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제작 거점
영화감독 세 명과 드라마 PD가 배우 커플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감독이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쟤들이 결혼을 하긴 하네.”
“그러게. 둘이서 계속 비밀 연애만 하면서 살 줄 알았는데.”
“아. 쟤한테 ‘햇살 좋은 날’ 여주인공 제안이 들어왔는데 거절했다며?”
“그땐 다른 스케줄이 이미 픽스돼서 어쩔 수 없었다더라. 그래서 햇살 좋은 날이 마약파티 사건으로 망할 뻔했을 때는 쟤는 운이 참 좋다 싶었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천만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할 기회를 날렸지.”
“‘햇살 좋은 날’이 진짜 천만 넘을까?”
“어쩌면? 일단 오백만 관객을 넘는 건 확실하잖아.”
세 감독 중 한 명이 영화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그 영화는 시나리오나 영상은 손 감독 거니까 당연히 좋은데, 거기다 액션이 아주 결정적이었지. 로맨스나 로코만 찍던 손 감독이 액션까지 그렇게 잘 찍을 줄 누가 알았겠어?”
다른 감독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 액션이 그렇게 잘 나올 수 있었던 건 무술감독 덕분이라더라. 모든 액션씬의 동선부터 주인공 대역까지 그 무술감독이 혼자 다 해결했다던데?”
같은 테이블에서 어두운 얼굴로 스테이크를 먹던 드라마 PD가 물었다.
“그 정도예요?”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대단하지. 미리 짠 동선도 없이 현장에서 합을 맞춰보지도 않고 그냥 실시간으로 찍었대.”
“예? 그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는 그걸 해내는 모습을 직접 본 손 감독은 얼마나 놀랐겠냐? 그래서 손 감독이 그날 밤에 시나리오를 갈아엎었대.”
“어? 그럼 영화판에서 쪽대폰을 쓴 거예요?”
감독이 피식 웃었다.
“황당하지? 나도 처음엔 그 이야기 듣고 황당했다. 심지어 모든 액션씬은 ‘멋지게 싸운다.’ 한 줄밖에 없었다더라.”
“와….”
감탄하던 PD가 활짝 편 얼굴로 말했다.
“잘됐네요. 지금 우리 드라마에 액션이 조금 필요한데, 저도 맡겨볼까요?”
“좋지. 정 PD가 먼저 시켜봐서 이번에도 그림이 잘 나오면 나도 그 사람 좀 불러보자. 주먹질하는 씬이 몇 개 있는데, 시나리오 손봐서 화끈하게 싸우는 거로 바꿔보게.”
“그럼 제가 총대를 멜게요. 어디에 연락하면 돼요? 그 사람 소속사가 어디에요?”
감독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 그런 건 정 PD가 알아봐라. 방송국 정보력이 우리보다 좋잖아.”
“같은 영화 쪽이니까 감독님들이 전화 몇 통만 돌려보면 되지 않아요?”
“이미 영화사에 물어봤는데, 담당자가 연락처를 모르더라. 자기네가 사전에 섭외한 사람이 아니래.”
“맞아. 난 손 감독한테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봤는데, 자기가 적어놓은 번호가 잘못된 거 같다네?”
***
신은하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거실에는 스탠드형 전등 하나만 덩그러니 켜져 있었다. 그녀가 켜놓고 나간 그대로였다.
그 전등 하나로는 빛이 부족했다. 집안이 너무 어두웠다.
그녀는 집에 사람이 없을 때도 거실 불을 전부 다 켜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고 다니면 기자들이 이상한 기사를 쓸 것 같아서, 작은 스탠드형 전등 하나만 켜놓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집안이 환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현관부터 거실까지 전등 스위치를 전부 눌렀다. 집안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이제 좀 낫네.”
그녀가 세트장이 무너지는 곳에서 구출된 지 이제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다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때 상황이 꿈에 나타났다. 주로 무너진 잔해 속에 갇혀있는 꿈이었다.
꿈속의 그 공간은 너무 어두웠다.
어두운 집안에 들어올 때면 그 꿈 생각이 나서 무서웠다.
그녀는 결국 스케줄은 오늘까지만 소화하고 당분간은 쉬기로 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낫다.”
오늘은 나강인이 만들어준 밥도 얻어먹고 잡담도 하다 돌아왔다. 그런 후에 집에 들어왔더니 어두운 거실을 봐도 무섭지 않았다. 기껏해야 멈칫하는 정도였다.
“거기서 날 구해준 사람하고 있으면 그 악몽을 안 꿔도 되는 건가?”
진실은 알 수 없다.
“맞아. 테스트가 필요해. 내일은 온종일 붙어있어야겠다.”
***
장거리 정찰을 위해서는 차가 필요하다. 평소 기동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차는 사야 한다.
그래서 나강인은 중고차 시장을 찾았다.
신은하가 옆에서 불평했다.
“오천이면 새 차도 괜찮은 거 사는데.”
“너 요즘 바쁘다며?”
그녀가 방긋 웃었다.
“영화 다 찍었잖아. 당분간 휴식기야.”
“요즘 영화 홍보하러 다닌다더니?”
“우리 영화는 이제 굳이 내가 홍보 안 해도 날아가잖아. 음…. 아니다. 내가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도와주러 왔으니 얼마나 기특해?”
“그닥.”
그들은 전시된 차를 둘러보았다. 그중에는 외제차도 있었다.
신은하가 외제차 한 대를 가리켰다.
“와. 이 삼각별은 신형인데 중고로 나왔네. 이거 사. 이거.”
AI 전지인도 말했다.
- 더 적합한 차를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는 사람이 보였다. AI 전지인은 그 차를 추천했다.
나강인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차도 파는 겁니까?”
남자가 툴툴댔다.
“아뇨. 팔려고 가져왔는데 그냥 폐차하라네요. 이거 못 고친다고, 고쳐도 수리비가 판매가보다 더 많이 나올 거라고요.”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예.”
나강인이 보닛을 열었다.
AI 전지인이 엔진룸 내부를 스캔했다. AR 렌즈를 통해 가상의 커서가 엔진룸 내부를 빠르게 훑는 게 보였다.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런 차도 수리할 수 있냐?”
전투지원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전장에서는 다 부서진 차도 굴러가게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옛날 차도? 이거 지금 기준으로도 10년이 넘은 모델 같은데. 네 기준으로는 70년 이상 과거 모델이야.”
- 100년 전 차량까지 수리 매뉴얼을 갖고 있습니다.
“와. 널 만든 자연로보틱스는 박물관을 터는 경우까지 생각했나 보다.”
- 그렇습니다.
“진짜였냐?”
- 손의 임시 제어권을 요청합니다.
“써라.”
잠시 후에 AI 전지인이 차량 점검을 마치고 보고했다.
- 전기 계통의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동력 계통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수리가 가능하냐가 문제지.”
- 전기 배선을 다른 방식으로 설치해야 합니다. 추가 부품이 필요합니다.
“할 수 있다는 소리네.”
나강인이 남자에게 물었다.
“이 차 얼마에 파실 겁니까?”
“예? 정말 사시게요? 가다가 시동이 막 꺼지고 그러는데요? 엔진 소리도 되게 안 좋고요.”
“압니다. 폐차비보다는 더 드리겠습니다.”
- 차량 이전 서류작업만 이곳 매매상에 대행을 맡기십시오.”
“그래 주면 저야 좋죠. 하하하.”
신은하가 얼른 나강인의 팔을 잡고 옆으로 데려간 후에 속삭였다.
“강인 오빠. 저 차는 너무…. 돈 부족하면 내가 빌려줄까?”
“난 저 차면 충분해.”
“그럼 새 영화에 무술감독 자리 알아봐 줄까? 출연료 받으면 새 차를 살 수 있을걸?”
“아니. 저게 딱 적당해.”
***
나강인은 새로 산 폐차 직전의 중고차를 몰고 폐차장으로 향했다.
신은하가 옆자리에서 툴툴댔다.
“폐차를 사서 폐차장을 가네. 거긴 왜 가는데?”
“이 차를 고쳐야지.”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응? 차를 고칠 줄도 알아? 혹시 예전에 정비사도 했어?”
“자격증은 없어.”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네. 정비소에서도 못 고친 걸 직접 고치겠다는 거구나. 자격증도 없이. 폐차장에서.”
폐차장은 차에서 뜯어낸 부품을 팔기도 한다. 그 폐차장에는 카오디오나 사이드미러, 헤드라이트는 물론이고 다른 부품도 많았다.
나강인이 폐차장 진열대를 보았다. 쌓여있는 부품 위에 반투명한 윤곽선이 그려졌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해당 아이템이 모두 필요합니다.
“과소비 아냐?”
- 여기보다 싸게 구할 수 있는 곳은 쓰레기장밖에 없습니다.
나강인은 AI 전지인이 표시한 부품을 모두 현금으로 샀다. 그런 후에 그걸 차 트렁크에 넣었다.
그들은 세차장을 나왔다. 조수석에서 신은하가 물었다.
“저 고물들로 여기서 이 차를 고치는 거 아녔어?”
“더 사야 해.”
그는 공구상과 전기 재료상에도 들러 전선과 공구, 소형 전기 용접기를 샀다.
신은하가 투덜댔다.
“강인 오빠. 그거 다 쓸 줄은 알고 사는 거야?”
“너 안 가냐? 왜 온종일 따라다녀?”
신은하가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만큼 따라다니면서 도와줬는데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밥은 먹여야지!”
“너 도움 안 됐어.”
“쇳덩어리 들어야만 도와주는 건가? 옆에서 심심하지 말라고 계속 말 걸어줬잖아.”
“음… 짜장면?”
“어딜 그거로 때우려고!”
“다시 생각하니 라면도 과분할 것 같은데?”
메뉴가 라면 밑으로 떨어지자마자 신은하가 태도를 바꿔 공손히 말했다.
“강인 오빠. 밥 좀 해주세요.”
나강인의 차는 폐차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지만 그래도 도로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강인의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신은하는 나강인이 만든 요리를 먹으며 엄지를 세웠다.
“내가 이 맛에 오빠 곁을 떠날 수가 없다니까. 이렇게 맛있는데 심지어 공짜야!”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밥 정도는 그냥 사 먹으면 안 되겠냐?”
***
식사를 마친 후에 AI 전지인이 말했다.
- 차량을 수리할 장소가 필요합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하는 건 안 되겠지?”
-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어디 적당한 곳을 빌려야 하려나?”
- 장비 제작 거점으로 쓸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글씨로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 최근에 문을 닫은 소규모 철공소입니다.
“여기 빌리는 데 얼마나 드는데?”
- 최근에 확보한 예산으로 충분히 빌릴 수 있습니다.
눈앞에 지도도 떴다. 지도 위에 점이 하나 깜빡였다.
- 서울 외곽 외진 곳에 있어 이웃의 관심을 끌지도 않습니다.
“너 이런 건 언제 다 알아봤냐?”
- 확보 가능한 제작 거점 정보를 계속 수집했습니다.
“내가 멍때릴때 했구나.”
***
서울 북쪽은 산이 많다.
나강인이 새 거점으로 삼은 아파트에서 북쪽으로 가면 산이 나온다. 그 산 아래 외진 곳에 조그마한 철공소가 하나 있었다.
그 작고 낡은 건물은 원래 1층은 철공소로, 2층은 간단한 짐을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됐다.
1층 출입구에는 전자식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강인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잠금장치가 스르륵 열렸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덕분에 전등을 켜지 않아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보안 강화를 위해 창문을 개조해야 합니다.
나강인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내부가 확 밝아졌다.
“창문보다 여기 장비가 더 문제다.”
철공소 내부에는 망가진 낡은 절삭기계가 있었다. 다른 장비도 몇 대 더 있지만, 그중에 멀쩡한 건 하나도 없었다.
신은하가 따라 들어오며 물었다.
“강인 오빠. 여긴 어디야?”
“원래는 철공소였어. 여기 사장님이 오래 하다가 은퇴하면서 문 닫은 곳인데, 내가 당분간 쓰기로 하고 빌렸다.”
“언제?”
“좀 전에 전화로 이야기 다 끝냈어.”
신은하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말 저 똥차를 직접 고칠 거야? 그것도 여기서?”
- 이 시설을 완전히 인수한 후 장비 제작 및 개조 거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합니다. 현재 자금으로는 여기보다 나은 곳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절삭장비들은 모두 망가졌다. 장비 자체가 너무 낡아서 팔아봤자 고철값밖에 나오지 않는다.
여기는 산 바로 밑이고 이 주변에 사는 사람도 없다. 지역도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다. 서울 경계를 살짝 벗어난 곳이긴 하지만 땅값이 서울보다는 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과 건물, 망가진 장비 모두를 오천만 원으로 사진 못한다.
나강인이 입맛을 다셨다.
“돈이 모자라.”
신은하는 그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다.
“강인 오빠. 오천이면 새 차를 살 수 있잖아.”
“차 이야기가 아니야.”
“설마 여길 산다는 건 아니지? 여긴 진짜 투자가치가 제로인데? 진짜 아니지?”
“일단은 1년만 빌렸어.”
신은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다.”
“왜 네가 안심하냐?”
나강인이 철공소의 철문을 완전히 개방했다.
그런 후에 방금 몰고 온 차를 철공소 안쪽으로 조금 집어넣고 엔진룸을 열었다.
나강인이 장갑을 끼며 말했다.
“차 수리하는 거 구경이나 해라.”
“보조라도 할까?”
“그러다 손톱 깨진다.”
“응원이나 해야지.”
AI 전지인이 말했다.
- 수리 방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가 분해해야 하는 부품 위에 푸른 선이 둘려졌다. 그 옆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영상이 나타나 그 부품을 분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