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조사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유괴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일이 생기면 경찰에는 비상이 떨어진다.
유괴되는 도중에 아이를 구출했지만 그렇다고 사건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강원도 산속 세트장에 경찰차가 속속 도착했다.
그 지역 경찰서에서 온 형사들은 납치범들의 상태를 보고 난감해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팀장이 물었다.
“야. 이 새끼들 상태가 얼마나 나쁜 거냐?”
먼저 도착한 형사가 대답했다.
“여기 이놈은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저놈은 턱이 깨졌고요. 둘 다 다른 데도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형사가 손으로 다른 쪽을 가리켰다.
“진짜 문제는 저기 저놈인데요.”
팀장이 두목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다 움찔했다.
“어우. 씨. 저놈은 손이 왜 저래?”
“칼을 들었던 오른손은 뼈가 몇 개는 부러진 것 같고, 왼손 손목은 완전히 꺾였습니다. 갈비뼈는 뭐 당연히 나갔을 테고요.”
“양손 상태가 진짜 장난 아닌데?”
“예. 병원에 빨리 보내야 할 거 같습니다.”
팀장이 형사를 타박했다.
“그럼 구급차에 태워서 보내지 왜 저렇게 길바닥에 놔뒀어?”
“구급차가 한 대밖에 도착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거기 태워서 병원부터 보내.”
“그런데 말이죠. 저놈을 먼저 구급차에 태우려고 했더니 아이 아버지가 격렬히 항의해서….”
“응?”
“구급차에 태워도 피해자인 자기 딸을 태워야지 어디 유괴범 따위부터 치료하냐던데요?”
팀장이 살짝 긴장했다.
“아이가 다쳤어? 아까 전화로는 아이는 괜찮다며?”
“아니요. 아이는 하나도 안 다쳤는데요. 그래도 자기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구급차 한 대는 여기 있어야 한다고 하도 강하게 주장해서요.”
형사팀장이 짜증을 냈다.
“야. 그런다고 안 태워? 아무리 아이 부모가 항의해도 저 걸레짝은 일단 병원에 보냈어야지!”
형사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아이 아버지가 이 영화사 사장이랍니다. 아이는 이 영화의 아역배우고요.”
“근데?”
“범인부터 태우려고 했더니 이 영화사 사람들은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다 화를 냈습니다. 저기 김유찬하고 신은하 보이시죠?”
팀장이 그쪽을 돌아보고 멈칫했다.
“어? 어. TV에서 많이 본 분들이네?”
“범인부터 구급차에 태워 보내면 김유찬은 방송국 뉴스에 나가서 따지겠다던데요? 신은하는 항의 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하고요.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저놈만 먼저 태웁니까?”
“그, 그래?”
형사팀장이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화 나는 부모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알았어. 내가 이야기할게.”
형사팀장이 이태호 쪽으로 걸어갔다.
이민지는 이태호의 옆에서 훌쩍였다. 신은하가이태호와 함께 이민지를 달랬다.
형사팀장이 말을 걸었다.
“사장님. 구급차는 몇 대 더 오고 있습니다. 곧 도착하니까 일단 저놈부터 병원에 보내시죠.”
이태호가 인상을 썼다.
“뭘 잘했다고 저놈부터 치료합니까?”
“그래도 저대로 놔두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저놈이 잘못되면 저는 춤을 출 것 같군요.”
“후우. 그러다 진짜 잘못되면 저놈을 저렇게 만든 사람까지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이민지가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 밥차 아저씨 잡혀가? 아저씨 나 때문에 교도소 가는 거야?”
이태호가 형사팀장을 째려보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게 막을 거야. 아빠만 믿어.”
신은하가 팀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지금 민지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형사팀장은 본전도 못 찾고 팀원들에게 돌아왔다.
새로운 구급차는 5분 뒤에 도착했다.
팀장은 유괴범 중에서 부상이 제일 심한 두목을 그 구급차에 태우고 형사 한 명도 같이 보냈다.
그런 후에 팀장이 다른 형사들에게 다가갔다. 형사들은 유괴범들이 사용한 승합차를 살피고 있었다.
팀장이 물었다.
“뭐 좀 나왔어?”
형사 한 명이 보닛에 난 구멍을 가리켰다.
“쇠파이프가 여기를 뚫고 엔진룸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그게 안쪽 어딘가를 건드려서 차가 멈춘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았네.”
영화 제작사인 THO 엔터 김 과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설마 우연이겠습니까? 망설이지도 않고 딱 한 번에 쇠파이프를 꽂아서 끝냈는데요. 거길 뚫으면 차가 멈춘다는 걸 알고 그랬겠지요.”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민간인이 사건 현장에서 뭐하시는 겁니까?”
“우리 사장님이 보내셨습니다. 나강인 씨가 민지를 구출하는 장면이 우리 카메라에 찍혔는데, 보시겠습니까?”
팀장이 놀라 물었다.
“어? 그런 게 있습니까? 여기는 CCTV도 없는 곳이라 포기했는데….”
김 과장이 슬쩍 자랑했다.
“여긴 영화쟁이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뭔가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바로 카메라가 돌아갑니다.”
“이야. 우리 일이 좀 편해졌습니다.”
“우리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 그걸 보면 설사 유괴범 두목이 죽는다 해도 나강인 씨 처벌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할 거라고.”
“예?”
김 과장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보고도 나강인 씨를 무리하게 처벌하려고 하면, 우리 회사 홍보팀이 얼마나 유능한지 보여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예? 법무팀이 아니라 홍보팀이요?”
“형사님들이 욕을 푸짐하게 드실 거란 뜻이죠.”
***
영화 촬영은 현장 조사 도중에도 계속 진행됐다. 필요한 영상을 오늘 다 못 찍으면 영화가 망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더 보낼 여유가 없다.
어차피 임시 주차장이나 전투가 벌어진 곳은 촬영장소와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손태민 감독은 촬영을 강행했다.
“형사들이 뭘 하든 우리는 영화를 계속 찍습니다! 뭐합니까? 뛰어!”
형사들은 현장을 조사하고 유괴범들은 체포해서 구급차나 경찰차에 실어 보냈다.
나강인도 일을 시작했다.
밥차의 원래 주인 김병호가 물었다.
“이 상황에서 밥을 하려고요?”
“밥은 좀 있다가 하고, 지금은 간식을 좀 만들어볼까 합니다.”
이태호는 이민지를 위로하며 밥차 앞 접이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자동차는 이민지가 타는 것조차 거부해서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런 이민지의 앞에 나강인이 접시를 내려놓았다. 접시에는 디저트가 예쁘게 담겨 있었다.
“이거 먹을래?”
이태호는 나강인이 딸을 어떻게 구출했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는 디저트를 대놓고 거절하지는 못하고 정중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고맙습니다만 우리 딸이 지금 입맛이….”
이민지가 물었다.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어? 딸?”
나강인이 말했다.
“어. 너 기분 좋아지라고 만든 거야.”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야전 전술 디저트는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아이템입니다. 아군의 보급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황이 불리할 때는 최후의 만찬….
나강인이 말했다.
“맛있을 거야.”
이민지가 빵과 케이크를 섞어놓은 것처럼 생긴 디저트를 집어 한 입 먹었다.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부드러운 케이크와 함께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살짝 씹히는 과자 조각도 맛있었다.
이민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내가 만들었으니까.”
- 오류를 수정합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내 손으로 만들었다.”
AI 전지인도 그건 반박하지 못했다.
이민지가 살짝 흥분했다.
“아까 과자도 맛있었는데 이건 더 맛있어요. 아저씨가 만든 건 진짜 다 맛있어요!”
“내가 만들면 원래 맛있어.”
- 제가 만드는 야전 전술 요리와 디저트는 모두 맛있습니다. 전장에서 밥이 맛이 없으면 아군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이민지가 물었다.
“이 케이크는 이름이 뭐예요?”
“티라미수 스타일 잡탕 케이크. 속에 조각낸 잡탕 과자가 들었거든.”
“와. 그래서 그 과자 맛도 났구나.”
이태호는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불안해하던 딸이 과자 몇 조각에 눈에 띄게 밝아졌다. 게다가 잘 먹었다.
‘얼마나 맛있길래?’
이태호가 접시를 향해 손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이민지가 접시를 조용히 옆으로 뺐다.
“딸?”
“아빠. 그게 아니라…. 붕붕 날아다니는 과자 아저씨가 나 먹으라고 준 거니까….”
이태호는 ‘붕붕 날아다니는’이라는 말을 듣고 이민지의 표정이 밝아진 이유를 깨달았다.
‘그놈들을 때려잡은 힘센 아저씨가 느긋하게 디저트를 주니까 마음이 놓이는 거구나.’
나강인이 밥차로 가서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하나 더 가져다주었다. 이번 것은 모양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넉넉히 만들었습니다.”
야전 전술 요리의 특징 중 하나는 대량 조리다. 그건 디저트를 만들 때도 적용된다.
대신에 이 디저트는 하나하나의 모양이 섬세하진 않았다. 그는 이걸 만들 때 넓은 판에 한 번에 만든 후에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죽죽 잘라 작은 조각으로 나누었다.
이민지에게 준 디저트는 따로 예쁘게 조각했지만, 나머지는 그냥 네모난 모양이었다.
이태호는 나강인이 가져다준 디저트를 하나 집어 먹었다.
“어?”
맛있었다.
모양은 뷔페식당에서 디저트로 나오는 사각형 조각 케이크처럼 생겼는데, 맛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디저트보다 맛있었다.
“아니, 방금 그냥 쓱쓱 만드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촬영이 또 하나 끝났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강인 씨가 다른 간식을 만든 겁니까?”
밥차 주인 김병호가 나강인 대신 디저트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방금 쓱쓱 하더니 순식간에 이걸 만들더라고요.”
사람들이 그걸 나눠 먹으며 감탄했다.
“와. 진짜 맛있네요.”
“이건 어떻게 만들어요? 조리법이 궁금해요.”
김병호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옆에서 봤는데, 보통 사람은 레시피를 알아도 못 만들어요. 재료를 그렇게 빨리 섞고 흔들려면 힘도 엄청 세어야 하고, 불 컨트롤은 또 얼마나 예술로 하는지. 어휴. 하여간 보통 실력으로는 흉내도 못 내겠던데요.”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손태민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손 감독님. 나강인 씨는 혹시 파티시에입니까?”
“디저트를 전문적으로 만드냐고요? 아뇨. 제가 알기론 셰프라던데요. 점심 먹을 때 밥이 너무 맛있어서 진짜 감탄했습니다. 저녁밥도 기대되네요.”
이태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실력으로 왜 밥차를….”
손태민이 웃었다.
“저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시네요.”
“예?”
“그 액션 감각을 가진 사람이 오늘 밥차를 한 건 뭐 이해가 가십니까?”
“그것도 이해가 안 가죠. 그러니까 왜 밥차를….”
“아. 맞다. 나강인 씨는 오늘 하루만 밥차를 맡았습니다. 원래 밥차 하는 분은 저기 저분이고요.”
이태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원래는 럭셔리한 레스토랑에서 셰프를….”
“원래는 피시방에서 밥을 판다던데요? 그것도 알바로.”
이태호는 당황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이 실력에 왜요?”
손태민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 요리만 잘하나요? 나강인 씨의 액션은 카메라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하는 액션입니다. 그런 실력으로 왜 피시방 주방에서 알바를 할까요?”
이태호는 아까 손태민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 영화에 나강인 씨가 꼭 필요하다고 했지요?”
손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찍는 액션씬을 나강인 씨가 빠르게 끝내줘야 다른 씬을 찍을 시간이 나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나강인 씨가 없으면 우리 영화도 없습니다.”
나강인은 이민지를 유괴범들의 손에서 구출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살리려면 나강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태호가 디저트를 먹으며 말했다.
“내가 나강인 씨에게 본격적인 제안을 좀 해야겠….”
차 한 대가 비포장도로를 거칠게 달려오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정지했다. 흙먼지가 거칠게 일어났다.
디저트를 먹던 사람들이 그 차를 쳐다보았다.
차 문이 벌컥 열리며 여자가 내렸다.
이민지의 어머니 장미정은 딸이 유괴됐다가 치열한 격투 끝에 구출됐다는 말을 듣고 매니저와 함께 달려왔다.
그런데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본 건, 남편이 감독과 함께 한가하게 디저트나 먹으며 잡담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태호는 그 디저트를 무척 맛있게 먹고 있었다.
장미정이 이태호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넌 지금 밥이 목에 넘어가냐!”
이태호가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보고 다시 감독을 본 후에, 손에 들고 있는 반쯤 먹은 디저트를 다시 보았다.
그는 지금 그의 모습이 어떤 꼴로 보이는지 깨달았다.
“아니, 미정아? 지금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알지만, 이건 다 이유가 있어서….”
장미정이 이태호를 향해 달려가며 두 손을 뻗었다.
“너 이리 와! 너 오늘 죽었어!”
장미정은 배우다. 그녀의 매니저 장효린이 이태호의 멱살을 잡으러 달려가는 장미정의 허리를 두 팔로 겨우 붙잡았다.
“언니! 참아!”
“넌 이게 참아지니? 참아져?”
“지금은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형부는 목격자가 없는 데서 처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