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9화 (19/411)

19. 과자 아저씨

THO 엔터 김 과장이 설명했다.

“아. 그게 말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다가 실수를….”

사장 이태호가 김 과장의 말을 끊었다.

“현장에서 문제가 안 생기게 관리하는 게 김 과장님 부서의 일일 텐데요?”

“예. 그게, 평소라면 저희 직원이 나와보곤 하는데요. 오늘 촬영은 아시다시피 그 약쟁이 놈 때문에 갑자기 하는 거라 다들 바빠서….”

이태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싸늘해졌다.

“그 약쟁이 탓만 하면서 우리 영화 망하게 둘 겁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

승용차 문이 열리며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내렸다.

“아빠? 화내?”

이태호가 뒤로 휙 돌아섰다.

“어? 아니. 화낸 거 아니야. 여기가 소음이 많아서 조금 큰 소리로 말한 거야.”

손태민 감독은 김 과장이 구박받을 때는 뒤쪽으로 슬쩍 피해 있었다. 김 과장이 화살 소나기를 맞는 동안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구원군이 나타났다.

손태민이 얼른 앞으로 나오며 여자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지야. 안녕?”

이민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민지도 추가 촬영 있는데 올 수 있지? 오늘 말고 모레쯤에.”

“당연하죠. 저도 약쟁이 삼촌이랑 같이 찍은 씬이 있잖아요.”

“약쟁…. 어. 그래. 너도 다 아는구나. 이태호 사장님. 민지가 다 아네요? 다 말씀하셨구나. 하, 하하.”

“제가 말해준 거 아닙니다.”

이태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을 저보다 잘 씁니다. 직접 검색하기도 하고, 친구들이 톡으로 기사를 보내주기도 하더군요.”

이태호가 손태민에게 딸과 함께 이곳을 찾아온 이유도 설명했다.

“오늘 우리 딸 화보 촬영장에 갔다가 세트장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같이 왔는데….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듣죠. 그동안 우리 딸은….”

아역 배우 이민지는 이미 현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반가워했다.

특히 신은하가 두 팔을 쭉 내밀며 환영했다.

“민지야! 언니 보니까 반갑지?”

“이모.”

“언니라니까.”

이태호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손태민을 향해 돌아서며 표정을 굳혔다.

“감독님.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영화, 일주일 안에 재촬영부터 편집까지 다 끝낼 수 있는 겁니까?”

손태민이 큰소리쳤다.

“물론입니다.”

“세트장이 무너졌는데요?”

“그래서 더 잘 됐습니다.”

“네?”

손태민은 세트장이 무너질 때 나강인이 어떻게 배우들을 구출했는지와, 그때 얼마나 멋진 영상이 찍혔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이태호는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당연히 과장이 심하게 섞였다고 생각했다.

이태호가 말했다.

“예. 그렇다 치고요. 그래서 그게 왜 잘된 겁니까?”

손태민이 수첩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태호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물었다.

“그러면 영화가 잘 나올까요?”

손태민이 장담했다.

“원래보다 더 잘 나올 겁니다.”

이태호의 이마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설명을 들어도 제일 중요한 문제가 계속 걸렸다.

“새로 찍을 액션씬이 꽤 되는 것 같은데, 우린 시간이 없습니다만?”

“나강인 씨가 액션씬만 맡아주면 일주일 안에 다 찍을 수 있습니다. 이미 도와준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손태민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나강인 씨 출연료는 넉넉히 챙겨줘야 합니다만….”

영화사 사장 이태호는 스태프의 이름을 모두 외우진 못했다.

“우리가 지금 무술감독 출연료를 아낄 상황은 아니죠. 어쨌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거군요.”

“물론입니다.”

이태호는 마음이 좀 놓였다. 손태민은 충무로에서 알아주는 실력파 영화감독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태호가 웃으며 인사했다.

“손 감독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영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저만 믿으십시오.”

“그런데 그 무술감독의 경력은 어떻게 됩니까?”

“예?”

“손 감독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경력이 대단하겠지요? 그런데도 제가 처음 듣는 분인 걸 보면 해외파이신가? 혹시 할리우드? 급히 섭외하셨나 본데 잘하셨습니다.”

“어, 그게….”

“지금 어디 계십니까?”

손태민이 옆쪽을 가리켰다.

“저기 밥차에….”

이태호가 밥차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나강인과 그의 딸 이민지만 있었다.

나강인은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밥차 아저씨밖에 안 보입니다만?”

“그러니까 저 밥차 아저씨가 나강인 씨입니다.”

이태호는 당황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예? 무술감독이 왜 밥차에서 밥을 합니까?”

“그야 당연히 나강인 씨가 저 밥차를 몰고 왔으니까….”

이태호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밥차 아저씨에게 무술감독을 맡겼다는 겁니까?”

“김유찬의 액션 대역도 맡겼습니다. 김유찬하고 체형이 비슷해서 진짜 다행….”

이태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손태민 감독님.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아니, 화내지 말고 일단 들어보시라니까요. 나강인 씨가 진짜 무술 실력이 장난 아닙니다.”

이태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

“세상에 무술 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우리 회사 보안팀 직원들도 다 유단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직원들이 무술감독을 합니까? 액션 배우를 해요? 아예 태릉에서 국가대표 선수를 데려와서 찍지 그러십니까?”

THO 엔터 사장 이태호는 화가 났다.

‘이 급한 상황에서 아마추어를 데려다 놓고 예산을 빼먹을 궁리를 해? 어차피 망할 영화니까 미리 몇 푼이라도 챙기겠다는 건가? 손 감독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밥차 아저씨가 사실은 대단한 무술감독이라는 말보다는, 손태민이 망하는 영화에서 돈을 빼먹으려고 수작을 부린다는 추측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게다가 이태호는 예전에 다른 감독이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그렇다고 증거도 없이 손태민 감독을 몰아붙일 수는 없다. 다른 견제 수단을 써야 한다.

‘허튼수작 부리지 못하게 압박을 해야겠어.’

이태호가 김 과장을 불렀다.

“오늘부터 모든 촬영 비용을 서류로 정리해서 제출하세요.”

“예? 그건 이미 하고 있….”

“10원짜리 하나 틀리지 않게 철저히 작성해서 제출하세요. 증빙서류도 다 받아내고, 사실이 맞는지 직접 다 확인하세요.”

손태민 감독은 이태호가 그를 의심한다는 걸 깨달았다. 슬슬 손태민도 화가 났다.

“아니, 이 사장님. 지금 날 어떻게 보고….”

“결과로 보겠습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

아역 배우 이민지는 밥차 앞 테이블에 앉아서 간식을 먹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이거 뭐예요?”

“잡탕 과자.”

잡탕 과자는 AI 전지인의 야전 전술 레시피로 만든 간식이다. 재료는 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쓰는데, 오늘은 남는 식재료가 많았다.

“되게 많이 만들었네요? 싸주시게요? 안 되는데. 엄마가 집에서는 과자 많이 못 먹게 하는데.”

야전 전술 요리 스킬은 대량 조리를 기본으로 한다.

“너만 입이 아니잖아? 배우와 스태프들이 바쁘게 뛰느라 배가 다 꺼졌을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먹으라고 넉넉히 만들었다.”

이민지가 잡탕 과자를 먹으며 자랑했다.

“제 촬영은 이틀 뒤에 있을 거래요. 제가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거든요.”

“응? 네가 주인공이야?”

“아역이지만요. 아역이라도 같은 배역이면 주인공 맞잖아요.”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맞지. 같은 이름으로 나오니까.”

“그럼 이틀 뒤에도 이 잡탕 과자 또 만들어주실 거죠?”

“내일부터는 서울에서 찍어서 밥차는 필요 없다던데?”

초등학생 이민지는 당황했다.

“웅. 그러면 안 되는데. 나 이거 또 먹고 싶은데. 이거 싸가서 아빠 차에 숨겨둘까?”

숨겨둘 방법을 궁리하는 이민지를 보며 나강인이 제안했다.

“나중에 내가 일하는 피시방 근처에 올 일 있으면 들러라. 그땐 스페셜 잡탕 과자를 만들어줄 테니까.”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과자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싫으면 말고.”

이민지가 방긋 웃었다.

“아저씨는 아는 사람이니까 괜찮아요.”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하고. 내가 거기 없을 때가 많거든.”

이민지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연락하게 번호 찍어주세요.”

나강인이 휴대폰 번호를 찍어주었다. 이민지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강인의 스마트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민지가 활짝 웃었다.

“연락처에 과자 아저씨라고 써놔야지.”

***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강원도 야외 세트장에서 찍어야 할 장면이 아직 남아있었다. 손태민은 이태호에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촬영에 들어가면서 조감독을 불렀다.

“아까 세트장 무너질 때 찍은 거, 이 사장님 보여드려.”

“어디까지요?”

“나강인 씨가 나오는 거 전부. 이 사장님.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하시죠. 저는 촬영이 급해서.”

이태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시죠.”

손태민이 배우들과 함께 촬영을 시작했다.

이태호는 촬영장 바깥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봅시다. 뭘 어떻게 찍었다는 건지.”

조감독이 노트북을 가져와 아까 찍은 장면을 보여주었다.

먼저 세트장이 무너지기 전에 나강인이 세 명의 적을 물리치고 여배우를 구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태호는 그 영상의 첫 장면부터 표정이 변했다.

“어….”

나강인이 적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을 볼 때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니, 언제 저런 동선을 다 짜서 저런 걸….”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역시 손 감독이 실력 하나는 확실하군요. 이런 수준의 영상을 현장에서 바로 만들어내다니요.”

조감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그거 감독님이 동선을 짠 게 아니라요. 나강인 씨가 카메라 위치를 고려해서 알아서 움직인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강인 씨는 밥차 아저씨라면서요.”

“밥차 아저씨 맞죠. 맞는데요. 이때 카메라는 그냥 옆으로 쭉 움직인 게 다입니다. 이건 배우가 카메라에 입체적으로 찍히는 각도를 다 계산해서 움직인 거라니까요.”

“허….”

이태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거를 눈으로 봤는데 안 믿을 수가 없다.

“이래서 손 감독이 그렇게 큰소리를…. 흠흠. 나강인 씨 실력이 대단한 건 알겠군요. 이런 분이 왜 밥차를….”

“어? 사장님. 보셔야 할 영상이 하나 더 있는데요?”

“아. 그래요?”

이태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세트장이 무너지는 영상이 나왔다. 그곳에서 나강인은 떨어지는 세트장 상부 구조물을 쇠파이프로 쳐내며 신은하를 구출했다.

그 영상을 본 이태호가 입을 떡 벌렸다.

“어? 어? 이거 CG를 도대체 언제 입힌 겁니까?”

“CG 아닌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우린 지금 CG 작업은커녕 그냥 찍을 시간도 부족한데요.”

이태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 영상. 다시 좀 봅시다. 이번에는 느린 속도로.”

조감독이 영상을 처음부터 느린 속도로 재생했다.

이태호가 그 영상을 보며 감탄했다.

“아니, 이게 진짜 한 번에 쭉 찍은 거라고요? 미리 연습도 없이? 그럼 처음부터 조명장치가 떨어질 위치를 계산해서 세트장을 설계….”

“세트장은 진짜 무너진 건데요?”

“아. 그렇죠. 세트장이 무너졌다고 해서 내가 오늘 달려온 건데. 그러니까 이게 진짜 사고 영상이고, 구출 장면도 실제 상황이고….”

“그렇죠.”

이태호가 손태민과 밥차를 번갈아 보며 탄식했다.

“허…. 이러면…. 내가 조금 전에 손 감독님께 크게 실수한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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