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7화 (27/411)

27. 철인기공

영화 ‘햇살 좋은 날’의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손태민 감독은 영화 개봉까지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며 좋아했다. 평소라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지금은 이틀이 어디냐 싶었다.

영화 제작 스태프들의 분위기도 밝았다.

최악의 상황에 몰렸던 이 영화가 잘 되면 사태 수습을 위해 뛰어다닌 스태프들의 업계 평가도 올라간다.

손태민이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난 오늘 촬영분 가져가서 편집 마저 할 테니까, 여러분은 현장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서 푹 쉬십쇼! 쫑파티는 우리 영화를 극장에 건 다음에 합시다! 그때 사장님이 소고기 쏜답니다! 한우로!”

***

영화사 사장 이태호와 장미정 부부는 현장에서 마지막 촬영이 끝나길 기다렸다.

두 사람은 손태민이 촬영 종료를 선언한 후에 나강인에게 다가왔다.

이태호가 인사했다.

“강인 씨. 고맙습니다.”

“출연료 받기로 하고 찍은 건데요.”

“영화 제작을 도와준 것도 물론 고맙지만.”

장미정의 뒤에서 이민지가 쓱 나타나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 고마워요.”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이민지의 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민지가 얼른 뒤로 물러나며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앗! 머리 헝클어져요!”

나강인이 웃으며 물었다.

“완전 멀쩡하네?”

이민지도 나강인을 보며 씩 웃었다.

“히이.”

이태호는 중요 조연 배우가 마약파티 현장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영화가 제날짜에 극장에 걸려서 투자비의 절반만 건져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일주일 안에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전부 다시 찍어서 편집까지 마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촬영이 개봉 예정일보다 이틀이나 일찍 끝났다. 나강인 덕분이다.

이태호가 다시 인사했다.

“덕분에 이틀이나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것도 정말 고맙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 회사가 직접 투자해서 제작한 거라서 돈이 정말 많이 들어갔거든요. 하하하.”

이태호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당장 스태프 전원을 데려가 감독이 말한 쫑파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스태프들은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특히 편집 파트는 감독과 함께 밤새도록 일해야 한다.

그런데 배우들은 이제 할 일이 없다. 특히 신은하과 김유찬은 시간이 남아돌았다.

신은하가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이태호가 나강인에게 제안했다.

“술 한잔 사고 싶습니다.”

나강인은 평소에는 현재 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며 지낸다.

AI 전지인이 즉시 제안했다.

- 고급 술집의 현장 정보가 필요합니다. 기왕이면 비싼 술을 사라고 하십시오.

나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신은하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끼어들었다.

“저도 술 마실 줄 알아요.”

이태호가 그녀를 보았다.

시나리오가 수정되면서 조연 배우 신은하의 출연장면이 원래보다 훨씬 많이 늘어났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마약 사건을 일으킨 조연과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몇몇 씬은 아예 삭제됐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재촬영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신은하는 세트장이 무너지는 장면을 찍을 때 그 한복판에 있었다. 이후 시나리오에서도 그녀는 전투에 계속 휘말렸다.

손태민은 전투씬을 하나 찍으면 거기에 연계된 씬 여러 개를 추가했다. 그런 씬에도 신은하가 필요했다.

결국 신은하의 영화 속 비중은 조연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그만큼 촬영장에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녀의 촬영 스케줄에 여유가 있었던 날은 카페 전투씬을 찍은 날 하루뿐이었다.

이태호가 활짝 웃었다.

“은하 씨도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으니까, 그럼 같이 갑시다.”

***

장미정과 이민지는 집으로 가고, 이태호는 고급 횟집의 별실에서 좋은 술을 샀다.

이 횟집에는 신은하만 따라온 게 아니다. 주연배우 김유찬도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신은하가 물었다.

“유찬 오빠는 여기 왜 끼어요? 돈도 많이 벌면서 왜 굳이?”

“그러는 넌? 무슨 속셈이냐? 너도 회 먹을 돈이 없는 건 아니잖아?”

“난 약속이 없어서 왔거든요?”

“나도 약속 없다.”

네 사람은 꽤 넓은 식탁에 앉았다.

나강인이 작은 술잔의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술이 맛있었다. 향도 좋았다.

“좋네요.”

나강인과 AI 전지인은 미각과 후각 등의 감각을 공유한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좋은 술입니다. 더 드십시오.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은하가 그 술병을 살짝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술을 혼자 따라 마시면 예쁜 여친 못 얻는대요.”

김유찬도 다른 술병을 잡으며 말했다.

“어디 쌍팔년도 농담을 하냐? 비켜. 강인 씨한테는 내가 따라줄 테니까.”

“이거 왜 이러셔? 생명의 은인에게 술 좀 따라주겠다는데.”

“강인 씨가 너만 구해줬냐? 나도 구해줬잖아.”

“유찬 오빠는 세트장 무너질 때 그냥 서 있었어도 죽지는 않았겠던데?”

“그때 거기서 얼굴이라도 다쳤어 봐. 내 이 화려한 배우 인생이 한 방에 끝장날 수 있었어.”

“난 실제 인생이 아예 끝날 뻔했어요.”

“영화가 망했으면 내 커리어가 엉망이 될 수도 있었고.”

“내 커리어는 뭐 안 위험했나?”

둘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사장 이태호가 나강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전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부터 영화판을 기웃거렸고, 독립영화도 몇 번 찍었습니다.”

“그렇군요.”

이태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사실 제가 찍은 영화는 다 망했습니다.”

말싸움에서 밀린 김유찬이 그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독립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요? 그런 경우 진짜 드물잖아요.”

“작품으로서도 망했다는 게 문제였죠.”

“아…. 그럼 뭐….”

이태호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독립영화를 몇 번 말아먹고 나서야 저에게는 감독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 회사에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전 이 바닥을 떠나긴 싫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작 쪽으로 돌아섰지요.”

김유찬이 말했다.

“영화사는 성공하셨잖아요.”

이태호가 웃었다.

“부모님이 부자니까 제일 중요한 자금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더군요. 그래서 성공한 겁니다.”

김유찬이 손을 흔들었다.

“에이. 겸손하시긴. 이 바닥에 이 사장님처럼 좋은 제작자는 흔치 않아요.”

“어쨌든, 만약 이번 영화가 망하면 우리 영화사도 위험해지고, 그럼 전 부모님과 형에게 욕을 진짜 퍼먹었을 겁니다. 하하하.”

좋은 술을 사는 사람이 앞에서 계속 이야기하는데 대답 없이 먹는 데만 집중할 수는 없다.

나강인이 물었다.

“아버님 회사에서 일하지 않고 영화사를 차렸다가 망해서요?”

“그게 아니라.”

이태호가 고개를 가로저은 후에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회사가 제조업인데, 주로 군이나 경찰용 장비를 만듭니다. 내수만 하는 게 아니라 수출도 꽤 하죠. 그쪽으로는 알아주는 회사거든요.”

갑자기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현재 요원님은 보유한 전투 장비가 없습니다. 장비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태호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저한테도 회사 지분을 좀 주셨습니다. 제 지분이야 당연히 아버지와 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우호지분이니까 팔면 안 되죠. 그런데….”

이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이번 영화에 직접 투자한 돈이 백억이 넘습니다. 그 돈을 구할 때 그 지분을 담보로 잡혔거든요.”

“아버님 회사 지분을요?”

“예. 영화가 망하면 아버지한테 솔직히 고백하고 살려달라고 해야 하는데, 회사 지분 잡혀서 영화 찍은 걸 아시면 아마 골프채를 드셨을 겁니다. 어우. 생각만 해도 무섭네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신은하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네? 골프채로 막 때리세요?”

“옛날에, 부모님 몰래 연극영화과 지원해서 대학 갔을 때, 입학식 날 골프채로 맞아봤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기계공학과를 지원한 줄 아셨거든요. 가업이 그쪽이라서.”

“아…. 몇 대 정도는 맞을 만하셨네요.”

주연배우 김유찬이 아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사장님 아버님 회사가 되게 알짜배기 회사라고 들었는데, 진짜였네요. 백억이 넘는 제작비를 한 방에 해결해주실 정도인 걸 보면요.”

이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신에 전 골프채로 맞을 거라니까요. 아버지 회사 지분은 원래 잡히면 안 되는 거니까요.”

“근데 이 사장님 진짜 간 크시다. 그러다 영화 망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태호가 이번에는 밝게 웃었다.

“유찬 씨가 보기엔 우리 영화가 망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시나리오 최고지, 감독이 손태민이지, 배우 빵빵하지, 개봉관 확보도 최대로 했지.”

김유찬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진짜 그 약쟁이만 아니었으면 최소한 오백만 관객은 보장이었죠.”

“그래서 큰마음 먹고 직접 투자한 겁니다. 진짜 그 약쟁이 생각하면 아직도 등에 식은땀이 납니다.”

나강인은 이태호의 그런 사정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쫄깃한 회를 집어 먹었다.

‘여기 회 맛있네.’

신은하도 그런 쪽으로는 큰 관심이 없다. 그래도 대화를 따라가 보려고 김유찬에게 물었다.

“이 사장님 아버님 회사 이름이 뭐예요? 나도 아는 덴가?”

“일반인 상대로 물건 파는 곳이 아니라 넌 잘 모를걸? 철인기공이라는 곳인데 들어본 적 있어?”

“아뇨.”

신은하는 처음 듣는 회사 이름이다.

AI 전지인이 그 이름에 반응했다.

- 철인기공과 관련된 정보가 제 초기 데이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강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기는 실내이고 분위기도 조용하다. 간단한 질문이라면 몰라도 AI 전지인과 길게 대화하는 건 어렵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좀.”

나강인은 화장실에 도착한 후에 거울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철인기공에 대해 보고해. 여기서 인터넷으로 알아낸 것 말고, 네가 원래 알던 정보.”

- 일부 지역에서 가끔 사용되는 구형 전투 장비를 만든 회사입니다.

“2082년 기준으로 구형이겠지. 언제까지 생산됐는데?”

- 제가 가진 장비 데이터는 2022년식 모델이 마지막입니다.

나강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올해네.”

의문도 들었다.

“2082년 기준으로 60년 전에 만든 낡은 무기가 그때까지 사용된다고?”

- 현재도 60년 전에 생산된 무기가 사용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의 수통이 최근까지 한국군에서 사용되었다는 자료도 찾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말이 되네. 그럼 철인기공의 장비도 그런 식인가?”

- 철인기공의 제품은 노르망디 수통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어떻게?”

- 구형 장비인데도 보급 상태가 안 좋은 일부 전장에서는 주력 장비로 사용합니다. 미사용 제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됩니다.

“결론은 철인기공은 60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되는 명품 군사 장비를 만드는 회사란 거잖아. 60년 후에도 그러려면 단순히 장비만 명품이어서는 안돼. 애당초 생산된 것이 많겠지.”

- 타당한 추론입니다.

“그렇게 잘나가는 회사니까 백 억이 넘는 영화 제작비를 한 방에 해결해줄 수 있는 거고.”

나강인의 눈썹 사이에 세로로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던 회사의 장비가 2022년 이후로는 생산된 게 없다? 올해에 갑자기 망하기라도 했나?”

- 제가 가진 초기 데이터에는 철인기공의 무기와 장비 정보만 있습니다. 회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만약 올해에 그 회사가 갑자기 망했다면 말이야.”

나강인이 사람들이 있는 별실 쪽을 보았다. 갑자기 망할 수 있는 이유가 저곳에 있었다.

***

나강인이 자리에 앉았다.

이태호가 물었다.

“표정이 조금 안 좋으신 듯한데, 무슨 일이라도….”

“제가 아니라 이 사장님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

“우리 영화가 망하면 이 사장님이 보유한 철인기공의 지분이 날아가고, 그러면 아버님 회사의 경영권이 위험해지잖습니까?”

이태호가 웃었다.

“그거야 제 지분을 날렸을 때의 이야기지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리면 저야 쫓겨나겠지만 회사 지분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죠.”

나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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