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매운맛
나강인이 피시방 주방으로 들어갔다.
신은하가 얼른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전 어디서 기다리면 돼요? 무슨 요리 만들어주실 거예요?”
“피시방에 왔으면 빈자리에 앉아서 모니터 보고 주문해요.”
“네? 주문이요?”
“오늘 음식은 고기가 많이 들어가니까 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돈은 가져왔지요?”
신은하는 당황했다.
‘날 위해 특별 요리를 해주려고 여기로 부른 거 아니… 었지. 아니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강인이 먼저 밥을 해준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냥 그녀가 나강인을 따라왔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모니터 앞에서 주문할 순 없어. 그러면 특별하지 않잖아.’
그녀는 나강인이 그녀를 위해 따로 만들어주는 요리를 먹고 싶었다.
그녀가 애교가 넘치는 눈웃음을 살살 치며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오빠. 돈 안 내고 먹으면 안 돼요? 네?”
“돼요.”
“어머! 고마워요!”
“돈이 없다고 해서 쫓아낼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밥값을 하세요.”
***
윤아름이 주방을 보며 감탄했다.
“와. 나 오늘 연예인 처음 보는데, 연예인이 주방 알바 하는 것도 처음 봐요.”
차은서가 말했다.
“나도 처음 봐. 저 언니가 저런 일을 순순히 할 언니가 아닌데.”
신은하는 주방 한쪽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칼로 감자를 깎았다. 그녀는 점심값 대신에 주방보조 알바를 하는 중이다.
신은하가 감자를 깎으며 툴툴댔다.
“이게 아닌데….”
윤아름이 차은서에게 물었다.
“연예인이 저러다 손 다치면 어떻게 해요?”
차은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저 언니가 옛날에 칼 좀 만졌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나강인이 신은하를 구박했다.
“그런 속도로 감자를 까고 있으면 양파는 언제 깝니까?”
신은하는 당황했다.
“네? 양파도 까요?”
“어허. 손이 보입니다.”
신은하가 감자 깎는 속도를 높이며 투덜댔다.
“진짜 이게 아닌데….”
***
나강인은 고기 조림 요리를 만들었다. 매운맛을 낼 때는 합성 캡사이신은 쓰지 않고 청양고추와 홍고추를 사용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야전 전술 요리 스킬은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다 사용합니다만, 보급이 풍족할 땐 좋은 재료를 쓰는 걸 권장합니다. 같은 요리 스킬을 써도 식재료가 좋으면 더 맛있습니다.
***
나강인은 새로 만든 음식을 신은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알바비 대신입니다.”
“이 요리는 이름이 뭐예요?”
- 갈비찜 스타일 불잡탕조림입니다. 병사들의 전투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불잡탕조림.”
그녀가 젓가락을 요리 위에서 살살 움직이다가 고기부터 한 점 집어먹었다.
처음에는 기름진 맛과 함께 매콤함이 느껴졌다. 그 후에는 프라이팬 바닥에 살짝 눌어붙은 것을 긁어 만든 듯한 진한 맛이 났다.
“와. 이거 맛있다.”
그녀가 고기를 몇 개 더 골라 먹었다. 그럴 때마다 혀에 느껴지는 매운맛이 점점 강해졌다.
그녀가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살짝 내밀고 손으로 바람을 부쳤다.
“아. 매워.”
매운데 맛있었다.
바로 옆 대접에는 하얀 쌀밥이 담겨 있었다. 대접에 눌러 담은 게 아니라 엉성하게 퍼 놓은 밥이었다.
그녀가 하얀 쌀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밥이 입에 들어가자 매운맛이 조금 진정됐다. 밥을 씹을 때마다 깔끔한 단맛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먹으니까 밥이 더 맛있다.”
젓가락이 다시 불잡탕조림으로 향했다.
AI 전지인이 일렀다.
- 고기만 골라 먹고 있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골고루 먹어요.”
“네에!”
그녀가 이번에는 다른 재료를 집어먹었다.
신은하는 원래 육식파다.
그런데 이 요리는 다른 재료도 맛있었다. 그녀가 힘들게 깐 감자에서 조려진 고기의 기름진 맛이 매콤하게 났다. 그녀가 깐 양파의 부드러운 단맛은 매운맛을 조금 달래주었다.
나강인이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신은하를 보며 말했다.
“재촬영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을 텐데, 이 음식이 그걸 좀 풀어줄 겁니다.”
이 음식으로 풀어주고 싶은 건 재촬영 스트레스가 아니다. 어제 강원도 세트장이 무너질 때 그 한복판에서 그녀가 받았을 스트레스다.
‘겉으로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마음에 스크래치가 났을지도 모르니까.’
신은하가 물었다.
“근데요. 밥 더 먹어도 돼요?”
그녀는 불잡탕조림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지만 이미 혀는 매운맛에 항복하기 직전이다. 이 싸움을 계속하려면 하얀 쌀밥이 더 있어야 한다.
차은서가 얼른 밥을 퍼왔다.
“언니. 여기.”
신은하가 남은 불잡탕조림을 사발에 넣고 밥과 비볐다. 그런 후에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이렇게 먹어도 맛있었다. 쌀밥 덕분에 적당히 중화된 매운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조금 맺혔다. 열이 나서 손바람을 부치면 산들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 맛있다. 진짜 스트레스가 확 풀려.”
그녀는 사발이 깨끗해질 때까지 밥을 먹었다.
그런 후에 옆에 놓인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진짜 맛있었어요. 아. 배불러. 너무 배불러서 숨을….”
그녀는 배가 너무 불러서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는 걸 깨닫자마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앞에는 빈 대접 두 개와 불잡탕조림이 담겼던 텅 빈 그릇이 있었다. 넉넉히 담아주었던 불잡탕조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어떡하죠? 내일 또 촬영 있는데 너무 많이 먹어버렸어요. 나 미쳤나 봐.”
나강인이 그녀의 배를 보며 상태를 분석했다.
“음. 확실히 배가 나….”
“닥쳐요.”
“운동해요. 유산소를 권합니다. 지금부터 저녁때까지 운동하면 배가 쏙 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오래 할 체력이 없어요!”
“불잡탕조림과 밥을 그만큼 먹었으면 체력 버프가 세게 들어갔을 겁니다. 할 수 있어요.”
차은서는 점심을 주문한 피시방 손님들에게 불잡탕조림과 밥을 배달했다. 야간 알바 윤아름과 대학생 해커 안성환도 그 일을 도와준 후에 같이 밥을 먹었다.
안성환이 불잡탕조림과 밥을 먹으며 말했다.
“내가 오늘 강인이 형이 점심 하는 날이라고 해서 이거 먹으려고 왔잖아. 잘했다, 아까 고민하던 나. 진짜 탁월한 선택이었다.”
차은서가 구박했다.
“넌 아주 밥만 공짜로 먹고 가냐? 일은 안 하고?”
“누나는 왜 나한테만 그래요? 아름이는요?”
윤아름이 밥을 한 사발 더 푸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눈을 껌뻑였다.
윤아름은 자취방이 불에 타서 요즘은 찜질방에서 생활한다.
차은서가 말했다.
“아니야. 아름아. 먹어. 많이 먹어. 삼촌이 먹는 거로는 구박하는 거 아니라고 했어.”
***
신은하는 이튿날 오전에 나강인과 액션씬 두 개를 더 찍었다.
촬영 후에 손태민이 영상을 다시 돌려보았다. 신은하도 옆에서 같이 보았다.
손태민이 감탄했다.
“역시 강인 씨야. 이것도 한 방에 끝냈잖아? 강인 씨 덕분에 촬영에 여유가 많이 생겼어. 덕분에 편집할 시간도 생겼고.”
손태민은 낮에는 영화를 찍고 밤에는 스태프와 함께 영상을 편집했다. 없는 시간을 억지로 짜내서 대본도 추가로 수정했다.
그렇게 강행군을 하는데도 눈빛은 예전보다 더 시퍼렇게 번뜩였다.
“내가 그 약쟁이 새끼 때문에 영화 망할 뻔한 거 생각하면 이가 갈리다가도, 우리 영화가 이렇게 좋은 영화로 바뀌는 걸 보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손태민이 신은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번 씬은 나강인 씨가 은하 씨의 배를 좀 가리네. 은하 씨가 아니다 싶으면 요 부분만 다시 찍을까? 이젠 그 정도는 다시 찍을 여유가 있는데.”
신은하가 그 장면을 보았다. 어제 하도 잘 먹어서 오늘 아침까지 살짝 배가 나온 느낌이 들었는데, 그 부분을 나강인이 절묘하게 가렸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다시 찍지 마세요. 전 지금이 딱 좋아요.”
“그래?”
“강인 오빠도 그랬잖아요. 오빠 액션은 다시 찍으면 처음 같은 실감이 안 난다고.”
“하긴.”
나강인이 촬영장에 오가는 시간과 실제로 찍는 시간을 다 합치면 하루에 서너 시간은 된다.
나머지 시간에는 피시방에서 밥을 팔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 수집은 인터넷을 이용한 것도 있고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추가 촬영의 제일 마지막 씬은 넘어지는 신은하를 주연배우 김유찬이 붙잡는 장면이다.
그런데 김유찬이 그 장면을 찍다가 손목을 삐끗했다.
손태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유찬 씨.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도 아니고 그냥 넘어지는 사람 붙잡기만 하는 건데 그걸 왜….”
김유찬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으려다가 통증을 느끼고 손을 바꿨다. 그가 왼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마지막 씬에서는 강인 씨처럼 화려하게 해보려다가 그만….”
손태민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강인 씨. 우린 유찬 씨가 손이 나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이게 마지막 씬인데 어떻게 대신 좀 안 될까? 어차피 마스크 쓰면 둘이 비슷하잖아.”
“그러죠.”
나강인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같은 장면을 다시 찍었다.
신은하는 김유찬과 연기할 때는 조심해서 넘어졌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김유찬은 오버해서 연기하다가 손을 다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나강인이다. 그녀는 아무 걱정 없이 대놓고 넘어졌다.
넘어지는 그녀의 허리를 나강인이 왼팔로 감아 안았다.
신은하는 부드러우면서도 든든하게 감기는 팔을 허리로 느끼며 나강인에게 살짝 안겼다.
손태민이 외쳤다.
“컷! 은하 씨 그 별빛 같은 눈빛 그거 좋다! 전에 내가 원했던 눈빛이 바로 그거야!”
나강인이 그녀의 허리를 당겨 똑바로 세워준 후에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가 물었다.
“괜찮아요?”
신은하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요. 아주 괜찮아요.”
손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야아. 진짜 그 마약파티 터졌을 때는 우리 영화 망하는 줄 알았어. 난 진짜 망할 줄 알았다고. 겨우 일주일 만에 그 마약쟁이가 나온 장면을 다 다시 찍으면 영화 걸레짝 되는 거지.”
손태민은 그날 그 소식을 듣고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 조연이 등장하는 장면이 워낙 많아서 일주일 안에 다시 다 찍는 건 무리였다. 설사 찍는다 해도 예전 수준의 영상이 나오긴 어려웠다. 게다가 촬영은 어떻게 마친다 해도 편집할 시간이 부족하다.
심지어 촬영 첫날에는 세트장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터졌다.
다른 영화 같으면 그쯤 되면 기한 안에 찍는 걸 포기하거나, 누더기가 된 영화를 극장에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됐다. 그냥 해결만 한 게 아니라 원본보다 더 나은 결과물이 나왔다.
손태민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추가 촬영을 개봉 예정일보다 이틀이나 빨리 끝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틀 뒤에는 영화를 극장에 걸어야 한다. 다른 때라면 초비상사태다.
그런데도 손태민은 신났다.
“나에겐 아직 이틀이나 시간이 있다고!”
조감독이 아부했다.
“어디 그냥 빨리 찍기만 했나요? 감독님이 이야기를 더 멋지게 고치셨잖아요.”
“흐흐. 강인 씨의 액션을 보고 나니까 아이디어가 진짜 팍팍 떠오르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하룻밤 사이에 대본을 다 고쳤잖아.”
손태민이 나강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나강인 씨! 고마워요! 내가 진짜 이 신세 안 잊을게!”
나강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뭘요. 출연료 받기로 하고 한 건데.”
“나중에 나랑 영화 또 하는 겁니다? 꼭입니다? 나 본격 액션영화가 찍고 싶어졌어!”
손태민은 로맨스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다. 액션영화는 극장에 걸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큰소리쳤다.
“내가 원래 액션 느와르 영화를 찍고 싶었거든? 강인 씨만 있으면 진짜 멋진 작품을 찍을 수 있어!”
“전 땜빵 대역인데 뭘 그렇게까지….”
손태민이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을 향해 삿대질했다.
“아니, 누가 강인 씨를 땜빵이래! 너야? 너야? 어? 너구나!”
조감독이 두 팔을 교차시켜 X자를 만들었다.
“전 절대로 아닙니다!”
“거봐! 아니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