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28화 (28/411)

28. 설계

나강인이 전부터 의심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재촬영 첫날 강원도에서 세트장이 무너졌습니다. 누군가 그 시설에 손댔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 이야기는 THO 엔터 사장 이태호도 들었다.

“강인 씨가 그렇게 말해주셔서 경찰이 현장을 정밀 감식했다더군요. 잔해 몇 개는 국과수로 보냈는데, 아직 분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잔해는 AI 전지인도 분석했다.

“국과수 분석은 아마 이렇게 결론이 날 겁니다. ‘누가 손댔을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예?”

“그러면 이후 절차는 어떻게 됩니까?”

이태호가 잠깐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거기서 다친 사람은 없는 데다가 어차피 철거해야 할 세트장이니까, 단순히 무너진 것만으로는 본격적인 수사가 어렵지 않을까요?”

나강인이 다른 사건도 언급했다.

“일주일 전에 마약파티 현장에서 우리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체포됐습니다. 그건 안 이상하십니까?”

이태호의 회사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 사건에 관한 것도 있었다.

이태호가 대답했다.

“그건 서울에서 체포된 방화 살인범을 조사하다가 경찰이 그 마약파티를 알게 되어 현장을 습격한 거잖습니까? 그 사건하고 우리 영화가 어떻게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화재 살인사건은 완전히 별개인데요.”

나강인이 경찰서에 찾아가서 그 화재 살인범의 몽타주를 그려주었다. 덕분에 경찰이 범인을 빠르게 체포했고, 마약파티 현장도 급습할 수 있었다.

만약 나강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범인의 체포도 늦어지고, 그 마약파티를 경찰이 급습하지도 못할뻔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 화재 살인사건은 누군가가 설계한 계획에는 없는 돌발 사건이지요.”

“예? 설계요? 돌발 사건이요?”

“그 마약파티를 경찰이 그때 급습했기 때문에 THO 엔터는 영화를 일주일 만에 다시 찍어야 했습니다..”

마약파티 사건은 영화 개봉일 일주일 전에 터졌다.

THO 엔터와 손태민은 그날 바로 재촬영을 결정했다.

나강인도 처음에는 범인이 너무 빨리 잡혀서 영화 개봉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영화 촬영을 꽤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영화는 원래보다 더 멋진 작품이 되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일주일 전이 아니라 영화 개봉 직전에, 그러니까 개봉 전날에 마약파티 사건이 터졌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태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영화를 다시 찍을 시간은 없다.

“아….”

나강인이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일부러 영화 개봉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마약파티를 경찰에 신고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겠습니까?”

이태호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는 이제 나강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우리 영화는 극장에 걸어보지도 못했겠지요. 아니면 걸자마자 내리든지요.”

우수한 지휘관은 전투가 불리해졌을 때 탈출할 방법을 미리 준비해 둔다. 이태호도 탈출로를 하나 갖고 있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영화가 망했을 때의 대안은, 아버님께 손을 벌리는 거였지요?”

“그렇죠. 지분을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가 돈을 빌려주실 테니까요.”

그런데 그 탈출로에 적이 매복해 있으면 후퇴하는 아군은 전멸당할 수도 있다.

“이게 만약 누군가가 설계한 상황이라면, 영화가 망하는 순간 이 사장님의 아버님 회사에도 뭔가 수작이 들어갔을 겁니다. 철인기공이 이 사장님의 영화사를 도와주기 어려운 어떤 위기상황을 만들겠죠.”

이태호가 눈앞의 술잔이 아니라 물컵을 들고 찬물을 벌컥 마셨다.

“후우. 그런 경우라 해도 제가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면, 우리 회사를 남에게 넘겨서라도 아버지 회사의 지분만은 지킬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마지막 조각을 말했다.

“만약 민지가 그날 강원도 세트장에서 유괴됐다면, 사장님이 그 지분 쪽에 신경 쓸 정신이 있으실까 모르겠습니다만.”

이태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제작비를 직접 백억 원 이상 투자한 영화가 극장에 걸어보지도 못하고 망했는데, 사장도 딸이 유괴돼 정신이 나가 있으면 영화사가 그대로 망할 수도 있다.

채권이 복잡하게 얽히면 이태호가 담보로 잡힌 철인기공의 지분도 순식간에 날아간다.

이태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러니까 그놈들이 민지를 유괴하려던 이유가….”

“이 사장님의 정신이 나가면 철인기공의 지분을 노리기 쉬워지니까요.”

“하, 하지만 내가 그날 강원도 세트장에 간 건 계획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우리 딸 화보 촬영장에 있었는데….”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재촬영 첫날 세트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현장에 안 가보실 겁니까?”

“가, 가야죠. 당연히.”

“그 세트장을 무너뜨린 놈은 이태호 사장님이 그날 거기에 민지를 데리고 올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게 설계했으니까요.”

이태호는 할 말을 잃었다.

신은하가 흥분해서 물었다.

“뭐예요? 그럼 날 노리고 그 세트장이 무너지게 한 놈이 있는 거예요?”

“나도 처음엔 은하 씨를 노린 게 아닐까 했는데, 그건 아닐 수도 있어요. 은하 씨가 아니라 유찬 씨가 다쳐도 효과는 똑같으니까.”

김유찬이 팔을 감쌌다.

“아니, 가만히 있는 난 왜….”

“세트장에서 아무도 안 다치면 민지 유괴가 더 쉬워지니까 그래도 상관없었고요. 어떤 경우가 돼도 실패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강인이 그날 그곳에 없었다면 배우가 다쳐서 촬영이 중단되거나, 아니면 이민지가 유괴될 뻔했다.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신은하가 화난 얼굴로 물었다.

“그 유괴범들을 조사하면 누가 뒤에서 그런 더러운 수작을 부렸는지 알 수 있겠네요!”

나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일을 그렇게 어설프게 처리했으려고요.”

***

형사들이 유괴범 셋을 잡아놓고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형사가 팀장에게 보고했다.

“제가 볼 때 저 새끼들은 아는 게 없습니다.”

팀장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저 새끼들 말은, 그 애가 그날 강원도 촬영장에 온다는 소문만 듣고 유괴했다는 거지?”

“예. 아이 아버지가 수백억대 자산가인데, 딸을 굉장히 아껴서 유괴만 하면 몸값으로 십억쯤은 쉽게 내놓을 거라고 들었답니다. 그리고 거긴 CCTV가 없으니까 정체를 들키지도 않을 줄 알았다더군요.”

“그래서 저 새끼들이 그 소문을 누구에게서 들었다는데?”

“그걸 제대로 기억하는 놈이 없습니다. 어느 술집에서 주워들었다더군요.”

“그 술집은?”

“알아봤는데 거기는 CCTV가 없습니다.”

“환장하겠네.”

***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영화가 망했을 때의 시나리오인데, 우리 영화는 안 망할 것 같더군요. 손 감독님이 원래 찍었던 것보다 지금 영화가 더 낫다면서 웃고 다녔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한 이야기는 그냥 재미로 들으시죠.”

신은하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놓으며 박수를 쳤다.

“와. 강인 오빠. 액션만 잘하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도 잘 쓰나 봐. 그런 이야기로 영화 만들어도 되겠다.”

김유찬도 웃으며 말했다.

“난 그 영화에서도 남자 주인공을 하고 싶다. 액션만 강인 씨가 맡아주면.”

네 사람 중에 이태호만 웃지 못했다.

***

술자리는 일찍 끝났다.

이태호는 서둘러 계산한 후에 차를 타고 떠났다.

신은하가 제안했다.

“1차가 너무 일찍 끝났어요. 우리 한잔 더 하러 갈래요?”

김유찬도 말했다.

“그러시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데.”

“유찬 오빠는 집에나 가.”

“이거 왜 이래? 내가 살게. 그러면 되잖아.”

나강인이 멀어지는 이태호의 차를 보며 생각했다.

‘이번에 크게 당할 뻔했으니까, 다음부터는 철인기공의 지분을 걸고 모험하는 짓은 안 하겠지.’

그가 오늘 말한 이야기는 일반적인 기업사냥 수법이 아니다.

‘철인기공은 그 방법 외에는 무너뜨릴 수단이 없으니까 어떤 놈이 이런 위험한 일을 꾸민 거겠지. 그러니까.’

나강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변수가 다 제거됐으니 철인기공은 적어도 올해에는 안 망하겠네.”

신은하가 나강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강인 오빠. 술 한잔 더 하자니까요?”

나강인이 대답했다.

“그래요. 셋이서.”

***

이태호는 차를 타고 가면서 홍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 팀장님. 강원도 세트장에서 있었던 일을 국과수와 경찰에서 어떻게 수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 대충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들었는데, 일단 그거라도 말씀드릴까요?

“말씀하시죠.”

그는 홍보팀장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들었다.

그런 후에 그대로 본가로 들어갔다.

그의 형인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이 물었다.

“왜 혼자 와? 민지는?”

“민지는 집에 갔어. 엄마는?”

“속초.”

“아버지는 계시지?”

이태호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은 형이랑 아버지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

이태호는 오늘 나강인에게 들은 이야기와 홍보팀장이 전해준 수사 상황을 아버지와 형에게 이야기했다.

철인기공 사장 이정민이 불같이 화를 냈다.

“야 이 미친놈아! 어떻게 우리 회사 지분을 잡혀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해!”

이태호가 변명했다.

“그게요. 절대로 망하지 않을 영화라서, 이번에 대박을 쳐서 영화사 규모를 제대로 키워 보려고….”

“닥쳐!”

“예.”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도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안 좋은 이런 때에 넌 진짜…. 후우.”

“응? 분위기가 안 좋다니? 회사에서 대단한 신제품을 개발했다며? 그 장비 수출 이야기도 잘 된다며?”

“그것 때문인지 최근에 적대적 인수 합병을 노리는 곳이 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합병 이슈로 우릴 흔들어서 해외시장 입찰을 방해하려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우리 지분이 워낙 탄탄하니까 방법이 없어서 다들 포기하는 것 같았는데….”

이태호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그 새끼들 중에 우리 민지를 유괴하라고 시킨 놈이 있는 거잖아!”

“야. 지금 아버지랑 내 앞에서 네가 목소리 크게 떠들 상황이냐?”

“아니, 형. 그래도….”

이태성이 설명했다.

“그 회사 중 하나가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우리 회사를 먼저 먹은 후에 그 회사 중 한 곳에 다시 팔아먹으려는 무기 브로커 쪽이 더 의심이 가지.”

“아….”

철인기공은 군대와 경찰용 장비를 만드는 회사다.

“우리 회사에서 파는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까, 원래 무기 브로커들이 관심이 많았거든.”

사장 이정민은 골프채가 가득 담긴 가방 쪽으로 시선이 자꾸 갔다.

그는 둘째 아들이 부모를 속이고 연극영화과에 간 날 처음으로 아들에게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자꾸 골프채가 보였다.

이정민이 손을 쥐었다 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일단 상황부터 정리하자. 태호야. 이번 영화, 안 망하는 거 확실하지?”

이태호가 장담했다.

“영화가 원래 찍었던 것보다 더 잘 나왔습니다.”

“그게 그 배우 덕분이고?”

“예. 나강인 씨 덕분에 영화를 빨리 찍을 수 있었죠. 오늘 이 이야기도 나강인 씨가 해준 거고요.”

“배우가 우리 회사 상황을 어떻게 알고?”

“오늘 술자리에서 제가 회사 지분 잡혀서 영화 찍은 이야기가 어쩌다 나왔는데, 그걸 듣더니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파악하던데요?”

이태성이 타박했다.

“배우도 그렇게 쉽게 파악하는 걸 넌 진짜…. 어휴.”

“아니, 형. 그 배우가 그냥 평범한 배우가 아니라서 그래. 보통은 이야기를 들어도 몰라야 정상이야.”

이정민이 이태성에게 물었다.

“태호네 회사가 멀쩡하면, 외부에서 우리를 공격해도 문제는 없지?”

본부장 이태성이 장담했다.

“예. 지금도 어지간한 공격은 방어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더 단단히 대비하겠습니다.”

“그럼 그것도 됐고.”

“그래도 만약을 대비한 조치는 해야 합니다. 요즘 현금이 조금 빠듯한데, 영화가 망할 경우를 대비해서 자금을 미리 구해볼까요? 이자는 꽤 물어야겠지만요.”

“이게 다 누군가의 작전이라면 그것도 방해가 들어올 거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구하면서 누가 방해하는지 알아봐. 찾아내기 쉽지는 않겠지만.”

“예.”

“자금이 구해지면 은행이자는 태호 저 자식에게 받아내.”

이태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만 대박 나면 이자 정도는 제가 싹 다 해결할게요.”

“그리고 태호 너.”

이정민이 인상을 확 썼다.

“네 지분에 다시 손대면 호적에서 파버릴 줄 알아라.”

이태호가 두 손을 흔들었다.

“절대로 손 안 댈게요. 그것 때문에 민지가 유괴될 뻔했는데요.”

“민지는?”

“건강해요. 오늘 마지막 촬영에 데려갔는데 거기서 나강인 씨하고 웃으면서 놀던데요.”

이정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럼 위기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나간 거군.”

“그렇죠.”

이정민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제 다른 사람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그 나강인이라는 친구 말이야. 액션 대역배우라고 했지? 대사 많은 배역이라도 마련해서 꽂아주든가 해. 사람이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지.”

이태호가 나강인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손태민 감독은 다음 영화를 찍을 때 나강인에게 또 도와달라고 할 눈치였다.

나강인이 지난 며칠 동안 촬영장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본 사람도 많았다.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영화판에 그 소문이 안 퍼질 리가 없다.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설명했다.

“아버지. 나강인 씨는요. 이미 제가 어디 꽂아줄 레벨이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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