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시나리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로 그 모습을 보았다.
감독 손태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다, 다친 사람 없지? 신은하 씨! 괜찮아? 제발 괜찮다고 해줘!”
신은하가 나강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로 대답했다.
“네? 네! 전 다치진 않았어요. 근데 괜찮은지는 저도 몰라요. 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나강인이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손은 그만 놓으시죠.”
“네? 아. 제 손이….”
나강인은 이미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신은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나강인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그, 그게요. 겁이 나니까 손이 안 떨어져서 그래요. 와. 근데 복근이 진짜 엄청 단단….”
“이제 안전합니다만?”
“알아요. 안다고요. 아! 고맙습니다!”
그녀가 손을 풀고 꾸벅 인사했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나강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와. 난 갑자기 날 던져버리길래 나한테 원한이라도 있나 했습니다. 하하하.”
“오늘 처음 봤는데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난 대충 던져버렸으면서 은하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보호했습니까? 그래도 내가 주연배우인데 나도 좀 신경 써주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김유찬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아. 그렇죠. 저 상황에서 동시에 두 명을 지키긴 어려웠죠. 그래서 은하를 그렇게 잘 지켜주려고 난 집어 던진…. 와.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서러운 기분이….”
감독 손태민은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방금 세트장에서 못 빠져나오고 저기 깔렸으면?’
신은하가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추가 촬영을 급하게 하다 세트장 부실 사고로 배우가 사망하면, 안 그래도 조연 배우의 마약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 영화는 다 찍어도 엎어진다. 현장 책임자인 감독은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
손태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오늘 나 포함해서 여러 사람 인생이 끝장날 뻔했구나.”
옆에서 조감독이 물었다.
“감독님. 저 세트장은 어떻게 할까요? 수리할까요?”
“미쳤어? 저걸 왜 수리해?”
“하지만 저기서 찍어야 할 장면이 좀 남았는데요? 그리고 저 씬 빼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하셨잖아요. 우린 CG로 처리할 시간도 없고요.”
“저 세트를 급하게 수리해서 찍다가 사고가 또 터지면? 그땐 우린 다 끝장이야.”
조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밥차 아저씨가 배우 세 명이랑 싸운 액션 그거 진짜 멋있었는데, 그걸 빼면 너무 아쉬워서 그러죠.”
손태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그걸 왜 빼?”
“네?”
“당연히 살려야지!”
“세트장이 무너져서 뒷부분을 찍을 수가 없는데요?”
“다행히 대사는 쳤잖아. 그걸 마지막 장면으로 하고 장면 전환해야지.”
조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무슨 대사가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 구하러 왔다.
- 저, 저는 살려주는 거죠?
“예? 그건 나강인 씨가 말한 건데요?”
“그 대사만 김유찬 씨 목소리로 덮어씌우면 돼. 나머지는 그대로 쓰고.”
“신은하 씨는 대사가 틀렸는데요?”
“대본을 그 대사에 맞게 고쳐 써야지. 그 뒤의 씬도 다 고칠 거야.”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감독인 손태민이 직접 썼다. 그가 고치고 싶으면 고치면 된다.
“대본은 어떤 방향으로 수정하시려고요?”
손태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문제야. 잘 수정해서 다음 장면을 자연스럽게 처리해야 하는데….”
촬영감독이 다가와 말했다.
“손 감독. 카메라 아직 돌아가고 있어.”
“응? 어? 뭐? 왜?”
“촬영 후기 영상용으로 쓰려고 김유찬이 교대하려고 들어갈 때부터 쭉 찍었지. 당연히 세트장 밖에서. 좋은 거 찍혔을 것 같은데, 볼래?”
“당연하지!”
감독과 조감독, 촬영감독이 모니터 앞에 모여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에서 나강인이 김유찬을 세트장 바깥으로 던지는 장면이 나왔다.
손태민이 말했다.
“저건 못 써. 한 화면에 주인공 두 명이 동시에 존재할 순 없잖아.”
곧바로 나강인이 쇠파이프로 위에서 떨어지는 철재 조명을 쳐내며 신은하를 보호하는 모습이 나왔다. 불꽃놀이 폭죽처럼 부서지며 날아가는 조명이 마치 특수효과처럼 보였다.
그런 후에 나강인이 왼팔로 신은하의 허리를 안고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그녀도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들이 세트장을 다 빠져나오기도 전에 붕괴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이 세트장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세트장 상부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뒤에서 먼지가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감독 손태민이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걸 내가 찍었다고?”
촬영감독이 말했다.
“내가 찍었지.”
조감독도 한마디 보탰다.
“이럴 줄 모르고 찍으신 거죠.”
“지금 그게 중요해?”
“아뇨.”
촬영감독이 말했다.
“이거 영화에 쓸 수 있으면 진짜 좋겠다. 이대로 날려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장면이야.”
손태민의 눈이 번뜩였다.
“쓰면 되지. 아니지. 꼭 써야지.”
“응?”
“세트장 없이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을 연결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한 방에 해결됐잖아.”
손태민의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실시간으로 수정됐다.
“남자가 납치된 여자를 구출했어. 그런데 납치를 지시한 놈이 함정을 하나 더 파놨지. 부하들까지 다 묻어서 증거를 완벽하게 없애려고 한 거야.”
“어? 그러니까 저 장소가 무너진 게 처음부터 적의 계획이었다?”
“맞아. 그리고 주인공은 그 함정을 여자와 함께 돌파해. 함정은 두 사람이 빠져나온 직후에 무너져. 그러면 저 세트장이 화면에 다시 나올 필요 없지.”
“그렇게 수정하려면 기존에 찍어놓은 씬 중에 몇 개는 날려야 하는데?”
손태민이 흥분했다.
“지금 그게 문제야? 이 장면을 살릴 수 있는데?”
촬영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이건 꼭 살리고 싶어.”
손태민이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계속 떠올랐다. 그가 수첩에 볼펜으로 수정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휘갈기며 말했다.
“어떻게 영화 내용을 바꾸면 될지 알겠어! 이러면 약쟁이 그 새끼 나왔던 장면을 다 다시 찍을 필요가 없어! 왕창 날려버리고 액션을 추가하는 거야! 그러면 약쟁이 때문에 생긴 구멍은 다 메꿀 수 있어!”
손태민이 볼펜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이건 땜빵이 아니야! 더 멋진 작품이 나올 거야!”
촬영감독이 물었다.
“그걸 다 찍을 시간이 없지 않아?”
신나게 추가 줄거리를 휘갈기던 손태민의 손이 멈췄다. 손태민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 한 달만 찍을 시간이 있으면….”
“한 달이나 늦어지면 상영관 잡아놓은 거 다 날아가고 우린 쫄딱 망하겠지. 우리 영화는 상황이 복잡해서 상영 연기가 불가능하잖아.”
손태민이 수첩에 적던 줄거리를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무 아까운데….”
“킵해뒀다가 나중에 다른 영화에 써. 속편 같은 거.”
“속편? 그, 그럴까?”
“지금은 일주일 안에 추가 촬영과 추가 편집까지 끝내야 해. 안 그러면 다 망해.”
손태민이 수첩을 덮었다.
“어, 어쩔 수 없지. 이건 속편에서 써먹…. 으. 아깝다.”
조감독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감독님.”
“왜? 너도 좋은 아이디어 떠오른 거 있어? 있으면 다 말해.”
“그게 아니라요. 이 사고 촬영분을 진짜 쓸 수 있는 거 맞아요?”
“써야지. 이걸 써야 세트장이 무너진 문제가 해결되고 영화도 더 멋지게 살아.”
“이건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진짜 사고 장면인데요?”
“어? 어….”
손태민도 뒤늦게 문제를 깨달았다.
“쓰면… 문제가 되겠지?”
“욕 많이 먹을 걸요?”
손태민이 잠깐 고민하다가 책임을 남에게 떠넘겼다.
“마케팅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THO 엔터가 그 정도 능력은 있잖아?”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죠. 진짜 사고가 터진 건데.”
“다친 사람은 없잖아? THO 엔터에서 변호사 써서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을까?”
“진짜 밀어붙이시게요?”
감독 손태민이 결심을 굳혔다.
“그래야지. 이걸 어떻게 포기해?”
“그런데 그게 감독님이랑 제작사만 오케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왜?”
“나강인 씨는요? 이 촬영분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사고를 찍은 건데, 만약 나강인 씨가 쓰지 말라고 하면요?”
“헉!”
손태민이 모니터 앞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나, 나강인 씨!”
그는 즉시 나강인을 찾았다. 나강인은 신은하와 같이 있었다.
손태민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나강인 씨!”
나강인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 그…. 방금 그 사고 말입니다.”
손태민이 일단 머리부터 숙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신은하도, 김유찬도, 그리고 저도.”
AI 전지인이 말했다.
- 민간인 구조는 지구 연합군의 기본 임무입니다. 지구 연합과 자연로보틱스는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저기….”
손태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트장이 무너질 때 신은하 씨를 구출해서 나오는 장면 말입니다. 저희가 그걸 찍었는데, 영화에 써도 되겠습니까?”
“음…. 제 모습이 영화에 나오면….”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촬영 당시에 요원님이 보여준 신체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자 다급해진 손태민이 말했다.
“당연히 출연료도 더 드리겠습니다! 앤딩 스크롤에 이름도 올려드리고요! 그리고 또….”
“쓰세요.”
“네? 아, 네! 고맙습니다. 하하. 나강인 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손태민은 신이 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강인의 옆에서 신은하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어머. 잘됐다. 저랑 찍은 게 우리 배우님 첫 출연작이 되는 거네요?”
“전 배우가 아닙니다만?”
“네?”
“그냥 잠깐 아르바이트한 겁니다.”
“아니, 무슨 아르바이트를 이렇게 화끈하게 해요?”
“대충할 걸 그랬나요?”
신은하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 아뇨! 아니죠! 대충 하셨으면 전 죽었어요.”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밥차 쪽으로 돌아섰다.
신은하의 눈에 나강인의 등이 보였다. 옷이 찢어져 있었다.
“어? 옷이….”
그녀는 나강인이 그녀를 데리고 나오다가 뭔가에 등을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그녀는 다친 곳이 없다.
“나강인 씨. 등에 상처가….”
나강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옷만 살짝 찢어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상처는 없었다. 파편은 촬영용 소품으로 받은 옷에 스치기만 했다.
신은하가 찢어진 옷을 멍하니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나강인이 밥차를 향해 걸어가며 왼손을 들어 슬쩍 흔들었다.
신은하는 나강인이 밥차로 돌아가는 걸 보다가 감독 손태민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감독님! 감독님! 밥차 내일도 오는 거죠?”
“와야지! 당연히 와야지! 안 오면 내일부터 촬영은….”
이곳 촬영을 오늘이면 끝난다.
“어? 우리 내일부터는 서울에서 찍는데?”
“네?”
“산에서 찍는 씬은 오늘 여기서 다 끝내고, 내일부터는 서울에서 다 해결해야지. 그럼 밥차는….”
부를 필요가 없다.
신은하는 초조해졌다.
“그럼 안 되는데…. 밥차 와야 하는데….”
손태민도 당황했다.
“맞아. 그럼 안 되지. 서울에서 찍을 때도 밥차 부를까?”
조감독이 옆에서 말했다.
“저기. 감독님. 나강인 씨는 밥차 아저씨가 손을 삐어서 오늘 하루만 초빙한 분이라던데요? 그러니까 내일 밥차를 또 불러봤자 나강인 씨는 안 올 걸요?”
“아. 맞다. 오늘 특별 초빙 셰프라고 했지.”
신은하가 물었다.
“그럼 저분은 원래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일하신대요?”
조감독이 대답했다.
“피시방에서 일한다던데요?”
“네?”
“좀 전에 밥차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나강인 씨는 서울에 있는 피시방에서 밥을 판대요. 거기가 원래 우리 밥차 아저씨가 단골로 이용하는 곳인데, 어제 그 아저씨가 손을 다쳐서 오늘 하루만 나강인 씨를 특별히 모셔왔대요.”
신은하는 나강인이 떨어지는 철제 조명을 쇠파이프로 쳐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저런 실력으로 왜 피시방에서 밥을 팔아요?”
“그건 저도 잘….”
손태민이 말했다.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나강인은 세 명의 배우와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 세 대의 위치까지 고려하면서 완벽한 액션 연기를 펼쳤다.
세트장이 무너질 때도 마치 특수효과를 쏟아부은 것 같은 영상을 찍으며 빠져나왔다.
심지어 처음 것은 동선도 짜지 않고 즉석에서 연기한 것이고, 세트장이 무너진 건 돌발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카메라에 찍힌 영상은 완벽했다.
손태민이 조감독에게 물었다.
“그 좋은 실력으로 왜 피시방에서 밥을 팔아?”
“그러니까 그건 저도 잘….”
손태민이 수정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적던 수첩을 보았다.
이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다른 배우를 통해 찍으려면, 무술 대역배우도 많이 필요하고 사전 준비도 많이 해야 한다. 거기다 CG도 발라야 한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럴 시간이 없다.
“가만. 이거….”
손태민의 머릿속에 대책이 떠올랐다.
“나강인 씨가 도와주면 잘하면 일주일 안에 다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은하가 얼른 맞장구쳤다.
“그쵸? 저분이 계속 나와서 하죠? 그러니까 우리 영화의 추가장면을 저분이랑 찍…. 어? 잠깐만요.”
그녀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깨달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감독님. 우린 액션영화 아니지 않아요? 우리 영화는 로맨스코미디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