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거점 이동
인터넷에 공개된 영상은 화질과 용량을 낮춘 복사본인 데다가 멀리서 찍었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납치될뻔한 아이가 ‘햇살 좋은 날’에 출연한 아역배우라는 건 알려졌다.
홍보팀장이 보고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영화 홍보가 더 확실히 됐….”
영화사 사장 이태호가 으르렁댔다.
“지금 내 딸을 팔아서 영화 홍보를 했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사람들 반응은요?”
“긍정적입니다. 다들 밥차 아저씨의 놀라운 활약에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민지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사고를 친 김유찬 씨는요?”
“민지를 찾아가서 사과하고 있습니다.”
김유찬은 영화를 찍는 동안 이민지를 무척 귀여워했다. 이태호도 김유찬이 일부러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는 건 안다.
이태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강인 씨는요?”
“예?”
“우리가 그렇게 신세를 졌는데 민폐를 끼칠 순 없잖습니까?”
“아. 나강인 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영화 스태프 중에도 몇 명 없습니다. 촬영장에서도 다들 이름만 들은 정도라서요. 누군지 아는 몇 명은 함부로 정보를 흘릴 사람들도 아니고요.”
“그래도 기자들이 캐려고 들면 결국 드러날 겁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 정도 선에서 기사가 정리되게 손을 쓰세요.”
“알겠습니다.”
THO 엔터 홍보팀은 기자들에게 사건 관련 자료를 뿌렸다. 그런데 그 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하면 사건 기사가 아니라 영화 홍보 기사가 된다. 홍보팀은 일부러 그런 형식으로 자료를 만들었다.
기자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여기저기서 관련 기사가 나가긴 했지만, 이것저것 다 빼고 기사를 내다보니 자세한 내용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 영상이 실제 상황이라는 건 제대로 알려졌다.
***
피시방 삼인방은 나강인이 밥차 아저씨라는 걸 안다.
윤아름이 자랑했다.
“내가 이 영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강인 오빠인 것 같다고 했잖아. 내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맞장구를 쳤다.
“와. 우리나라에 이런 실력자가 또 있구나.”
“왜? 누구 또 봤어?”
“어….”
안성환은 낡은 사무실에 갇혀서 주식 게시판 조작 프로그램을 만들던 그를 구해준 사람이 나강인이라는 걸 아직 모른다.
“아니야. 그냥 내가 아는 사람도 실력이 장난 아니라서.”
윤아름이 장담했다.
“그게 누구든 강인 오빠보다는 못할걸?”
***
신은하가 피시방에 찾아와 사과했다.
“강인 오빠. 미안.”
“뭐가?”
“오빠가 민지 구출하는 영상이 기사로 나간 거.”
“네가 범인은 아니잖아.”
“유찬 오빠가 범인이지. 근데 나도 같은 방송에 나갔잖아. 하여간 그 인간 입 싼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일부러 그런 거 아니면 됐다. 유찬 씨는?”
“민지에게 사과하러 갔어. 그 영상 속에 나오는 아이가 민지라는 것도 곧 알려질 거 같아.”
“유찬 씨 욕 많이 먹겠네.”
“장미정 선배님한테 맞고 있을걸? 그 선배님 한 성깔 하는데.”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신은하가 머뭇거렸다.
“근데 오빠. 오늘은 밥 안 팔아?”
“어. 오늘은 안 해.”
그녀가 대놓고 실망했다.
“기대했는데.”
나강인이 돌아앉았다.
“넌 사과하러 온 거냐? 밥 먹으러 온 거냐?”
“겸사겸사? 근데 오늘은 왜 밥을 아예 안 해? 오빠 먹을 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오늘은 갈 곳이 있어서.”
신은하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항의했다.
“설마 혼자 새 영화 들어가? 이 배신자!”
“무슨 헛소리야?”
“손태민 감독님 차기작이지? 그치? 맞구나?”
“방 얻으러 간다.”
“방? 아! 새 영화가 아니라 이사 가는구나!”
신은하가 활짝 웃었다.
“같이 가! 내가 방이 좋은지 봐줄게!”
“그걸 네가 왜 보냐?”
***
나강인은 피시방 근처 원룸 건물로 방을 보러 갔다. 그가 빌리려는 원룸은 크기는 좀 작지만 주방과 욕실, 빌트인 세탁기가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있을 건 다 있네.”
신은하는 당황했다.
그녀는 톱스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꽤 잘 번다. 김유찬처럼 잘나가는 배우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도 아주 잘 안다.
그래서 당황했다.
“아니, 강인 오빠 같은 사람이 왜 이런 방을….”
“나 같은 사람?”
“오빠는 능력이 장난 아닌데 왜 굳이 여길 골라?”
“원래 있던 곳에 비하면 궁궐이야.”
“원래는 어디서 살았는데?”
“피시방.”
“어?”
“피시방 안쪽에 간이침대가 있어.”
신은하도 그 침대를 본 적이 있다.
“그거 알바 하다가 잠깐 쉴 때 쓰는 거 아녔어? 사람이 어떻게 거기서 살아?”
“너 말이야. 나 놀리러 온 거면 가라.”
나강인이 임시 거점인 피시방에서 생활하는 건 이제 그만둬야 한다.
야전에서는 텐트가 없으면 땅을 파고 들어가서라도 잔다. 그런데 그런 환경이 일상이 되면 컨디션을 완벽하게 관리하기 어렵다. 기왕이면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 좋다.
그래서 그는 임시 거점인 피시방을 나와 안정된 거점을 구하려 한다.
게다가 이젠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이번 일로 그의 이름이나 얼굴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이 꽤 생겼다.
만약 그가 피시방 간이침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낸다는 게 알려지면, 지금 신은하가 보인 것과 같은 반응을 보일 사람이 많았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상식을 벗어난 생활 방식 때문에 불필요한 의심을 살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룸을 얻으러 왔다. 고정된 주거지가 있으면 불필요한 의심은 피할 수 있다.
신은하가 말했다.
“오빠가 그 능력으로 피시방 간이침대에서 지낸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거야 잠깐 돈이 떨어져서 그랬다 쳐. 그런데 지금 이 방을 얻은 것도 이해가 안 가. 이번 영화로 돈 많이 받았잖아.”
“받았지. 그 돈으로 이 원룸 보증금을 낼 거니까.”
“어? 보증금?”
“어.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 중에서는 여기가 최선이야.”
이 방은 AI 전지인이 인터넷을 검색해 알아냈다.
신은하는 이야기가 엇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물었다.
“보증금이 정확히 얼마인데?”
“오백만 원.”
그녀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어? 뭐야? 진짜야? 오빠. 잠깐만. 아직 이 방 계약하지 말아봐. 내가 더 좋은 방 구하게 해줄게.”
신은하는 영화사 사장 이태호의 휴대폰 번호는 모른다. 대신에 이태호의 아내인 배우 장미정의 번호는 안다.
그녀가 장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신은하예요.”
- 알아. 너 설마 김유찬 저 자식을 봐주라고 전화한 건 아니지?
“죽이지만 마세요.”
- 살려는 놓을게.
“근데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라요.”
그녀가 상황을 설명했다.
“사장님이 강인 오빠에게 우리 영화 출연료를요. 원룸 월세 보증금 정도만 주셨나 봐요.”
- 응? 어디 오피스텔 이야기야? 청담동?
“강남 아니에요. 제가 지금 같이 와 봤는데요. 방이 진짜 작아요. 침대 놓으면 남는 공간이 별로 없어요.”
- 그럼 혹시 전세금….
“월세 보증금 내면 딱 맞는 오백만 원을 출연료로 받았다는데요?”
나강인은 이태호 장미정 부부의 딸이 유괴될 때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구출해준 사람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나강인이 없었으면 ‘햇살 좋은 날’은 대박은커녕 극장에 걸어보지도 못할뻔했다.
장미정의 목소리가 당장 날카로워졌다.
- 내가 족쳐야 할 인간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알았어. 내가 확인해볼게. 어? 야! 김유찬! 누가 쉬래! 번쩍 들어!
통화가 끊어졌다.
신은하가 나강인에게 제안했다.
“반응이 올 때까지 우린 어디 가서 커피나 마실까?”
이태호가 신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 제가 알아봤더니, 나강인 씨의 액션 대역 출연료로 오백만 원이 지급됐더군요.
“네. 맞아요. 근데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강인 오빠가 우리 영화에서 그냥 대역만 한 건 아니잖아요?”
- 아니죠. 저도 소식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역시 모르셨구나.”
- 손 감독은 영화 편집하고 개봉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른 일에는 신경 못 썼다더군요. 당연히 저한테는 결재 서류가 올라올 줄 알았는데, 전결 처리되는 바람에 저도 몰랐습니다.
“그럼 누가 이렇게 결정한 건데요?”
- 출연료 담당 부서에서 평소 기준대로 처리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습니다. 강인 씨 출연료는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죠.
“그럼 좀 더 쏘시는 거죠?”
- 물론입니다. 액션 대역이 아니라 정식 무술감독으로 다시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주실 건데요?”
- 1억을 바로 지급하겠습니다. 혹시 절차에 문제가 생겨서 늦어질 것 같으면 제 사비를 털어서라도요.
신은하가 활짝 웃었다.
“어머. 역시 통 큰 이태호 사장님! 고맙습니다!”
- 아니, 강인 씨한테 돈을 주는데 왜 은하 씨가 고맙….
신은하가 전화를 끊으며 씩 웃었다.
“오빠 나한테 밥 사야겠다. 아주 맛있는 거로.”
“얼마나 받았길래?”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1억!”
“어? 와. 네가 도움될 때가 다 있구나.”
“뭐래? 나 엄청 도움되는 여자거든?”
***
1억 원은 곧바로 그의 계좌로 들어왔다.
나강인은 그날 당장 방 두 개와 거실, 주방이 있는 20평대 아파트를 월세로 얻었다. 일억 원 중에서 오천만 원은 보증금으로 냈다.
아파트는 비어 있어서 돈을 내자마자 즉시 입주할 수 있었다.
신은하가 텅 빈 거실의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며 감탄했다.
“와. 여기 전망 진짜 좋다.”
월세를 조금 더 주면 새로 지은 아파트를 빌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강인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인 이곳을 고른 건, 신은하가 감탄한 탁 트인 전망 때문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진입 방향 시야를 확실히 확보했습니다. 적의 움직임을 멀리서부터 관측할 수 있습니다. 창문에 암막 커튼을 설치하면 적의 관측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신은하가 물었다.
“강인 오빠. 오천만 원은 보증금 했고, 남은 오천만 원은 뭐 할 거야? 차 사나?”
AI 전지인이 말했다.
- 기동력을 확보해야 필요합니다.
나강인도 그렇게 생각한다. 지난번 강원도 촬영장은 밥차를 타고 갔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한 대 사야지.”
“내가 소개해줄까? 오천으로 살 수 있는 차가…. 삼각별은 좋은 건 어렵겠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자금을 기동력에 모두 투입하는 건 효율적인 예산 사용이 아닙니다. 남은 예산으로 장비 제작 거점도 확보해야 합니다.
“알아.”
신은하가 물었다.
“응?”
“내가 알아서 산다고. 삼각별 같은 거 살 생각도 없고.”
“알았어. 근데 집이 텅 비었네? 전기레인지가 빌트인으로 있으니까 나가서 조리 도구만 사다가 밥 해먹자.”
“넌 아까부터 노리는 게 결국 밥이냐?”
“오늘 내 덕에 돈 많이 받았잖아요.”
“어…. 잡탕밥 해줄까?”
“나 소고기 좋아하는데.”
나강인과 신은하는 프라이팬과 접시, 식기, 조미료, 그리고 소고기를 샀다.
새로 마련한 거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신은하가 말했다.
“오빠는 스테이크도 잘 굽는구나. 여기 곁들인 것도 다 맛있어.”
“네 덕에 원룸이 아파트로 바뀌어서 해주는 거다.”
신은하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설마 밥 한 번으로 끝낼 건 아니지?”
“봐서.”
그녀가 스테이크를 먹으며 나강인의 얼굴을 보았다.
‘요리 실력은 내가 아는 유명한 셰프보다 나아. 영화 찍을 때 액션 동선을 실시간으로 짜는 능력은 들어본 적도 없는 수준이야. 격투기도 엄청 잘할 것 같고, 운동능력은 올림픽에 나가도 될 거 같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능력자가 왜 돈이 없어서 피시방 휴게실에서 살았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돈이 생기자마자 방부터 얻은 거 보면 일부러 피시방에서 산 건 아니야.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직 그 사연을 캐물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그녀는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제안했다.
“강인 오빠. 나랑 같이 영화 들어갈래? 오빠 액션에 관심 있는 감독님이 많다고 들었어. 잘되면 나중에 집도 사고 차도 새로 사고….”
“됐어.”
“응?”
‘햇살 좋은 날’은 서둘러 찍어야만 하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나강인도 시간을 많이 뺏기지는 않았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통상적인 영화 제작에 참여하면 시간을 자유롭게 쓰기 어렵습니다. 임무 수행에 방해됩니다.
나강인도 안다. 그래서 거절했다.
“내가 좀 바빠.”
“얘들한테 들으니까 맨날 피시방에서 인터넷만 한다던데.”
“노는 거 아니다. 다 필요해서 하는 거야.”
“오빠가 진짜 필요한 곳은 충무로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