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마지막 발신번호
손태민 감독은 해가 떠 있을 때 찍어야 하는 영상들을 열심히 촬영했다. 이태호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군소리 없이 기다렸다.
손태민이 방금 찍은 영상을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걸 그냥 오케이 해야 하는 지금 상황이 너무 싫다. 몇 번 더 찍으면 좋은 그림이 나올 텐데 말이야.”
촬영감독이 말했다.
“그래도 다들 전에 찍었던 거라서 연기를 어느 정도는 맞춰 하잖아.”
“그 정도도 못했으면 우리 영화 진짜 엎어져야지. 하여간 아까 찍은 액션씬 말고는 아쉽지 않은 씬이 없어.”
손태민이 촬영을 마치고 THO 엔터 사장 이태호 쪽으로 돌아왔다.
이태호가 먼저 사과했다.
“손 감독님. 미안합니다. 감독님이 왜 그렇게 나강인 씨만 있으면 된다고 장담했는지 영상을 보니 알겠더군요.”
손태민이 씩 웃었다.
“그 영상을 보고도 이해를 못 한다면 이 사장님이 똥고집 부리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흐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영화밥 먹는 사람인데 그걸 보면 이해 못 할 수가 없죠.”
손태민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사장님이 해결해주셔야 하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이태호도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다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눈치챘다.
“실제 사고 현장 영상을 영화에 쓰는 것 말입니까?”
“바로 알아보시네요. 우리 영화가 성공하려면 그 영상을 꼭 써야 하는데, 그러면 상당히 시끄러워질 겁니다.”
“당연히 여러 문제가 생기겠지만.”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큰소리쳤다.
“그런 이슈도 다 영화 홍보에 이용해야지요. 우리 회사 홍보팀, 실력 좋습니다.”
잠깐 싸했던 촬영장 분위기가 굉장히 밝아졌다.
***
나강인은 잡탕 과자를 스태프들에게 돌렸다.
개개인에게 직접 돌린 건 아니고 스태프 몇 명에게 한 봉지씩 나눠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 이건 뭔데 이렇게 맛있습니까?”
나강인이 대답했다.
“이것저것 섞어서 대충 만든 겁니다.”
“대충 만든 맛이 아닌데요?”
“다른 분들과 나눠 드시죠.”
“네? 아, 나눠…줘야 하겠죠?”
나강인이 조감독에게도 잡탕 과자가 담긴 봉투를 주며 물었다.
“현장 분위기가 좋아졌네요?”
“영화사 사장님이 우리 감독님 계획에 완전히 동의했거든요. 근데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나요?”
나강인이 종이봉투에 잡탕 과자를 꽉꽉 채워 이태호에게 가져갔다. 과자를 다른 봉투보다 많이 담은 건 이태호가 사장이라서가 아니다.
이태호의 딸인 아역 배우 이민지가 잡탕 과자를 좋아했다. 이민지는 이 과자를 이태호의 차에 숨겨두고 엄마 몰래 먹을 궁리까지 했다.
과자 보관장소로는 자동차보다 이태호의 사무실이 더 좋다. 그래서 그는 잡탕 과자가 가득 든 봉투를 이태호에게 가져갔다.
이태호도 나강인을 찾아가려던 참이다. 그는 나강인이 다가오자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이야아. 나강인 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까 세트장에서 사장님을 구해준 기억은 없습니다만?”
“우리 영화를 살려주셨잖습니까? 하하하.”
나강인이 봉투를 내밀었다.
“방금 만든 겁니다.”
이태호가 종이봉투를 받았다. 봉투 자체는 붕어빵 봉투로 흔히 쓰는 것이다. 그런데 안에 가득 든 것은 처음 보는 과자였다.
“이게 뭡니까?”
“건빵 비슷한 겁니다.”
건빵과는 조금 다르게 생기긴 했지만 크기와 기본 형태는 비슷했다.
이태호가 생각했다.
‘난 건빵 안 좋아하는데.’
그는 군 복무 시절에는 건빵을 먹었다. 그런데 그건 이미 20년이 넘은 옛날이야기다. 게다가 건빵을 보면 옛날에 군대에서 고생한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제대하고 나서는 건빵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걸 안 먹을 수는 없다. 이 영화가 예정된 날짜에 극장에 걸리려면 나강인이 액션씬 촬영을 도와줘야 한다.
“하하하. 맛있겠습니다.”
이태호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잡탕 과자를 딱 하나 꺼냈다.
‘냄새는 좋네.’
그가 그걸 입에 집어넣고 씹었다.
맛있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맛있잖아! 아니, 이게 왜 맛있… 을 줄 알았습니다. 하, 하하.”
이태호가 당황하며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과자에서 짭짜름하면서도 감칠맛이 났다. 부침개 맛도 살짝 나지만 그렇다고 기름에 절인 맛은 아니었다.
“와. 이거 진짜 맛이…. 우리 딸이 이런 거 진짜 좋아하는데.”
나강인이 말했다.
“안 그래도 이미 먹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건 민지 몫까지 넉넉히 담은 겁니다.”
“아. 그렇군요. 하하. 그 녀석이 인사는 제대로 했나 모르겠네요.”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딸이 어디 있지?”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도 고개를 돌려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어디 있지?”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이민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런데 나강인과 같은 것을 봤다고 해서 똑같은 수준의 정보만 얻는 건 아니다.
나강인이 본 것을 AI 전지인이 영상으로 만들어 분석하면, 수많은 사람 속에서 특정 인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영상을 분석해도 이민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 건물이나 사물에 가려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곳을 벗어났을 수 있습니다. 또는 위기 상황….
나강인의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강인이 발신자를 확인했다.
발신자 이름은 ‘인싸 초딩 이민지’였다.
나강인은 마음을 놓았다.
“아. 민지 전화네요.”
이태호는 살짝 당황했다.
“우리 딸의 휴대폰 번호를 어떻게 아십니까?”
나강인이 수신 모드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후에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민지가 잡탕 과자를 나중에 또 받으려고 제 휴대폰 번호를 알아갔습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잠깐 나다가 전화가 끊겼다.
AI 전지인이 즉시 보고했다.
- 통화 종료 직전에 스마트폰이 파괴되는 소리를 포착했습니다.
나강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태호가 물었다.
“전화가 끊어져서 그러십니까? 뭘 그런 일로 표정을 그렇게 싸늘하게….”
나강인이 뒤로 돌아 세트장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민지가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려서 부서졌을 가능성은?”
- 낮습니다. 소음의 형태가 다릅니다.
“정보를 더 찾아내.”
- 통화 연결 직후에 들린 소리를 분석했습니다. 인체가 사물과 접속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소리를 찾았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분석해.”
- 분석 정확도가 낮음을 고려해서 판단해 주십시오. 외피로 둘러싸인 푹신한 물체에서 빠져나오는 공기, 철판이 덧대어진 플라스틱을 누르는 소리, 밀폐된 공간 속 반사음….
여기는 강원도 산속 공터에 만들어진 세트장이다. 이곳에는 집이 없다.
나강인이 짧게 말했다.
“자동차 내부다.”
나강인이 즉시 임시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태호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고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딸 전화를 받더니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집니까?”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가 보였다. 배우와 스태프, 영화 관련 회사 사람들이 타고 온 차 여러 대가 그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납치사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납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확인해야 한다.
***
이민지는 갑자기 납치됐다.
납치될 때는 입이 막혀 소리를 지르진 못했지만, 승합차에 끌려 들어간 후에 발버둥 치다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거는 데 성공했다.
그 전화는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인 나강인에게 연결됐다.
그런데 그때는 입을 틀어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은 납치범이 빼앗아 박살 냈다.
앞자리에 앉은 두목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야. 들킨 건 아니지?”
이민지의 입을 틀어막은 부하가 대답했다.
“바로 부숴버렸으니까 그냥 통화가 끊긴 줄 알 겁니다.”
“이 새끼가! 그걸 부수면 어떻게 하냐! 저쪽에서 도로 걸었다가 연결이 안 되면 의심하잖아!”
“급하게 빼앗다 보니까 그만….”
“씨발. 애새끼가 누구한테 걸었는데?”
“부수기 전에 봤는데, 화면에 과자 아저씨라고 뜨던데요?”
“제과점이나 빵집에 전화를 건 거야?”
“그런가 보죠.”
두목이 마음을 조금 놓았다.
“그럼 그쪽에서 다시 전화 걸었는데 연락이 안 되면 그냥 휴대폰이 꺼진 줄 알겠네?”
“당연히 그럴 겁니다. 흐흐흐.”
두목이 명령했다.
“일단 차부터 여기서 조용히 빼내. 남들이 눈치 못 챘을 때 빠져나가야 한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사이드미러를 보며 말했다.
“어? 형님. 누가 이쪽으로 옵니다.”
두목이 급히 말했다.
“젠장! 다들 몸 숙여! 빈 차인 척해! 아직 우리를 못 봤을 거야! 무슨 일인지도 모를 거야. 거기 걔 입도 확실히 막아!”
***
이태호는 나강인이 혼자 임시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당황했다.
“아니, 왜….”
이태호가 무너진 세트장에서 나강인이 활약한 영상을 보기 전이라면, 제작비를 빼먹으려던 게 들통나 도망간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본 이후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태호는 나강인이 이민지의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받을 때 옆에 있었다. 그 전화는 걸려오자마자 잡음과 함께 끊어졌다.
전화가 걸려왔다가 그냥 끊기는 일은 원래 곧잘 일어난다.
그런데 나강인은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움직였다.
이태호도 덩달아 마음이 불안해졌다. 딸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태호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나강인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사람 불안하게 왜 그러는 겁니까!”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이 소란을 듣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중 몇 명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인질 구출 프로토콜을 활성화합니다.
“주변을 분석해서 인질의 현재 위치를 찾아.”
- 10세 아이의 발자국을 찾았습니다. 이민지로 추정됩니다. 주차장 쪽으로 이동한 발자국을 추적합니다.
AI 전지인의 목소리가 조금 심각해졌다.
- 땅에서 저항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아이의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진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 성인의 발자국은?”
- 찾았습니다. 그 발자국도 주차장 쪽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차로 갔지?”
그가 주차된 차들을 보았다. AR 렌즈가 그중 세 대에 반투명한 붉은 표시를 붙였다.
- 차량에 가려져 발자국의 영상 정보를 수집할 수 없습니다. 표시한 세 대의 차량 사이에서 여자아이의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나강인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직접 확인하자.”
***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다급히 말했다.
“형님! 저 새끼가 우리 쪽으로 옵니다!”
“설마 들켰나?”
“어떻게 할까요?”
두목이 고개를 조금 들어 뒤를 보았다. 나강인은 정확히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씨발! 모르겠다. 일단 출발해!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
***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적이 눈치챘습니다!
“알아!”
나강인이 차를 향해 달렸다.
거의 동시에 승합차의 타이어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바닥의 흙을 요란하게 뿌렸다. 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여기는 아스팔트가 깔린 도시가 아니라 산속에 마련된 세트장이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도로는 일직선이 아니라 중간이 꺾인 형태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차량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필요합니다.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에는 표지판이 하나 꽂혀 있었다. 세트장을 만들 때 쓰다 남은 쇠파이프에 합판을 붙여 만든 임시 주차장 표지판이었다.
나강인이 도망치는 차를 쫓아 달리면서 오른손으로 그 쇠파이프를 잡아 뽑았다. 땅에 단단히 박아넣은 쇠파이프가 쑥 뽑혀 나왔다.
쇠파이프 위에는 표지판으로 사용한 합판이 붙어 있었다. 그는 달리면서 그 합판을 손으로 잡아 뜯어버렸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투창 모드로 전환해 쇠파이프를 바퀴에 꽂으면 차를 세울 수 있습니다.
승합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가, 내리막길 급커브길에서 속도를 충분히 줄이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차가 크게 휘청였다.
“타이어를 터트렸다가 차가 뒤집히면 꼬맹이가 다쳐!”
이곳은 산속에 있는 공터다. 딱 하나 있는 비포장도로는 산비탈 중간에서 V자 모양으로 꺾인 형태다.
그 도로를 질주하는 승합차는 거의 U턴에 가깝게 방향을 튼 후에 균형을 잡자마자 아래쪽으로 내달렸다.
나강인은 차와 같은 도로를 달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산비탈을 가로지르며 아래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사람이 급경사 지역을 뛰어 내려가면 평지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 그러다 넘어지면 크게 다치지만, 나강인은 넘어지지 않았다.
그가 땅을 박찰 때마다 몸이 바닥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가 다시 디뎌야 하는 바닥은 이전에 밟았던 곳보다 아래쪽에 있다. 그가 땅을 박차면 그의 발은 평소보다 더 먼 거리를 날아간 후에 산비탈 지면에 닿았다.
그가 뛰어 내려가는 방향과 차가 도주하는 도로는 직각에 가까웠다. 나강인과 승합차가 점점 가까워졌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산비탈의 지면 상태가 고르지 않습니다!
승합차를 타고 도주하는 놈들이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나강인을 보고 떠들었다.
“형님. 저 새끼 뛰어오는데요?”
두목이 비웃었다.
“미친 새끼네. 뛰어서 차를 따라잡으면 그게 사람이냐? 해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새끼들이 꼭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