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용의자
형사 박기정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역시 그래서 그 마트 봉투가 거기 있었군요!”
나강인이 대답했다.
“그걸 들고 벽을 탈 수는 없어서요.”
“물론 그렇죠. 저도 그래서 그 봉투를 찾아드리면서 혹시나 했습니다. 아깐 그 이야기를 안 하셔서 아닌 줄 알았는데….”
“안 물어보셨잖습니까?”
“그, 그랬죠. 하하.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건물 벽을 맨손으로 올라가고 사람을 안고 건물 사이에서 외줄타기까지. 진짜 어떻게 한 겁니까? 인간문화재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아. 그렇죠.”
박기정이 수첩을 들었다.
“살인사건으로 의심하는 이유를 다시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불이 났는데도 그 방에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피해자가 이미 사망했거나 아니면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살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경찰이 확실한 것만 수사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박기정은 나강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이야기는, 누군가 살인을 감추기 위해 그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겁니까?”
“사망자가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그 생각부터 들더군요. 어제 분명히 생존자가 없는 걸 확인하면서 그 건물 외벽을 올라갔으니까요.”
살인을 숨기기 위해 방화까지 저질러 5층 건물이 불탔다면 대형 사건이다. 나강인이 없었다면 옥상에서 추가 피해자까지 나올 수 있었다.
박기정이 말했다.
“우리도 살인사건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박기정의 휴가가 완전히 잘렸다.
“국과수에 부검 의뢰도 했습니다.”
근처에 있던 같은 팀 형사들이 다가왔다. 2팀장이 박기정에게 물었다.
“국과수에서 연락 아직 안 왔지?”
“당연하죠. 부검 결과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불이 워낙 크게 나서 부검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올 수도 있다고 했고요.”
“화재 원인은?”
박기정의 동료 형사가 대답했다.
“조금 전에 소방 쪽에서 연락 왔는데, 전기 누전일 확률이 높답니다.”
“누전이라…. 그 건물 주변에 CCTV는?”
그 팀의 막내 형사가 보고했다.
“제가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그 근처에는 CCTV가 하나도 없습니다.”
2팀장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우리도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래서, 일단은 국과수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강인이 정보를 추가로 제공했다.
“어제 그 건물 쪽으로 걸어가다가, 그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네 명 봤습니다. 그중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박기정이 얼른 제안했다.
“아. 잘됐네요. 몽타주 작성 협조 부탁드립니다. 저희 몽타주 담당자가 지금 자리를 비워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나강인이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너 그림 좀 그리냐?”
- 신체 삽입형 전투지원 AI의 유무선 직접 입출력 금지는 프린터에도 적용됩니다. 대신에 정찰 임무 수행 후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그리는 스킬이 있습니다.
“볼펜으로도 그릴 수 있냐?”
- 물론입니다.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릴 수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박기정에게 제안했다.
“제가 직접 그리겠습니다.”
박기정이 물었다.
“어…. 그림 좀 그리시나 봅니다?”
“취미로 조금 그리는 정도죠.”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몽타주 작성 도구를 가져오겠습니다.”
나강인이 책상 위의 볼펜을 잡았다.
“이거면 됩니다. 종이 몇 장만 주시죠.”
“예? 아. 예. 여기.”
나강인이 책상 위에 하얀 A4 복사지를 올려놓았다.
AR 렌즈를 통해 눈앞에 어제 그 골목을 지나가다가 본 네 사람의 얼굴 사진이 나타났다. 그 반투명한 사진을 A4용지 위에 겹쳐놓으면 볼펜으로도 쉽게 따라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네가 그려. 종의 한 장에 아까 본 사람 하나씩.”
- 알겠습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을 빌려 그 자리에서 A4용지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특별한 기교는 없었다. 그냥 볼펜을 사람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형사들이 옆에서 보면서 감탄했다.
“와. 그림 진짜 잘 그린다.”
“그림이 아니라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아.”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라!”
“어? 어? 막 그리는 것 같은데 벌써 한 명을 다 그렸어!”
초상화 한 장이 바로 나왔다. 얼굴을 그리고 남은 빈자리에는 그때 입었던 옷을 간단히 그렸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때 그 골목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입니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죠.”
“통화 기록부터 조회하겠습니다.”
초상화 한 장을 그리는 데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로 지나친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사람은 걸어가다가 뒤를 한 번 돌아보더군요. 걷는 속도는 평범했지만, 눈이 좀 풀려 있었습니다.”
박기정이 감탄했다.
“와. 지금 눈앞에서 보고 설명하시는 것처럼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눈앞에서 보고 설명하는 중이다.
AI 전지인이 그때의 영상을 AR 렌즈를 통해 보여주었다. 지금 손은 AI 전지인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는 그때 영상을 보고 설명만 하면 됐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그때 상황을 떠올려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형사들이 쑥덕댔다.
“화가야?”
“그렇겠지?”
“내가 예전에 사건 수사에 화가의 도움을 받은 적 있어. 그런데 그때 그 화가는 저런 능력 없었는데?”
“천재인가?”
순식간에 네 장의 초상화가 나왔다.
나강인이 볼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화재가 발견되기 직전에 그 골목에서 큰 도로 쪽으로 나간 사람은 이 네 명밖에 없습니다. 만약 방화 살인자가 불을 지르고 도주하는 중이었다면, 이 네 명 중 있을 겁니다.”
막내 형사가 작게 말했다.
“와. 누가 형사인지 모르겠다.”
2팀장이 얼른 형사들에게 지시했다.
“이 사람들이 누군지 확인해. 이 넷 중에 그곳 주민이 아닌 사람부터 찾고, 그중에 피해자와 관계있는 사람이 있으면 집중적으로 조사해!”
“예!”
나강인이 할 일은 끝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 박기정이 말했다.
“물어볼 게 생기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번호 좀….”
나강인이 돌아간 후에 형사2팀장이 초상화 그림들을 보며 말했다.
“막내 말처럼 진짜 누가 형사인지 모르겠네. 야. 너희들은 어떻게 일반 시민보다도 못하냐? 안 쪽팔리냐?”
박기정이 투덜댔다.
“팀장님도 마찬가지면서….”
“너 지금 노냐?”
“합니다요. 해요.”
2팀장이 조금 큰 목소리로 지시했다.
“막내! 이 초상화 스캔해서 쫙 돌려!”
“예!”
***
나강인은 휴대폰 번호를 알려준 후에 피시방으로 돌아왔다.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차은서가 물었다.
“오빠. 오늘 저녁에도 요리 팔아요?”
팔지 말지는 나강인이 정한다. 여긴 피시방이 본업이지 본격적인 식당은 아니다. 특별 요리를 띄엄띄엄 팔아도 손님을 모으는 효과는 충분히 생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작전 예산이 부족합니다.
“팔자. 나도 돈 벌어야지.”
나강인은 이곳에서 요리사로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다. 시급은 시간당 2만 원이다. 저녁 두 시간이면 4만 원을 벌 수 있다.
그의 요리 실력에 비하면 시급은 짠 편이다.
대신에 그는 이곳 PC와 직원 휴게실 침대를 무료로 이용한다. 직접 만든 음식을 먹는 것도 공짜다. 여기 있으면 숙식이 모두 해결된다.
차은서가 얼른 피시방 주문 프로그램에 공지를 띄웠다. 오늘 저녁은 특별 요리를 판다는 공지였다.
알림 메시지를 듣고 공지를 확인한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오예!”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먹어야지!”
“난 두 번 먹을 거야!”
“애들 불러야겠다.”
***
저녁 요리도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두 시간짜리 요리사 근무가 끝난 후에 나강인도 식사를 했다.
차은서가 옆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진짜 맛있다. 내가 이거 먹으려고 퇴근도 안 하고 기다렸는데, 보람이 있어. 음음. 현명하다. 차은서.”
야간 알바인 윤아름도 동의했다.
“인정. 강인 오빠 밥은 진짜 맛있어요.”
대학생 해커 안성환은 바쁠 때만 나와서 일하는 예비 알바다. 그는 오늘은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찾아왔다.
“나도 오늘 형이 밥을 한다고 해서 왔잖아.”
차은서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어제 우리 동네에 불난 거 말이야. 방화였대. 범인 잡았대.”
아직 나강인이 경찰서에 갔다 온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음? 벌써?”
“응. 방금 범인을 긴급 체포했다는 기사가 떴어.”
윤아름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그러니까 그 화재가 사고가 아니었네? 방화범 때문에 내가 어제 죽을 뻔한 거네? 나쁜 새끼!”
안성환도 같이 흥분했다.
“와. 그런 나쁜 놈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다 처단해야 하는데. 은서 누나. 어떤 놈이래요?”
“나도 잡았다는 기사만 본 거라서 자세한 건 몰라.”
나강인이 요리할 때 치워놓았던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박기정 형사였다.
나강인이 박기정에게 도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하셨더군요.”
- 아. 나강인 씨. 덕분에 범인을 잡았다고 알려드리려고요.
“빨리 해결하셨네요.”
- 하하하. 다 나강인 씨 덕분이죠. 그려주신 초상화 네 장 중에 세 장은 그 동네 주민인데, 한 명은 아니더라고요. 그 한 명이 피해자와 아는 사이이고 전기 기술자입니다. 게다가 피해자와 친구 사이인데 돈을 빌렸더라고요. 그림이 딱 나오죠. 여기까지는 곧 공식 발표할 내용이라 말씀드려도 괜찮은데….
박기정이 망설이다가 한마디 보탰다.
- 이건 제 추측인데, 아마 목을 졸랐거나, 아니면 수면제라도 먹였을 겁니다. 시체가 불에 다 타버리면 증거도 사라질 줄 알았겠죠.
“그렇겠지요.”
- 그리고 그려주신 그 범인 초상화 말입니다. 공개해도 될까요?
나강인은 아직 그와 AI 전지인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른다. 공개적으로 활동해도 되는지 판단하려면 정보가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꼭꼭 숨어 살 필요는 없다.
“제가 그렸다는 말만 안 하시면 괜찮습니다.”
- 아…. 신분 공개는 거절하시는 거군요.
“예.”
- 표창장 추천해야 하는데요.
“하지 마시죠.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거 싫어합니다.
- 부담스러워서 상을 안 받는 분도 계시죠.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맙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차은서가 물었다.
“오빠. 뭘 그렸는데요? 혹시 그림이에요?”
“그냥 좀 끄적인 거야.”
차은서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되게 못 그렸나 보다. 어디 가서 오빠가 그렸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 보면.”
***
형사 박기정이 스마트폰으로 몽타주 사진을 보다가 다시 범인의 얼굴을 보았다.
“진짜 사진처럼 잘 그렸네. 똑같잖아.”
옆에서 동료 형사가 말했다.
“사진보다 더 잘 그렸지. 실물의 특징을 강조해서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더 사진처럼 보이니까.”
“몽타주 그려준 그 종이 어디 있지?”
“이미 수사 자료에 첨부했지.”
“나강인 씨가 나중에 유명 화가가 되면 그 몽타주도 가격이 오를 텐데 아쉽다. 한 장 더 그려달라고 할걸.”
막내 형사가 흥분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형님들. 그 방화 살인자 새끼 지갑에서 마약이 나왔습니다.”
박기정이 벌떡 일어났다.
“어? 마약이 확실해?”
“아직 국과수에 보내진 않았지만, 딱 봐도 히로뽕 같습니다.”
“그걸 지갑에 넣고 다녔다면, 중독자라는 건데….”
박기정이 손바닥을 쳤다.
“이제 그림이 그려지네. 마약 살 돈이 필요해서 빚을 졌겠지. 돈을 더 빌리러 갔다가 안 빌려주니까 살해한 거야. 그리고 그 돈으로 마약부터 샀겠지.”
동료 형사가 말했다.
“야. 이거 사건이 점점 더 커진다.”
박기정이 제안했다.
“마약반에 연락하자.”
“우리가 홀랑 다 먹는 게 아니고?”
“그러면 걔들 삐진다. 약을 판 놈까지 잡으려면 걔들 도움도 필요하고. 팀장님 어디 계셔?”
***
그날 밤에 경찰서장이 기자들을 불러놓고 방화 살인사건 수사 상황을 발표했다.
범인은 살인을 저지른 후 건물에 불을 질러 범죄를 감추려 했다. 그 결과 5층 건물이 완전히 불탔다. 살인사건의 증거도 화재 때문에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도 경찰은 범인을 이튿날 바로 체포했다. 수집된 정황은 모두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범인의 손톱 밑에서 피해자의 피부 조각이 발견됐다.
범인의 이름과 얼굴은 공개하지 않았다. 마약 이야기도 일부러 발표 내용에서 뺐다. 범인에게 마약을 판 놈이 눈치채고 도망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경찰의 발표는 공중파 방송국 뉴스에서 다뤘다.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그 기사가 올라갔다.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 와. 우리나라 경찰 클래스 쩌네.
- 범인을 빨리 잡았으니까 손톱 밑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거잖아.
- 맞아요. 며칠만 더 지났어도 저게 남아있겠냐고요.
- 그놈이 범인인 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