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페넬로페
강남대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잘 만들어진 7층 건물이 있었다. 레스토랑 페넬로페는 그 건물의 7층을 사용했다.
그 건물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내부가 잘 꾸며져 있었다. 지하주차장은 상대적으로 커서 빈자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신은하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여기 꽤 유명한 곳인데, 혹시 알아?”
“몰라.”
그들은 일단 그 건물 2층 카페로 들어갔다.
“이 카페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 강인 오빠는 이쪽에서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봤나 보다.”
그는 데이트 자체를 한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그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한국 정부 전산망에 그의 주민등록정보가 들어있다는 건, 어쩌면 남들 같은 일상의 기록도 존재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내가 왜 2082년 지구연합군이 아니라 이 시대, 이곳에 있는지 모르니까.’
나강인이 일부러 말을 돌렸다.
“밥은 2층에서 사주려고?”
“에이. 설마. 여긴 배고파질 때까지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려고 왔지. 우리가 가려는 레스토랑은 7층에 있어. 원래 예약하기 쉽지 않은 곳이야.”
“예약을 언제 했는데?”
“어제 저녁때.”
“예약 어렵다며?”
신은하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강인 오빠. 나 배우야. 그것도 요즘 핫한 미녀 배우.”
“근데?”
“쳇. 반응이 영. 내가 여기 사장 셰프님이랑 전에 예능을 같이 찍었거든. 그때 직통번호를 받았지. 어제 전화해서 오늘 예약되냐니까 두 명 자리 정도는 만들어주겠대.”
그녀가 자랑했다.
“나니까 만들 수 있는 자리라고.”
나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새치기냐?”
“아니라고. 내가 부탁하니까 특별히 추가 예약을 받은 거라고.”
“이상한데?”
“다들 이렇게 하던데….”
나강인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제 예약한 건 누구랑 오려고 한 건데?”
신은하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나강인을 가리켰다.
“강인 오빠?”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
신은하가 말을 돌리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앗! 기왕이면 창가 자리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담당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 페넬로페입니다.
“저 신은하인데요. 오늘 저녁 예약 확인하려고요.”
직원이 예약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그녀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저녁에는 한 테이블당 한 팀만 받거든. 그래서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 네? 예약이 안 됐다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강인이 신은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은하가 흥분해서 조금 더 따졌다.
“어제 분명히 했거든요?”
- 네. 그렇게 확인되긴 하는데요. 저희도 사정이 생겨서….
조금 더 통화한 후에 신은하가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와.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와서 내 예약이 잘렸다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한 테이블 만들어준다고 큰소리쳤는데!”
“오늘 예약자 중에 네가 제일 자르기 쉬웠나 보다.”
“이 오빠가 지금 누구 편이야!”
“음…. 밥값 계산하기 전까지는 네 편이지.”
“그리고 오 셰프님은 내 예약을 잘랐으면 잘랐다고 연락은 해줬어야지!”
나강인이 제안했다.
“그건 그러네. 뭐, 됐다. 나가서 국밥이나 먹자. 내가 국밥에 소금은 엣지 있게 뿌려줄게.”
신은하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휙 넘긴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강인 오빠는 여기서 커피 마시면서 기다려. 내가 7층에 올라가서 따지고 올게. 얼마나 대단한 VIP가 오셨는데 요즘 잘나가는 날 이렇게 쳐내는지 구경이라도 해야겠어.”
신은하가 전투력을 잔뜩 높이며 카페를 나갔다.
나강인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여기 커피 맛있다.”
- 맛있습니다.
***
신은하는 7층에 도착하자마자 레스토랑 페넬로페에 들어가서 대표 셰프 오규철에게 항의했다.
“오 셰프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어제는 분명히 자리 있다면서요.”
오규철이 사과했다.
“은하 씨. 미안해요. 중요한 예약이 갑자기 잡혀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근데 왜 내 예약부터 자르는데요? 저도 진짜 중요한 자리라고 했잖아요. 다른 분들은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인데 예약이 살아있어요?”
“그게 아니라, 은하 씨가 손님 중에서 제일 늦게 예약한 사람이라서….”
“네?”
“그리고 그 자리는 은하 씨가 부탁해서 새로 테이블을 갖다놓고 임시로 만든 자리예요. 그러니까 은하 씨 예약은 정식 예약이 아닌데….”
“그, 그래요? 그럼 예약이 취소됐다고 말이라도 해주시지.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당연히 연락이 간 줄 알았어요. 우리 직원이 실수했나 봐요. 대신에 내일 다시 오면 내가 진짜 제대로 대접할게요.”
“내일이요?”
그녀가 나강인을 오늘 이곳에 데려올 때는 전등 스위치를 설치해줘서 고맙다는 핑계를 댔다.
“내일 또 오자고 하면 안 온다고 할 거 같은데….”
그 레스토랑에는 THO 엔터 사장 이태호도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그의 형 이태성과 통화했다.
“형 진짜 이러기야? 나보고 오늘 여기 예약 꼭 해야 한다고 해서 내가 어젯밤에 진짜 어렵게 잡았는데, 못 온다니?”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이 말했다.
- 야. 거의 다 도착했는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가는 중이야. 진짜 어쩔 수가 없다.
“그럼 나 혼자 여기서 먹나?”
- 제수씨 부르면 되잖아.
“스케줄 갔어.”
- 하여간 미안. 나중에 통화하자. 지금 바빠.
전화를 끊은 후에 이태호가 투덜댔다.
“난 혼밥은 취향이 아닌…. 응?”
이태호는 대표 셰프 오규철과 투덕대는 신은하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은하 씨?”
“어머. 이 사장님?”
“은하 씨 혹시 혼자 온 겁니까?”
“아뇨. 강인 오빠한테 모처럼 한턱내려고 했는데 제 예약이 잘렸대요.”
“잘됐네요.”
신은하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네?”
“아. 나도 밥을 혼자 먹게 생겨서 어쩌나 했는데, 합석하면 되겠군요.”
“아니, 그건….”
“둘보다 셋이 낫잖습니까? 하하하.”
신은하는 셋보다 둘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오규철에게 물었다.
“오 셰프님. 그래도 돼요?”
오규철이 활짝 웃었다.
“당연히 괜찮죠. 어차피 은하 씨 자리인데.”
“예?”
“아, 아닙니다.”
***
나강인은 그의 몫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금방 다 마셨다. 컵에는 어느새 얼음만 남았다.
신은하의 커피는 대부분 남아있었다. 나강인은 그녀가 남긴 커피잔을 들고 홀짝였다.
“남기고 가면 아깝잖아.”
- 변명이십니까?
“여기 커피 진짜 맛있다. 피시방에서 파는 것하고 뭐가 다른지 화학성분 분석이라도 해봐.”
- 정보 입력은 요원님의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 혀가 둔해서 뭐가 다른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닥치고 마시라고?”
-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꼭’이라는 부분에 감정이 담긴 것 같다.”
나강인이 신은하의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니까.
AI 전지인이 물었다.
- 진심으로 고급 레스토랑 풀코스 요리보다 국밥을 더 원하십니까?
“아니. 예의상 한 말이지.”
- 예의가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넌 버그가 있는 거 같다. 부관이 오늘따라 막 개기네?”
***
신은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국밥은 무슨. 자리 잡았으니까 당장 올라오라고 해야겠….”
갑자기 레스토랑 문이 벌컥 열렸다. 문앞에 있던 직원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직원을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복면 괴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신은하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복면 괴한의 우두머리가 사람들을 쓱 둘러보더니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꺼냈다. 그는 권총을 앞으로 쭉 뻗고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벽에 걸린 장식물에 총알이 퍽퍽 박혔다.
손님 몇 명이 상황을 깨닫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꺅!”
“허억!”
무장 복면 괴한의 우두머리가 권총의 총구를 세워 입을 가리며 말했다.
“쉿. 지금부터 소리 지르는 놈은 쏴버린다. 입 닥치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저쪽 구석으로 가.”
총을 보고 겁을 먹은 사람들이 괴한들이 시키는 대로 구석으로 이동했다.
***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강인이 툴툴댔다.
“역시 자리 만드는 덴 실패한 것 같지? 이러다 진짜 국밥 먹으러 가겠는데?”
- 신은하 씨에게 실망했습니다.
“나도 실망했다. 엄청 맛있다는 요리를 못 먹어서.”
갑자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이상 상황이 감지됐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나강인이 즉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 상황을 확인하며 물었다.
“보고해.”
- 요원님의 스마트폰이 통화권을 이탈했습니다.
스마트폰은 평소에도 통화권 이탈이 잠깐 뜰 수 있다. 그 원인은 다양하다.
“다른 이상 상황은?”
***
이태호가 신은하에게 속삭였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저놈들에게 휴대폰 통신을 방해하는 장치가 있는 것 같군요.”
그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그런 것도 있어요? 혹시 첩보원들이 쓰는 그런 장비예요?”
“아니요. 돈만 주면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는 있습니다. 민간인이 허가 없이 쓰는 건 당연히 불법이지만.”
***
나강인이 물었다.
“다른 이상 상황은?”
- 건물 1층 셔터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강인이 카페 바닥을 보았다. 당연히 콘크리트 바닥 때문에 1층 상황이 직접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AR 렌즈에 1층 상황을 재현한 반투명 홀로그램 영상이 떴다. 영상 속 방화 셔터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 소음을 분석하여 방화 셔터의 현재 상태를 예측해 표시했습니다.
“셔터 소리를 증폭해.”
AI 전지인이 나강인이 들은 소리에서 특정 소음만 골라 증폭했다. 방화 셔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확실했다.
“1층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도 들어보자.”
전지인은 나강인이 귀로 들은 소리를 분석해서 음성만 골라내 증폭했다. 워낙 작은 소리를 억지로 증폭했기 때문에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 상태가 그나마 나은 음성 4개를 해석해 재구성했습니다. 해석에 오류가 있으면 실제 대화와 다를 수 있습니다.
잡음에 가깝던 음성이 선명하게 바뀌었다.
- 뭐야? 셔터가 왜 내려가?
- 건물에 불 난 거 아냐?
- 아니야. 사이렌이 안 들리잖아.
- 고장 났나?
나강인이 말했다.
“1층에 내려가서 확인해야겠다.”
갑자기 전지인이 빠른 목소리로 경고했다.
- 2층에 무장 병력 확인!
2층 카페 바깥쪽에서 사람 형태의 외곽선 세 개가 나타났다.
- 적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소음으로 위치를 예측했습니다.
“적의 무장 상태는? 칼 든 놈 셋 정도는 그냥 잡으면 되잖아.”
- 총기 장전음을 확인했습니다.
“지금 시대의 한국에서 총?”
- 후퇴하셔야 합니다. 적 돌입까지 10초!
“어디로 가라는 거냐? 여기는 입구 외에는 탈출구가 없어.”
- 카페 유리창을 부수고 뛰어내리십시오.
***
신은하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근데요. 저 여기 강인 씨랑 같이 왔거든요? 강인 씨 지금 2층에 있는데.”
이태호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이 건물에 있다고요?”
“네. 제가 저놈들에게 잡힌 걸 알면 강인 씨가 가만있지 않겠죠? 강인 씨 엄청 잘 싸우잖아요.”
이태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총 앞에서는 평등합니다. 나강인 씨가 은하 씨를 구하려고 저놈들하고 싸우면 죽어요.”
신은하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아, 안 오겠죠? 나 구하러 안 오겠죠? 오면 안 되죠?”
“물론입니다. 저라면 당장 이 건물을 빠져나갈 겁니다.”
***
나강인이 말했다.
“민간인 구출은 지구연합군의 기본 임무잖아.”
-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후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