩…. 빈손이시네요?”

“그래서 온 게 아니라서요.”

“아니시구나. 그럼 무슨 일로?”

“기사를 좀 찾아봤더니 불이 난 그 건물에서 사망자가 나왔더군요.”

박기정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아. 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사망자가 나온 게 제일 안타까웠다.

그 사건 때문에 박기정의 일이 늘어나고 휴가는 완전히 잘렸다. 그것도 속이 상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살인사건일 겁니다.”

“사망자가 나온 사건이니 그런 의심을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 저희도 그런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고 조사하고 있습니다.”

“무시하지 않는 정도로 대처할 일이 아닙니다. 이건 높은 확률로 살인사건입니다.”

박기정은 일반 시민이 사건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는 일을 자주 겪었다.

“그런 주장을 하실 때는 근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제가 그 방 창문을 지나서 올라갈 때, 방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불이 났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피해자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예. 창문을 지나서 올라…. 예?”

박기정은 당황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그가 나강인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어제 불난 건물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신 그분이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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