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4화 (14/411)

14. 촬영장

나강인은 이튿날 아침에 밥차 사장 김병호와 만났다.

김병호가 큰소리쳤다.

“새벽시장에 가서 나강인 씨가 어제 준 목록 그대로 샀어요. 빠진 거 없는지 확인해봐요.”

나강인이 밥차에 실린 식재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AI 전지인이 식재료를 분석한 후에 결과를 AR 렌즈에 띄웠다.

나강인이 말했다.

“다른 건 그럭저럭 기준선은 넘었는데, 당근이 신선도가 떨어지네요.”

“이야아. 역시 고수는 쓱 훑어보기만 해도 알아보는군요. 당근은 전에 쓰던 게 많이 남아서 안 샀는데, 가는 길에 마트에 들를까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야전에서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모두 식재료로 사용합니다. 보급 상황이 최악일 때는 오염된 식재료도 먹고 죽지 않을 정도로 정화해서 씁니다.

“먹고 탈 날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김병호는 오른손을 다쳤다. 그래서 밥차 운전은 나강인이 했다.

김병호가 조수석에서 감탄했다.

“운전 진짜 잘하네요. 내 차가 이렇게 부드러운 차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냥 조금 합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운전하고 있습니다.

김병호는 조수석에서 나강인이 심심하지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은 영화 촬영장에 가는 길이라 하는 이야기도 주로 이번 영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 영화가 말입니다. 편집 다 끝나고 상영관까지 다 잡아놓은 영화입니다. 개봉이 한 일주일 남았나? 그런데 갑자기 추가 촬영을 한다면서 밥차가 필요하다고 연락이 온 겁니다.”

“돌발상황이 생겼군요.”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 생겼죠. 어제 새벽에 경찰이 마약파티 현장을 덮쳤는데 이 영화의 중요 조연 배우가 거기 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는 거 아닙니까?”

나강인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혹시 방화 살인자 잡다가 덤으로 잡은 그 마약파티 말입니까?”

“맞아요. 뉴스에도 났죠? 방화 살인사건 일으킨 놈을 잡았다가 줄줄이 사탕으로 마약 중독자들까지 왕창 잡았다는 그거요.”

나강인이 그 방화 살인 용의자의 몽타주를 경찰에게 그려주었다.

김병호가 설명했다.

“그 배우는 마약파티 현장에서 체포됐잖아요? 이러면 영화사에서는 일단 영화를 개봉하고 나서 수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소리는 절대로 못 합니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요. 배우를 현장에서 잡았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미 찍어놓은 필름으로는 영화 개봉을 절대로 못 합니다. 어쩌겠어요? 그 약쟁이가 나오는 장면은 싹 다 잘라내야지.”

나강인은 왜 영화를 긴급히 다시 찍고 밥차도 급하게 부르는지 이해했다.

“그 영화는 재촬영 분량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나도 들은 이야긴데, 가위질로 그 배우 나오는 장면을 다 자르면 영화 완성도까지 날아간다더군요. 그래서 그 배우 나오는 장면들은 다 다시 찍기로 했답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그렇게 빨리 찍어도 영화가 제대로 나옵니까?”

“아무래도 원래보다는 못하겠죠?”

“개봉 연기라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김병호가 왼손 손가락을 흔들었다.

“지금 상황이 되게 특수하대요. 상영관을 대규모로 잡아놨는데 개봉 연기하면 상영관도 날아가고 영화사도 박살 납니다. 그렇게 된 세부 사정이야 나도 모르고요.”

“그래서 어제 영화 재촬영이 결정되고 오늘 바로 찍기 시작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내 밥차도 그래서 긴급 섭외된 겁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빵꾸 내면 완전히 찍히는 거였는데.”

김병호가 활짝 웃었다.

“어휴. 강인 씨가 도와줘서 살았습니다.”

“정 급하면 제가 아니라도 밥 대신해줄 다른 대타를 불렀겠죠.”

“그건 그렇지요.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엄청 해야 하지만요. 그리고 그렇게 해도 강인 씨 같은 실력자는 못 찾아요. 오늘 배우랑 스태프들에게 진짜 맛있는 밥을 먹여주고 눈도장 제대로 찍을 겁니다. 흐흐.”

나강인이 큰 도로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가며 물었다.

“오늘 일이 무료 봉사는 아닌 거 아시죠?”

“급한 불 꺼주러 오셨는데 당연히 오늘 일당 드려야죠.”

***

촬영은 강원도 세트장에서 이루어졌다.

나강인이 점심을 준비했다.

김병호는 식재료를 다듬고 나온 찌꺼기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여기 세트장을 지난번에 찍고 아직 철거를 안 했어요. 영화사인 THO 엔터와 손태민 감독을 하늘이 도운 겁니다.”

“손태민 감독이 영화는 잘 찍습니까?”

김병호가 왼손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당연하죠. 우리나라 로맨스 영화 쪽에서는 이거 안에 들어가는 흥행 감독인데.”

***

감독 손태민이 오전 촬영 결과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감독은 손태민과 가까운 사이다.

촬영감독이 물었다.

“마음에 안 들지?”

손태민이 짜증을 냈다.

“들겠냐? 원본보다 한참 못하잖아!”

“그럼 다시 찍을까?”

손태민이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아까 것도 이런 것도 다 오케이 할 수밖에 없다고. 후우. 이러다 정말 영화 망할지도 모르겠다.”

“개봉 날짜 못 맞추면 그땐 그냥 쫄딱 망하잖아.”

“망하지. 나도 망하고 영화사도 엿을 아주 제대로 먹지. 그래서 제때 스크린에 올려서 제작비라도 건지려고 이 난리가 난 거잖아.”

촬영감독이 아쉬워했다.

“우리 영화가 겨우 제작비 정도가 목표인 영화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영화 정말 잘 나왔는데.”

감독 손태민이 욕을 버럭 했다.

“이게 다 그 마약쟁이 새끼 때문이야! 그 새끼 내 손에 걸리면 죽여버린다!”

촬영감독이 손태민의 팔을 툭 쳤다.

“밥이나 먹으면서 좀 쉬자. 스태프도 다들 지쳤어. 아침부터 강행군했잖아.”

“밥?”

손태민은 입맛은 없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오후에도 일해야 하니까 뭘 좀 먹긴 해야겠다. 오늘 점심 메뉴 뭐래?”

옆에서 눈치만 보던 조감독이 얼른 대답했다.

“밥차 아저씨가 특별히 셰프를 초빙해왔다고 큰소리치던데요? 그니까 맛있는 거 만들어주겠죠.”

손태민이 짜증을 냈다.

“내가 지금 뭘 먹든 맛있겠냐?”

“밥차 아저씨가 진짜 맛있을 거라던데….”

“왜? 마약이라도 타준대? 그 새끼만 체포되니까 서운하대? 우리 다 같이 은팔찌 차볼까?”

“아니, 그게 아니라요.”

손태민이 코웃음 쳤다.

“셰프는 무슨. 당연히 밥차 아저씨가 너한테 뻥 친 거야. 밥차 하루 밥값 얼마나 받는다고 셰프를 초빙해?”

***

감독 손태민은 점심밥을 먹으면서 당황했다.

“이게 왜 맛있지? 나 입맛 없었는데?”

조감독이 옆에서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말했다.

“그쵸? 셰프 데려왔다더니 진짜인가 봐요. 음식에 약도 안 탄 것 같고요.”

손태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전문 요리사에 좋은 재료까지 쓰면 밥차 해서 남는 게 있나? 적자 날 텐데?”

“그러게요.”

촬영감독이 말했다.

“밥차 아저씨가 우리 힘내라고 한턱내나 보다.”

감독만 음식이 맛있다고 느낀 게 아니다. 스태프는 물론이고 평소에 맛있는 걸 자주 먹는 배우들도 감탄했다.

“맛있다.”

“여기가 맛집이네.”

“이러고 있으니까 강원도 경치 좋은 곳에 있는 맛집에 놀러 온 것 같다.”

옆에서 밥을 먹던 스태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놀러 왔다는 생각이 어떻게 드냐? 새벽부터 와서 일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그건 그렇지? 그래도 밥이라도 맛있으니까 좀 낫잖아.”

“하긴. 마약쟁이 한 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밥까지 맛이 없었으면 진짜 힘들었을 거야.”

***

이 영화는 개봉 직전에 재촬영에 들어갔다. 당연히 촬영 일정은 굉장히 빡빡해서 식후 휴식시간조차 없었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식사를 서둘러 마쳤다. 곧바로 오후 촬영이 시작됐다.

나강인은 밥차 뒷정리를 한 후에 근처에서 김병호와 함께 영화를 찍는 모습을 구경했다.

김병호가 말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롭나 봐요. 손태민 감독님이 원래 저렇게 배우나 스태프한테 화내는 사람이 아닌데, 계속 소리를 지르잖아요. 얼마나 답답하면 저럴까.”

“저렇게 서두르면 사고 나기 쉬운데요.”

“에이. 설마 그럴….”

AI 전지인이 갑자기 경고했다.

- 사고 발생 위험이 높아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AI 전지인이 경고를 다 말하기도 전에 배우 한 명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데 넘어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감독 손태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왜 그래? 다쳤어? 아니지? 제발 멀쩡하다고 해줘!”

“으아악! 내 발목!”

근처에 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재빨리 달려가 부상자의 상태를 살폈다.

배우 신은하가 소리를 질렀다.

“악! 감독님! 이 배우님 발목이 돌아갔어요!”

손태민은 그 소리를 듣고 뛰는 걸 멈췄다. 눈앞이 캄캄해서 더 뛸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당장 주저앉고 싶었다.

“마, 망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현장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감독은 현장 책임자다.

“일단 119에 전화해!”

“여기 산속인데요? 구급차가 오려면….”

“일단 전화하고, 응급조치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서 어떻게 좀 해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야! 조감독! 누구 없어?”

조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감독님. 지금 다친 그 배우가 응급조치를 할 줄 압니다.”

“어?”

“다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

“젠장!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 사람 이대로 둘 순 없잖아!”

손태민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누구 뭐든 할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김병호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강인 씨가 할 수 있지 않아요? 내 손이 심하게 삔 것도 강인 씨가 금방 치료해 줬잖아요.”

그 말을 들은 몇 사람이 나강인을 휙 돌아보았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부상자가 발목을 심하게 삐긴 했지만, 발이 돌아갔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닙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발이 돌아갔다고 해서 진짜인 줄 알았네요. 심하게 삐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닌데.”

- 야전 응급 치료술을 사용해 발목을 고정하면 통증을 줄이고 회복 기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앞으로 나섰다.

“응급조치만 해줄 테니까, 바로 병원에 보내세요.”

감독 손태민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할 테니까 일단 어떻게 좀 해줘요! 이 친구 계속 비명 지르잖아요!”

“압박붕대는 있지요?”

스태프 중 한 명이 구급함을 들고 달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나강인이 배우의 발 관절을 제대로 돌려놓고 압박붕대를 감았다. 그러면서 적당한 마사지로 고통을 감소시켰다.

부상자의 비명이 작아졌다. 아직도 아프지만 그나마 참을 수 있을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감독 손태민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

“후우.”

그렇지만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 다른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손태민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혹시 이 친구가 촬영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나강인은 방금 어떤 장면을 찍다가 이 사고가 터졌는지 봐서 안다.

“당분간은 걷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촬영은 무리죠.”

손태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망했다.”

조감독이 물었다.

“다른 액션 대역배우를 부를까요?”

손태민이 화를 벌컥 냈다.

“언제 김유찬이랑 인상이랑 체형까지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언제 강원도 깊은 여기까지 데려와! 손은 언제 맞춰보고! 젠장! 개봉 날짜 못 맞추면 우린 다 망하는데!”

“그럼 스태프 중에서 누가 대타로 뛰게 할까요? 얼굴에 마스크랑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나면 이 장면은 어떻게 될 거 같은데요.”

발을 다친 사람은 무술 대역을 맡은 배우다. 그는 주연 배우 김유찬과 비슷한 외모로 분장한 상태였다.

손태민이 잠깐 멈칫한 후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라도 하자! 어차피 분장 다시 할 시간은 없어. 정체를 숨기려고 얼굴을 가리고 등장한 거로 대본을 수정하자!”

이 영화는 감독인 손태민이 시나리오를 썼다. 대본은 그가 고치면 된다.

손태민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구 대신할 사람?”

이미 무술 대역배우가 연기하다 다쳤다. 그 역할을 대신하려면 몸을 잘 써야 한다. 의욕만 앞세워서 나섰다가 또 다치면 감독에게 완전히 찍힌다.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스태프 중에 주연 배우 김유찬과 체형이 비슷한 사람이 세 명 있었다.

손태민이 그 세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유단자 없어? 아니면 기계체조 같은 거 했다든지.”

세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셋 다 몸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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