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카메라 액션 II
나강인은 액션 대역이라 굳이 대사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신은하에게 다가가는 부분부터는 어차피 주연인 김유찬이 다시 찍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적 역할을 하는 배우 셋을 쓰러뜨렸는데도 촬영이 끝나지 않았다. 대본의 어느 부분에서 끝내라는 말도 사전에 듣지 못했다.
감독 손태민은 지금 연기하는 사람이 무술 대역배우라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간에 끊을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눈앞에 대본을 띄워주었다. 나강인은 그걸 보고 신은하 쪽으로 걸어가 대본 속 대사를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정작 신은하는 겁을 먹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감독 손태민은 신은하가 헛소리하는 걸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손바닥을 펴고 손을 앞으로 뻗으며 힘차게 외쳤다.
“컷!”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은 숨죽인 채로 촬영 현장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컷’ 소리가 나자마자 웅성거렸다.
“뭐, 뭐야. 진짜 사람을 막 팬 거야?”
“죽은 거 아니지?”
“마약 사건 다음은 단체 병원행인 거야?”
손태민도 걱정은 조금 들었다.
“아…. 내가 지금 영화 찍는 데 눈이 멀어서 무리한 건가? 중단시켰어야 했나? 안 다쳤겠지? 한 명이라도 심하게 다쳤으면 이 영상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데….”
쓰러졌던 배우 세 명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나 살았구나.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나 이런 거 처음 해봤어.”
“전 진짜 무서웠다고요.”
손태민이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조감독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나 데려와서 대역으로 쓰자고 한 건 조감독이다.
조감독이 나강인을 향해 뛰어가며 화를 벌컥 냈다.
“밥차 아저씨! 사람을 진짜로 패면 어떻게 합니까!”
나강인이 말했다.
“팬 거 아닌데.”
“목격자가 이렇게 많은데 아니긴요! 지금 사람을 패대기치고, 집어 던지고, 막 무릎으로 올려쳤잖아요! 그러면 맞은 사람은!”
조감독이 쓰러졌다가 일어선 배우 세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멀쩡하시잖아요! 어? 네?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진짜 왜 멀쩡하세요?”
세 명의 배우 중에서 제일 먼저 던져진 사람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전 저기부터 여기까지 던져졌는데 왜 별로 안 아프죠?”
나강인이 설명했다.
“옆으로 미끄러진 거리만 멉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높이는 낮습니다. 그냥 쭉 미끄러진 겁니다.”
“아. 그래서 내 옷에 먼지가 이렇게 많이….”
공중으로 크게 던져진 데다가 발로 걷어차이기까지 한 배우가 물었다.
“저는요? 저는 진짜 크게 패대기쳐진 것 같은데 왜 별로 안 아프죠?”
“떨어지기 직전에 발로 받아서 옆으로 슬쩍 밀었습니다. 발로 받을 때 낙하 속도를 좀 줄였죠. 그러니까 그건.”
나강인이 손짓으로 설명했다.
“동작만 컸지 실제로는 겨우 2미터쯤, 그것도 활강 스키처럼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떨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손태민이 달려와 세 번째 배우에게 물었다.
“넌 무릎에 맞아서 위로 몸이 막 떴잖아. 안 다쳤어?”
“저요? 찬 게 아니라 무릎으로 그냥 쭉 밀던데요? 떨어질 때도 잡아주시고요.”
손태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도 이제 왜 부상자가 없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난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촬영을 끊지 않고 계속한 거야!”
조감독이 물었다.
“감독님. 진짜로 다 아시고….”
손태민이 얼른 촬영감독에게 외쳤다.
“방금 찍은 거 다시 돌려봐. 제대로 확인하게!”
촬영감독이 세트장 레일 위에 얹혀 있던 카메라를 바깥으로 가져왔다.
감독이 쓰는 모니터에 영상이 떴다.
손태민은 나강인이 첫 번째 배우의 멱살을 잡아 던져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감탄했다.
“이야아. 역시 제대로 찍혔어. 멱살을 잡을 때의 이 정밀한 손동작 묘사. 잡은 후에 갑자기 집어 던질 때의 이 속도감. 이거 스크린에 걸면 느낌 장난 아닐 거다.”
그 장면을 연기한 배우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멱살 잡힐 때 제 표정도 눈에 확 들어오게 찍혔는데요?”
촬영감독이 말했다.
“그걸 다 계산하고 움직인 거지. 두 번째 영상도 어마어마해. 난 여길 찍을 때는 진짜 소리를 지를 뻔했으니까.”
모니터에 나강인이 두 번째 배우를 붙잡고 카메라 동선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공중에 띄우고 바닥에 패대기치는 장면이 재생됐다.
손태민은 그 영상을 보고 살짝 당황했다.
“어? 이건 마치….”
“카메라 여러 대를 반원형으로 배치해서 찍은 후에 필요한 부분만 잘라 합성한 것 같지?”
“진짜 그러네. 게다가 그러면서도 모든 액션이 전부 제대로 찍혔네?”
“배우들이 카메라의 이동방향과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싸울 때, 상대를 공중에 띄울 때, 바닥에 패대기칠 때의 각도가 매번 조금씩 달라. 그래서 그래.”
스태프 중 한 명이 촬영감독을 향해 엄지를 세우며 말했다.
“역시 촬영감독님. 카메라 한 대로 이런 영상을 뽑으시다니요. 대박입니다.”
촬영감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넌 이게 내가 잘 찍어서 이렇게 나온 거 같냐? 아니잖아. 이건 배우가 카메라 위치를 계산해서 움직인 거야.”
“예?”
“카메라는 그냥 따라가기만 했어. 세 번째 격투 영상도 봐봐.”
세 번째 영상이 모니터에 떴다.
촬영감독이 영상을 보는 손태민에게 물었다.
“알겠지?”
손태민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감탄했다.
“세 번이나 보니까 확실하네. 이건 어떤 각도로 주먹을 피해야 그 동작이 카메라에 정확히 찍힐지 알고 연기한 거야.”
“맞아. 이 장면 하나만 보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에서 두 번이나 같은 방식으로 연기했잖아. 이건 우연이 아니야. 의도한 거야.”
“화면 조금만 앞으로 돌려봐. 상대 배우의 겁먹은 표정도 꽤 괜찮게 나왔어.”
촬영감독이 말했다.
“그러네. 가만. 이 얼굴은 2번 카메라에 더 잘 찍혔겠는데?”
“그래? 2번 카메라도 좀 보자!”
2번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모니터에 떴다. 상대 배우의 잔뜩 겁먹은 표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배우가 영상을 보며 자랑했다.
“제 연기력이 이 정도입니다. 하하하.”
손태민이 한마디 했다.
“넌 그냥 겁먹은 거 아냐?”
“겁먹은 것조차 연기로 승화했잖습니까? 하, 하하.”
촬영감독은 배경 위주로 찍은 3번 카메라의 영상도 확인한 후에 엄지와 검지를 턱에 대며 말했다.
“이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 세 대의 위치를 다 계산해서 연기했다는 건데….”
조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그게 가능한 겁니까?”
“되긴 되는데, 이 정도까지 디테일한 계산을 세 번 연속으로 하는 사람은 사실 나도 오늘 처음 봤다.”
주연배우 김유찬은 다른 부분에 감탄했다.
“이야아. 타격감도 진짜 장난 아닌데요? 실제로 사람을 패는 것보다 더 진짜 같아요.”
조감독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그래서 전 진짜 사람을 팬 줄 알고 놀라서 달려갔던 겁니다. 여기서 그런 오해 한 사람 저 말고도 많잖아요?”
감독 손태민이 활짝 웃었다.
“리허설 한 번 안 해보고, 동선을 미리 짠 것도 아닌데, 한 방에 이런 대박 영상이 나오다니. 으하하하.”
촬영감독이 영상을 보면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계산하고 움직인 거지? 그것도 상대 배우까지 끌고 다니면서. 유찬 씨는 알겠어?”
주연배우 김유찬이 대답했다.
“당연히 전혀 모르겠는데요.”
신은하와 나강인은 세트장 안쪽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의 위치가 바뀌면 나중에 영상을 편집할 때 어색해진다.
신은하가 나강인을 슬쩍 보며 물었다.
“방금 씬이 진짜 그렇게 잘 나왔어요?”
“나중에 보고 직접 평가하시죠.”
“하긴. 우리 둘 다 모니터를 못 봤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이따가 보여달라고 할 테니까 같이 봐요.”
나강인은 AR 렌즈를 통해 예상 영상을 이미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 훈련 교본 촬영 모드를 종료합니다.
나강인이 세트장 밖에 있는 감독 손태민에게 물었다.
“감독님. 제 역할은 끝난 겁니까?”
손태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런 거 두 번 찍으면 내 심장이 못 버팁니다. 사고 날까 무서워서. 그리고 말입니다.”
손태민이 나강인을 향해 엄지를 세웠다.
“진짜, 진짜 감탄했습니다. 와. 우리 영화는 로맨스 영화인데, 이 싸우는 씬 하나는 진짜 어떤 액션영화도 부럽지 않게 나왔어요.”
“잘 나왔다니 다행이네요.”
나강인이 신은하를 구출하는 장면은 손태민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찍혔다. 한 번에 촬영을 끝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절약됐다.
그렇다고 일정에 여유가 생긴 건 아니다. 아까 사고가 났을 때 시간을 많이 까먹었기 때문에 촬영 일정은 여전히 촉박했다.
손태민이 외쳤다.
“시간 없으니까 바로 다음 씬 갑시다. 김유찬 씨!”
“준비됐습니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신은하와 나강인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나강인이 빠지고 김유찬이 그가 있던 자리에 서서 마스크를 슬쩍 내리며 ‘구하러 왔다’고 대사를 말해야 한다. 거기부터 다시 찍기로 했다.
김유찬이 나강인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방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신 거 보고 진짜 감동했습니다. 소속이 어디이십니까?”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지구 연합 전략 특수군입니다.
나강인도 말했다.
“밥차요.”
“예?”
나강인은 피시방 이야기도 하려다가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싸한 느낌을 받았다.
“음?”
AI 전지인이 빠른 음성으로 경고했다.
- 구조물의 이상 소음을 감지했습니다!
나강인도 그 소음을 들었다. 소리는 위쪽에서 났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 전투 모드로 전환합니다.
음성은 시각보다 정보 전달 속도가 느리다. AR 렌즈에 반투명한 문자와 다양한 색깔로 구성된 상황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세트장 위쪽 구조물 일부에 붉은 경고 기호가 나타났다. 파손 위험 경고였다.
그 구조물이 부서지면 파편이 어떤 각도로 날아올지 예측한 경로가 선으로 표시됐다. 그중에 빨간색 선 하나가 김유찬을 향했다.
나강인이 즉시 김유찬의 멱살을 잡았다.
“컥?”
목이 졸린 김유찬이 눈으로 왜 이러는지 물었다.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김유찬을 옆으로 확 집어 던졌다.
김유찬은 충격방지용 스펀지 매트를 향해 날아가면서 외쳤다.
“으악! 날 왜!”
나강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파이프를 발로 툭 찼다. 소품으로 쓰려던 쇠파이프였다.
쇠파이프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신은하를 향해 성큼 걸어가며 팔을 쭉 뻗어 파이프를 잡았다.
신은하는 나강인이 김유찬을 집어 던지고 쇠파이프를 든 채로 다가오는 걸 보고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살려준다면서!”
나강인이 신은하의 앞에서 쇠파이프를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그녀가 아니다.
그녀를 향해 세트장 철제 조명이 떨어졌다.
나강인의 쇠파이프가 낙하하는 철제 조명을 정확히 때렸다. 쇠로 만든 조명 케이스가 따앙 소리와 함께 와락 찌그러져 옆으로 날아갔다.
조명 내부의 전구와 유리는 그 충격으로 모조리 박살 났다.
그 파편이 화려한 빛을 뿌리며 흩뿌려졌다. 마치 축제에서 쓰는 불꽃이 지상에서 터진 것 같았다.
신은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저, 저게 혹시 저한테 떨어….”
나강인이 그녀의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그녀가 서 있는 장소를 향해 떨어지는 낙하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 번째 조명도 신은하를 향해 추락했다. 나강인이 그 철제 조명을 쇠파이프로 쳐냈다. 조명의 철판이 구겨지고 내부에서 쏟아진 파편이 다시 빛과 함께 흩뿌려졌다.
그런 철제 조명이 하나 더 떨어졌다. 이번 조명은 신은하의 위치에 정확히 떨어진 건 아니지만, 잘못하면 다칠 수 있는 위치였다.
나강인이 신은하의 앞쪽으로 다시 이동해 그 조명도 쇠파이프로 쳐서 날려버렸다.
신은하는 세 번이나 이어지는 화려한 불꽃을 멍하니 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곳에는 철제 조명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촬영 세트장의 상부 구조물 일부가 부서져서 떨어지고 있었다.
추락하는 구조물 중에는 주연배우 김유찬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구조물이 십여 개나 떨어진 후에 붕괴가 멈췄다. 세트장이 조용해졌다.
신은하는 너무 놀라 다리가 조금 풀렸다.
“우, 우리 산 거죠? 안 죽었죠?”
“일단은.”
그녀는 비틀거리면서도 나강인을 향해 인사했다.
“고맙….”
AI 전지인이 빠른 목소리로 경고했다.
- 추가 붕괴 위험이 있습니다! 민간인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AI 전지인이 제일 위험한 곳부터 AR 렌즈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들이 서 있는 지점부터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나강인이 왼팔로 신은하의 허리를 덥석 안았다.
“꺅?”
나강인이 다리가 풀린 그녀를 한쪽 팔로 껴안고 세트장 밖으로 걸어갔다. 걷는 속도가 빨랐다.
신은하가 반쯤 질질 끌려가며 말했다.
“저기요. 이제 안전한 것 같은데 이러실 필요는 없….”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갑자기 철근과 조명이 우르르 떨어졌다.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의 낙하물이 신은하가 있던 곳을 덮쳤다.
신은하는 여전히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란 걸 깨달았다. 겁이 덜컥 났다. 그녀가 얼른 나강인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으며 찰싹 달라붙었다. 두 다리도 부지런히 놀렸다.
나강인이 신은하를 데리고 세트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뒤쪽에서 세트장 상부 구조물이 계속 떨어지다가, 그들이 그곳을 빠져나오자마자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뒤쪽에서 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