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동네 사람
손태민 감독이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지 일입니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민지는 우리 촬영현장의 비타민이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다행히 여기는 외부인이 없는 산속이니까 우리만 입을 다물면 됩니다.”
김유찬이 물었다.
“저기 있는 형사들은요?”
“일단은 비공개로 수사한답니다.”
“다행이네요.”
손태민이 밥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밥차 아저씨가 누군지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앞으로 내 얼굴도, THO 엔터 이태호 사장님 얼굴도 다시는 안 보겠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조명 스태프가 손을 들었다.
“감독님. 우리는 오늘 밥차 아저씨가 누군지 모르는데요?”
손태민이 그 스태프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그 자세 좋아! 바로 그거야!”
“아니, 진짜 모르는데요?”
***
기사가 나가긴 나갔다. 그런데 그 기사는 ‘햇살 좋은 날’ 재촬영 소식이었다. THO 엔터가 인터넷에 영상을 하나 공개했다는 건 아예 기사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 기사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올라왔다.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 잠깐. ‘햇살 좋은 날’ 개봉일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다시 찍는다고?
- 그 영화의 중요 조연이 마약파티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영화를 극장에 걸고 싶으면 그 배우가 나오는 장면은 전부 다 다시 찍어야죠.
- 그럼 영화 개봉일도 연기되겠네요?
- 기사 보니까 예정대로 개봉한다던데요.
- 와. 진짜요? 영화 지금 미친 듯이 찍고 있겠구나.
부정적인 댓글도 많이 붙었다.
- 아무리 손태민 감독이라도 이건 무리지. 어떻게 일주일 사이에 그걸 다 찍고 편집까지 다시 해서 극장에 겁니까?
- 영화의 완성도를 포기하면 가능하죠.
- 그럼 이 영화 망하겠는데요?
- 이거 올해 기대작이었는데.
-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하겠네요.
- 영화 예매한 거 취소해야겠다.
***
조감독이 보고했다.
“감독님. 내일 촬영에 쓸 그 카페 말인데요. 다시 빌리려고 하니까 저번보다 돈을 더 달라는데요?”
손태민이 시나리오를 고쳐 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왜?”
“지금 우리 상황이 기사로 다 나갔으니까 그걸 봤겠죠.”
“그래? 줘.”
“네?”
손태민이 볼펜을 위로 들며 외쳤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게 뭐다? 시간! 우리가 시간이 없지 돈이 없냐? 두 배 줄 테니까 내일 아침부터 밤까지 손님 받지 말라고 해. 그리고 찍다가 카페를 좀 부술 수도 있는데, 그것도 다 물어주겠다고 해.”
“그러면 예산이….”
“아까 이태호 사장님이 예산 무제한으로 쓰라고 했어! 질러라!”
“예!”
***
손태민은 밤새도록 시나리오를 고쳐 쓰고 이튿날 아침 일찍 촬영현장에 나타났다.
잠 한숨 자지 못했는데도 그의 얼굴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서 광기가 보였다.
촬영감독이 말했다.
“약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힘이 넘치네?”
“내 앞에서 약 같은 소리 하지 마. 그 약쟁이 새끼 때문에 이 고생을…. 흐흐흐.”
촬영감독이 걱정했다.
“손 감독. 진짜 약 먹었냐? 왜 이 상황에서 웃어?”
손태민이 새로 출력한 대본을 흔들었다.
“어젯밤에 시나리오를 고쳐 썼는데, 이게 진짜 멋지게 나왔거든. 이대로 찍으면 영화가 아주 그냥…. 으흐흐흐.”
조감독이 수정 대본을 촬영감독에게 한 부 주었다. 촬영감독이 그 대본을 간단히 훑어보았다.
“수정된 부분은 느낌이 많이 바뀌었네. 되게 잘 나왔…. 어? 손 감독?”
“왜?”
“이거 말이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싸우는 장면 묘사를 이렇게 하면 문제 있는 거 아냐?”
“문제라니? 내가 뭐 빌딩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어? 총알을 피하라고 했어? 아니면 하늘을 날아다니라고 했어? 뭐가 문제야?”
촬영감독이 대본을 빠르게 넘기며 말했다.
“봐봐. 싸우는 씬이 전부 ‘멋지게 싸운다.’ 이거 한 줄이잖아.”
“누가 어디서 싸울지 이름하고 장소는 적어 놨잖아.”
“그것도 없었으면 오타 낸 줄 알았을 거야. 세상에 이런 대본이 어디 있어?”
“그럼 어쩌냐? 천천히 동선 짤 시간이 없는데. 와이어 설치하고 안전장치 깔아놓을 시간도 없어. 그러니까 싸우는 장면은 모두.”
손태민이 나강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나강인 씨만 믿어야지. 나강인 씨가 알아서 멋지게 그림을 만들어줄 거야.”
“와. 그거….”
“알아. 다른 때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안다고. 그런데 지금은 진짜 이 방법밖에 없다.”
***
나강인은 오늘 그와 싸울 배우들을 카페 여기저기에 배치했다.
손태민은 이 씬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새로 썼다. 간단한 말싸움은 치열한 격투로 바뀌었다.
나강인은 격투씬만 맡았다. 그 앞과 뒤의 연기는 주연배우 김유찬이 한다.
이미 앞부분 촬영은 끝났다. 나강인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며 상대역 배우들에게 말했다.
“날 진짜 적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해요.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강인은 어제도 그렇게 말했다. 어제 강원도 세트장에서 처음 덤빈 배우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주먹을 살살 휘둘렀다가 바로 반격당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배우들은 어제 나강인이 무너지는 세트장에서 신은하를 어떻게 구하고 달리는 차를 어떻게 세워 유괴범을 잡는지 직접 보았다.
이제 나강인이 다치는 걸 걱정하는 배우는 아무도 없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근접 전투 훈련 촬영 모드를 시작합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시작합시다.”
배우들은 아무 걱정 없이 달려들었다.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가상의 동선을 몇 개 제안했다. 허공에 이동할 경로가 몇 개 그어지고, 적당한 공격 방식도 제안됐다.
나강인이 그 동선 중 하나를 골라 움직였다.
그는 주먹을 내지른 배우의 공격을 흘려낸 후에 다리를 걸며 상대의 몸을 뒤집었다가 옆으로 던졌다.
“으악!”
집어 던져진 배우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배우는 카메라 앵글을 벗어날 정도로 멀리 날아갔다.
다른 배우는 나강인의 얼굴을 향해 날카로운 발차기를 날렸다.
나강인이 자세를 슬쩍 낮추었다. 상대가 높게 찬 발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는 상대가 땅을 디디고 있는 외다리를 툭 찼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중심을 잃었다.
나강인이 옆으로 자빠지는 배우의 몸을 손으로 잡고 휙 돌렸다.
카메라에는 그 배우가 땅에 패대기치는 것처럼 찍혔다. 정작 그 배우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
마지막 상대는 예전에 권투를 조금 배웠다. 그가 두 주먹을 앞으로 들어 얼굴을 보호하며 스텝을 밟았다.
나강인은 그 배우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휙 치고 들어갔다.
상대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나강인은 그 주먹을 슬쩍 피하며 어깨로 상대를 밀었다.
카메라에는 그가 어깨로 상대를 타격해 날려버리는 것처럼 찍혔다.
이제 그의 앞을 막는 적은 모두 물리쳤다.
카페 안쪽에 신은하가 서 있었다. 나강인이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신은하는 눈을 반짝거리며 나강인을 쳐다보았다.
나강인이 맡은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감독 손태민이 외쳤다.
“컷! 교대!”
나강인이 그대로 뒤로 빠졌다. 대신에 똑같은 복장을 한 주연배우 김유찬이 나강인의 그 자리에 섰다.
김유찬이 신은하 앞에서 선글라스를 벗고 마스크를 내리며 말했다.
“놈들이 포기하지 않았나 봐? 나도 마찬가지야.”
김유찬의 낮게 깔린 음성은 충분히 멋있었다.
그런데 정작 신은하의 눈빛은 반짝거림이 줄어들었다.
손태민도 그녀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끝났다. 손태민이 외쳤다.
“컷! 일단 이건 킵하는데 눈빛이 조금…. 시간을 벌었으니까 지금 그 씬만 한 번 더 갑시다.”
그 부분만 다시 찍어도 조금 전 그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태민이 잠시 고민하다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강인 씨. 아예 처음부터 한 번 더 찍어 보면 좋겠는데….”
“안 그러는게 좋습니다.”
나강인이 그와 싸운 배우들을 가리켰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연습 없이 이렇게 한 방에 찍어야 실감 나는 장면을 뽑을 수 있습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제안한 액션 중에서 제일 편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다른 액션을 선택하시면 더 좋은 영상을 찍을 수 있습니다.
“쉿.”
- 요원님은 촬영을 날로 먹고 계십니다.
손태민은 미련을 버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가겠습니다.”
그는 빠른 액션씬 촬영 덕분에 생기는 시간을 계산했다.
“강인 씨가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시면, 다른 장면을 더 찍거나 편집할 시간이 늘어날 겁니다. 진짜 이 영화가 잘 되면 강인 씨한테 진 신세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강인도 수정된 시나리오와 촬영 일정표를 갖고 있다. 그가 물었다.
“그럼 오늘 제 역할은 끝난 거지요?”
“물론이지요. 다음 액션씬은 내일입니다. 아. 이따가 점심때 요 앞에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강인 씨 덕분에 느긋하게 밥 먹을 시간이 다 생기네요.”
나강인이 거절했다.
“오늘 점심은 피시방에서 밥 팔아야 해서요.”
“예? 아니, 그 일을 굳이 왜 계속….”
“그게 본업이라.”
“그러니까 왜 그게 본업….”
신은하가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강인 오빠. 오늘 촬영 끝났죠? 저도 끝났으니까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요 앞에 진짜 맛있는 곳을 알거든요.”
나강인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에이. 부담 갖지 마세요. 제가 주연배우는 아니지만 설마 밥 한 끼 못 사겠어요?”
손태민이 옆에서 말했다.
“은하 씨가 어디 말하는지 알겠는데, 거긴 내가 이미 제안했어.”
“어머. 감독님하고 선약이 있으시구나. 그럼 저도 거기 끼어서 같이 먹어도 돼요?”
“아니. 은하 씨처럼 나도 까였어.”
“예?”
“강인 씨는 밥장사하러 가야 한대.”
신은하가 두리번거렸다.
“네? 어디서요? 오늘은 밥차도 없잖아요.”
“피시방에서.”
그녀가 커다란 눈을 연달아 깜빡였다.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아니, 잠깐만요. 강인 오빠가 피시방에서 밥장사 알바 한다는 거 진짜였어요?”
“진짜래.”
“아니, 강인 오빠 같은 능력자가 왜요?”
손태민이 나강인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나강인이 말했다.
“이 사람들이 남의 소중한 직장을 막 비하하는 느낌인데?”
신은하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 피씨방 어디에요? 저도 같이 가요!”
이번에는 나강인이 당황했다.
“예?”
“저도 오늘 촬영 다 끝났다니까요?”
손태민은 감독이라 현장을 떠날 수 없다.
신은하가 씩 웃으며 나강인에게 제안했다.
“제 차로 가요.”
신은하의 차는 하얀색 외제 승용차였다.
오전에 그들이 촬영장으로 쓴 카페는 서울에 있다. 게다가 신은하는 오전 격투씬 촬영 스케줄 하나만 있어서 따로 대기할 공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강인과 오늘 둘이서 밥을 먹을 계획을 어젯밤에 세우고, 매니저 없이 차를 직접 몰고 왔다.
그녀가 실실 웃으며 운전했다.
‘모든 건 계획대로….’
그러다 뒤늦게 현재 상황을 깨달았다.
‘아니지. 계획대로면 피시방이 아니라 분위기 좋은 맛집에 가야 하는데….’
나강인이 일하는 피시방은 촬영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가 운전하며 말했다.
“어머. 우리 집도 이 동네인데. 아. 부모님 집이요. 저도 독립하기 전까진 여기서 쭉 살았어요. 강인 오빠도 집이 여기인가 봐요?”
“집이 없습니다만?”
“네?”
그녀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들은 피시방이 있는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 조카 차은서가 피시방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은 야간 알바 윤아름과 대학생 해커 알바 안성환도 있었다. 그들은 나강인이 점심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밥만 먹으러 왔다.
피시방 삼인방은 나강인이 늘씬한 몸매의 젊은 여자와 함께 들어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어?”
“형이 여자랑 왔어. 와. 진짜 예뻐. 와. 능력자였어.”
차은서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강인 오빠. 그분은 누구….”
윤아름의 눈이 커졌다.
“앗! 설마 여자친구!”
안성환이 씩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형! 존경합니다!”
신은하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그녀가 차은서를 불렀다.
“어머. 은서야. 오랜만이다?”
차은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앗! 은하 언니? 언니가 왜 여기서 나와요?”
“그러는 넌 왜 여기 있어?”
“우리 삼촌이 이 피시방 사장이에요.”
신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저씨가 왜 피시방을 해?”
“삼촌 다니던 회사 망했잖아요.”
“아…. 그치. 그 회사 망했지.”
옆에서 윤아름이 상기된 얼굴로 감탄했다.
“와. 연예인이다.”
신은하가 미소를 지었다.
“연예인 처음 보나 봐요?”
“네! 처음 봐요!”
“아…. 그렇구나.”
안성환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커다란 하트를 만들며 말했다.
“누나! 사랑합니다! 허그 해주세요!”
“꺼지세요.”
“넵!”
윤아름이 차은서에게 물었다.
“은서 언니. 연예인하고 막 아는 사이에요? 우와. 언니 보통 인물이 아니었구나!”
차은서가 설명했다.
“은하 언니는 전에는 우리 동네에 살았어. 옛날에 이 언니가 우리 동네에서 저지른 흑역사가 진짜 어마….”
신은하가 나직이 말했다.
“은서야?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