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8화 (18/411)

18. 시나리오 II

손태민 감독이 물었다.

“지금 장르가 중요해?”

신은하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뇨. 전 장르 가리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손태민이 수정 시나리오의 줄거리가 적힌 수첩을 흔들어 보였다.

“흐흐. 그 약쟁이가 나온 장면을 왕창 날려버리고 액션으로 대체하면 우리 앞에 쌓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어. 심지어 촬영 기간까지 싹 다!”

이 영화가 개봉도 못 하고 사라지면 조감독은 입봉은커녕 경력에 스크래치만 생긴다.

조감독이 흥분해서 물었다.

“감독님. 당장 무술감독부터 섭외할까요?”

“넌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냐? 좀 전에 나강인 씨가 실시간으로 동선 계산하면서 끝내주는 액션 보여주는 거 봤지?”

“봤죠.”

“그때 촬영 진짜 순식간에 끝났지?”

“실시간으로 끝났죠.”

“우리에게 제일 모자란 게 뭐다? 시간. 그걸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다? 나강인 말고 있냐?”

조감독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없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하죠. 나강인 씨는 배우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요.”

“배우 하는데 자격증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게 뭐 어때서?”

“얼굴은 어쩌실 건데요?”

“마스크와 선글라스 적극적으로 활용할 거야. 나강인 씨는 그걸 쓰고 액션 연기를 해야지. 그리고 액션이 끝나면 김유찬이 들어가서 마스크를 벗는 장면부터 찍는 거지.”

“싸우는 중간중간에 액션이 없는 곳은 김유찬 씨가 마스크나 선글라스를 벗는 씬을 따로 찍어서 끼워 넣고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와. 감독님. 천재이십니다. 그림 진짜 잘 나오겠네요.”

“나 천재인 거 이제 알았냐?”

조감독이 토를 달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강인 씨는 우리 배우가 아니라 밥차 아저씨란 것만 빼면 완벽한 계획이십니다.”

손태민이 고개를 좌우로 꺾어 뚝뚝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그 문제를 내가 지금 해결하러 간다.”

손태민이 밥차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나강인 씨! 나랑 이야기 좀 하시죠!”

나강인이 손태민을 돌아보았다.

“할 이야기가 남아있습니까?”

“예.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손태민이 나강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우리 영화 좀 살려주십쇼.”

***

손태민은 이 영화가 처한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나강인은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강원도 산속인 이곳은 정보를 얻을 게 별로 없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곳의 지형은 제 데이터와 다른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정보 가치가 낮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저는 서울에서 할 일이 있는데 여기로 계속 오는 건 좀….”

손태민이 얼른 말했다.

“서울! 마침 잘됐습니다! 우리도 내일부터 모든 추가 영상을 서울에서 찍을 겁니다!”

“아. 그래요?”

서울은 대중교통이 잘 발달한 도시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다가 촬영 시간에만 들러서 찍고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출연료는 진짜 확실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제작사가 지금 돈을 아낄 상황이 아니거든요. 제가 멱살을 잡아서라도 출연료 화끈하게 받아내겠습니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우리는 더 많은 활동자금이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손태민에게 단서를 달았다.

“저도 하는 일이 있어서 종일 촬영장에 있지는 못합니다.”

손태민의 표정이 확 펴졌다.

“필요한 장면을 찍을 때만 오시면 됩니다. 기왕이면 아까처럼 NG 없이 한 방에요.”

“알겠습니다. 일정을 알려주시면 촬영장에 찾아가겠습니다.

손태민이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시나리오 수정은 오늘 밤을 꼴딱 새워서라도 끝내놓겠습니다.”

“그럼 지금은….”

“나머지 장면 빨리 찍어야죠. 여기 촬영은 오늘 안에 다 끝내야 하니까요. 하하하.”

***

촬영장이 더 바쁘게 돌아갔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강원도 야외 추가 촬영을 마쳐야 한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기존 시나리오에서 여러 부분이 날아가면서 여기서 찍을 것이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추가 촬영으로 바쁘지만 정작 나강인은 할 일이 없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는 무너진 세트장으로 걸어갔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던 먼지는 이미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그가 세트장 바닥에 쌓여 있는 잔해를 보며 말했다.

“멀쩡해 보이던 곳이 갑자기 완전히 무너졌어. 그것도 하필 영화 촬영 도중에. 하필 배우가 서 있는 곳부터. 수상하지?”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기존에 수집된 정보와 현재 시각 정보를 종합해 현장을 분석하겠습니다.

AR 렌즈가 정보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잔해 주변에 반투명한 설명문이 하나씩 떴다. 정보가 추가되는 곳이 점점 늘어나고 허공을 채우는 글씨도 많아졌다.

눈앞에 백여 개의 정보가 주르륵 나타났다가, 갑자기 그 많은 정보 문구가 몇 개만 남기고 싹 사라졌다.

부서진 철제 구조물 위에 굵은 폰트로 강조된 글씨가 떠 있었다.

[붕괴하기 전에 인위적인 손상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있음.]

그런 글씨는 철제 조명 연결부위와 끊어진 케이블에도 있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어떤 놈이 이 세트장 시설에 미리 손을 댔다는 거냐?”

- 사전에 붕괴를 목적으로 조작했을 확률은 약 37%입니다.

“37%라. 그런 확률은 뭘 근거로 계산하는 거냐?”

- 자연로보틱스가 개발한 전투 후 현장 분석 시스템을 사용했습니다.

“네가 알아서 잘 분석했으니까 따지지 말라고?”

- 아닙니다.

“어쨌든 네 말은.”

그가 잔해들을 직접 살폈다.

“어떤 놈이 미리 손댔을 확률보다 단순 사고일 확률이 두 배나 높단 거잖아.”

그가 사람들을 쓱 둘러보았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추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37%는 저 바쁜 사람들에게 경고하긴 좀 애매한 수치인데….”

촬영장에서 대기 중이던 신은하가 나강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신은하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강인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저 아가씨가 서 있던 위치는 대본만 보고도 예측할 수 있어.”

- 철제 조명 다수가 신은하가 서 있던 곳을 향해 떨어졌습니다.

“누군가 배우들을 노리고 세트장에 미리 수작을 부렸다면, 저 아가씨를 노린 것 같은데 말이야.”

세트장 붕괴 사고로 다친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사고 수사를 위해 이곳이 통제되고 오늘 촬영이 중단되면 이 영화는 망한다.

“아니면 이 영화 자체를 노렸나? 이 영화가 엎어지게 하려고?”

37%는 높은 확률은 아니다. 그 수치를 그대로 믿는다 해도 단순 사고였을 확률이 여전히 두 배나 높다.

“오늘 촬영이 끝난 후에 감독님에게 이야기하자. 만약 여기가 전쟁터라면 37%의 확률을 무시할 수 없지만, 여기는 지금….”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전쟁터? 나 혹시 전쟁터에서 싸운 경험이 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오후 촬영은 바쁘게 진행됐다.

무너진 세트장에서 찍어야 하는 추가 액션은 모두 취소되었다.

대신에 몇 가지 추가장면이 생겼다.

그중 하나는 남자 주인공 김유찬이 신은하와 무너진 잔해 앞에서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손태민 감독이 배우들에게 말했다.

“오늘 찍을 건 일단 쪽대본을 만들었어. 아예 새로 썼으니까 빨리 외워.”

주연 배우 김유찬이 쪽대본과 감독의 수첩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감독님. 그걸 일주일 안에 다 찍으시게요?”

“그 약쟁이 나오는 씬을 날린 대신에 전에 편집할 때 날려버린 씬들을 도로 꺼내오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아. 그때 버린 걸 이렇게 써먹네. 흐흐.”

“서울에 가서 찍어야 할 액션도 되게 많은데요?”

“그러니까 나강인 씨가 도와줘야지. 오늘 한 것처럼만 해주면 액션은 빨리 찍을 수 있어.”

“그 수첩에 적힌 대로 새로 찍으면 은하의 비중도 늘어나는 거 아닌가요? 은하는 주연급 조연이 되겠는데요?”

“역시 김유찬. 줄거리만 쓱 보고도 눈치챘구나? 액션씬을 늘리니까 자연스럽게 은하의 비중도 늘더라고.”

신은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앗! 감독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대로 되려면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게 하나 있어.”

“알아요. 강인 오빠가 많이 도와줘야 하는 거죠?”

김유찬이 툴툴댔다.

“넌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오빠 소리가 참 잘도 나온다. 나한테는 처음에 그렇게 거리를 두더니. 차별하냐?”

“네!”

“응?”

“저 오빠는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어떻게 똑같아요?”

***

오후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추가 촬영을 하던 배우나 스태프들은 오전에는 쫓기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여유롭게 바뀌었다.

스태프들이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말했다.

“뭔가 잘 진행되는 것 같지?”

“감독님도 쪽대본을 실시간으로 쭉쭉 뽑아낸다. 느낌 제대로 받으셨나 봐.”

“잘하면 이 영화, 되겠는데?”

***

촬영 현장에 외부 차량이 여러 대 도착했다.

제작사나 배급사 등에서 직원을 파견해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그중에는 영화 제작사 THO 엔터의 실무 과장이 타고 온 차도 있었다.

THO 엔터는 영화만 만드는 곳이 아니다. 문화 사업 전반에 걸쳐 이름이 꽤 알려져 있다. 주력 분야는 영화지만 공연을 포함한 다양한 행사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상당수의 영화사는 영화를 만들 때 투자자를 통해 제작비를 확보한다. THO 엔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면 영화가 성공했을 때 수익을 나눠야 하지만 대신에 망했을 때 손해가 줄어든다.

그런데 이 영화 ‘햇살 좋은 날’은 달랐다.

THO 엔터는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직접 투자했다. 사장 이태호는 이 영화의 성공을 확신했다. 상영관도 회사의 역량을 총동원해 대규모로 잡아놓았다.

이제 영화 개봉일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여러 장면에 나오는 중요 조연 배우가 바로 어제 새벽에 마약파티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 소식이 THO 엔터에도 알려졌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사장과 감독이 참여한 긴급회의가 열렸지만 어차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재촬영은 어제 오후에 결정됐다.

THO 엔터 김 과장이 손태민에게 사정했다.

“감독님. 살려주십쇼. 이 영화 원래 버전으로 극장에 올리면 욕은 욕대로 먹고 영화도 망하고 우리 회사도 휘청거립니다. 그렇다고 상영일을 연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회사가 진짜 무리해서 상영관을 잡아놨는데 그걸 빵꾸 내면 뒷감당이 아무도 못 합니다!”

손태민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김 과장과 똑같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굉장히 밝았다.

“김 과장님. 나만 믿어요. 내가 모든 문제를 싹 다 해결할 테니까.”

“아니, 큰소리만 치지 마시고요. 어떻게 하실지 말해주셔야 저도 위에 보고하죠.”

손태민이 선언했다.

“영화의 장르를 바꿀 겁니다. 오늘부터 ‘햇살 좋은 날’은 로맨스코미디 앤드 액션영화입니다.”

김 과장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감독님! 미쳤어요? 추가 촬영하고 편집할 시간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요! 지금 장르를 어떻게 바꿉니까!”

“어허! 흥분하지 마시고. 지금은 영화 찍어야 하니까 시간이 없고, 내가 이따가 저녁밥 먹을 때 뭘 좀 보여드릴게. 그걸 보면 다 이해가 될 겁….”

현장으로 독일제 고급 승용차가 거칠게 들어왔다.

손태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야? 배우 올 사람 더 있었어? 무슨 운전을 저렇게 해? 먼지가 여기까지 날아오잖아!”

차에서 40대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THO 엔터 김 과장이 달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장님!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현장을 보며 말했다.

“촬영 현장에 부담을 주면 안 되니까 나는 여기 안 오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의 시선이 무너진 세트장에 고정됐다. 이태호가 인상을 쓰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현장에서 세트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터졌는데 어떻게 안 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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