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37화 (37/411)

37. 접속코드

AI 전지인은 굉장히 빠르게 말할 수 있지만 나강인은 아니다. 나강인과 AI 전지인이 대응계획을 놓고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10초가 지났다.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쓴 사람 세 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셋 다 권총으로 무장했다. 권총의 앞에는 길쭉한 원통이 붙어 있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놈이 권총을 흔들며 외쳤다.

“움직이지 마! 손 들어!”

여기가 총기 소유가 쉬운 미국이라면 사람들은 총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리겠지만, 여긴 한국이다.

한국에서 권총처럼 생긴 물건을 누가 들고 있으면 그건 높은 확률로 가짜다. 이런 곳에서 사람들을 위협하려면 권총보다는 시퍼런 칼날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권총을 보고 몸을 움츠린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일행과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뭐야? 쟤들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야?”

“개그맨 아냐? 인터넷용 개그 프로 찍나?”

“누가 오늘 고백하나?”

“이 카페 이벤트 화끈하게 하네.”

휴대폰을 들어 그들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

“어? 왜 통화권 이탈이야?”

“와이파이도 안 되고 데이터도 안 되는데?”

가장 앞에 서 있던 복면인이 권총을 위로 들어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겨누었다.

“이 새끼들아! 내가 분명히!”

그가 화를 내며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났다.

발사된 총알이 천장의 전등을 박살 냈다. 권총 발사음보다 전등이 박살 나는 소리가 더 컸다.

유리로 만든 전등이 터지면서 불꽃과 함께 파편이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한국에서는 진짜 권총을 볼 일이 없다뿐이지, 총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곧바로 비명이 터졌다.

“꺄악!”

“지, 진짜 총이다!”

전등을 부순 복면 괴한이 사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소리를 질렀다.

“손들라고 했잖아! 다 뒈지고 싶냐!”

사람들이 다급히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강인도 적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남들처럼 손을 들며 지시했다.

“적 무장 확인해.”

즉시 눈앞에 무기 정보가 주르륵 떴다.

AI 전지인이 음성으로도 보고했다.

- 9mm 반자동권총에 고성능 소음기가 장착됐습니다. 총탄은 아음속 저소음탄입니다. 총기 본체에 약실소음감소용 추가 모듈이 붙어 있습니다.

“장비 화려한 거 봐라. 그냥 강도는 아니란 소리네.”

한국에서 권총을 구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소음기에 추가 소음 감소 모듈까지 장착된 권총을 그냥 강도가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AI 전지인이 먼저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 요원님은 현재 보유 장비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적의 무장이 요원님보다 강력합니다. 적이 발사한 총알이 정확히 전등 중앙에 명중했습니다. 적은 무기 사용이 능숙합니다.

그런 후에 제안했다.

- 기존 예측보다 적의 전력이 강합니다. 화력 차이가 너무 큽니다. 이곳에서 탈출하셔야 합니다.

“후퇴는 없다니까.”

- 전술적으로 좋은 판단이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나강인이 위쪽을 슬쩍 보았다.

“은하가 7층에 가서 안 오잖아. 거기가 여기보다 먼저 점령됐다고 봐야지.”

***

신은하는 7층 레스토랑 페넬로페에 있었다. 그곳도 무장 괴한들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상대가 칼을 든 악당이면 나강인을 믿고 기다리겠는데, 총을 든 놈들이 나타났다. 그녀와 나강인은 서로 알게 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태호에게 물었다.

“강인 오빠는 진짜 여기로 안 오겠죠?”

“물론입니다. 오면 총 맞습니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데요?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복면 괴한들에게 붙잡힌 외국인 여자를 슬쩍 보았다.

복면 괴한 우두머리는 외국인 여자를 붙잡아놓고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복면 괴한들도 사람들을 구석에 몰아넣은 후에는 그 여자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태호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놈들은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저 여자가 놈들의 목표입니다.”

“저 여자가 누구인데요? 어디 외국 장관이라도 돼요?”

“오메가테크의 사장 겸 연구 총책임자입니다.”

“오메가? 그게 어딘데요? 영양제 만드는 회사예요?”

“미국 회사입니다. 첨단기술로 유명한.”

신은하가 아는 미국 첨단기술 회사는 몇 개 없다.

“아. 사과 회사나 검색엔진 회사 같은 거요?”

“지금 은하 씨가 생각하는 그런 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유명하죠. 각종 장비와 로봇, 그리고….”

오메가테크는 군대에서 쓰는 무기를 연구한다.

이태호의 아버지는 군대와 경찰용 장비를 만드는 철인기공의 사장이다. 그의 형 이태성은 철인기공의 본부장이다.

본부장 이태성은 오메가테크의 사장 스칼렛 켈리가 이 레스토랑에서 오늘 식사한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THO 엔터의 사장인 이태호에게 예약을 부탁했다. 그게 어젯밤이었다.

THO 엔터는 영화와 공연계에서 알아주는 회사다. 사장인 이태호는 당연히 연예계에 연줄이 많다.

이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사장이자 대표 셰프 오규철은 방송 출연을 종종 하는 사람이다. 오규철도 연예계와 엮여 있다.

중요한 일이라는 이태성의 말을 믿은 이태호는 인맥을 동원해 오규철에게 부탁했다. 오규철은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페넬로페의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태호가 불평했다.

“어제 여길 예약하라고 한 건 형인데, 나만 붙잡혔네.”

신은하는 멈칫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사장님도 어제 여길 예약하셨어요?”

“네.”

“몇 시에요?”

“여덟 시쯤….”

“난 일곱 시인데, 나보다 늦게 했네요?”

신은하는 왜 그녀의 예약이 잘렸는지 깨달았다.

“와. 그럼 내 예약을 잘라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이태호 사장님이에요? 세상에. 강인 오빠 출연료 후려칠 때도 설마 했는데, 역시….”

“어? 어? 아. 그랬습니까?”

“예약이 살아있었으면 난 지금 강인 오빠랑 2층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었을 거예요. 내가 지금 이 사태에 휘말린 게 다 이 사장님 때문이네요?”

이태호가 얼른 말을 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우린 지금 총을 든 놈들에게 잡혀 있습니다.”

“아. 그쵸. 이게 다 이 사장님 때문이지만.”

“은하 씨는 보기보다 겁이 없나 봐요. 이 상황에서 그걸 따지게.”

“무너지는 세트장을 경험하고 나니까 간이 저절로 커졌어요.”

그리고 나강인과 어울려 다닌 날은 어지간한 건 무섭지 않았다.

“지금 은하 씨 혼자만 표정이 밝은 거 같은데….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럼요. 왜냐하면요.”

그녀는 첨단기술이나 군대와는 상관없는 연예인이다. 그녀가 무장 복면 괴한들을 슬쩍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무기상인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트러블인 거네요?”

이태호가 정정해주었다.

“스칼렛 켈리는 은하 씨가 생각하는 그런 무기상인이 아니라 오메가테크의 연구 총책임자입니다. 공학자 출신 사장이거든요.”

그녀가 도로 물었다.

“그래도 우린 상관없는 거죠? 그쵸?”

이태호는 영화계 사람이지만 그의 집안은 군과 경찰용 장비를 만든다. 그래서 무기 업계의 분위기를 조금은 안다.

“우린 상관없었으면 좋겠는데….”

신은하가 투덜댔다.

“예약만 살아있었으면 난 지금 2층에 있었을 테니까 진짜 상관없었을 텐데.”

“은하 씨. 예약 가로챈 건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하니까 제발 그만.”

***

2층 카페에 쳐들어온 복면 무장 괴한들이 권총을 흔들며 카페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휴대폰 전부 빼앗아. 하나라도 빼먹으면 빼먹은 숫자만큼 몸에 총알을 박아버릴 테다!”

겁먹은 직원들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휴대폰을 거뒀다. 그들은 정말 총에 맞을까 봐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휴대폰이 통화 불가능 상태다. 손님들도 순순히 휴대폰을 내놓았다.

무장 괴한들은 휴대폰을 빼앗은 후에 사람들을 안쪽으로 몰아넣었다.

“유리벽 쪽에 가서 밖에다 구조 요청이라도 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부터 쏴버릴 거니까, 허튼수작하지 마라.”

이 카페의 유리에는 색이 들어있다. 그래서 밖에서는 카페 내부가 원래 잘 안 보인다. 안에 있는 사람이 구조 요청을 하려면 유리에 바짝 붙어야 한다.

총을 든 놈들 앞에서 그러는 사람은 없었다.

1층에 있던 몇 명도 2층 카페로 끌려왔다. 무장 복면 괴한들은 그 사람들도 카페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

7층 레스토랑에 나타난 무장 집단 우두머리의 별명은 자칼이다. 자칼이 오메가테크의 사장 스칼렛 켈리에게 제안했다.

“접속코드만 말하면 살려준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잖아?”

스칼렛이 우두머리에게 도로 제안했다.

“얼마야? 네가 받기로 한 돈이 얼마이든, 그 두 배를 주지. 아직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서로에게 좋아.”

자칼이 피식 웃었다.

“거절한다. 몇 푼 더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서.”

스칼렛이 독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도 거절한다. 설사 날 고문한다고 해도 접속코드는 말할 수 없어.”

“정말 그런지 천천히 확인해보자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동안 한국 경찰이 가만히 있을까?”

자칼의 웃음소리가 복면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린 이미 이 건물의 통제실을 완전히 장악했다. CCTV와 기타 보안시설도 모두 파괴했다. 유선전화도 다 끊었고.”

자칼이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켠 후에 흔들어 보였다.

“당연히 휴대폰 통신도 차단했지.”

스칼렛이 상대를 째려보며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지?”

자칼이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이 복면을 왜 썼겠어? 인질을 살려줬을 때 경찰이 내가 누군지 모르게 하려고 쓴 거야. 그런데 내가 누군지 밝히라고? 이걸 벗을까? 내 얼굴을 본 놈은 다 죽는다. 그걸 원하나?”

스칼렛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진짜다.”

자칼이 권총으로 스칼렛을 쿡쿡 찔렀다.

“살고 싶으면 접속코드를 말해. 내가 이 복면을 쓰고 있을 때 말해야 네가 산다.”

스칼렛이 잠시 고민했다.

그녀의 옆에는 비서인 제시카가 쓰러져 있었다. 제시카는 처음 총이 발사됐을 때 놀라서 넘어지다 의자에 머리를 부딪쳐 기절했다.

스칼렛이 제시카를 가만히 보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메테우스, 우로보로스, 판도라. 3단계의 접속코드를 인증 단계마다 순서대로 입력해야 해. 말했으니까 약속을 지켜.”

우두머리가 씩 웃으며 단거리 통신용 무전기를 들었다.

“확인부터 하고.”

스칼렛은 당황했다.

“자, 잠깐. 이 건물의 유무선 통신을 모두 끊었다며!”

“건물 밖에서 대기하는 부하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하나? 그런데 말이야. 방금 그 접속코드가 가짜면 내가 화가 많이 날 거야. 그럼 저기 구석에 모아놓은 사람 중에 몇 명은 죽겠지.”

우두머리가 권총의 총구를 비서 제시카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아니면 이 여자부터 죽여야 하나?”

당황한 스칼렛이 다급히 말했다.

“거, 거짓말이다. 확인하지 마라!”

자칼이 실실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접속코드가 너무 쉬웠거든. 숫자라도 좀 섞지 그랬나? 그럼 혹시나 했을 텐데.”

자칼이 권총을 구석에 몰린 사람들 쪽으로 향하며 물었다.

“자. 연습게임은 여기까지. 진짜 접속코드는? 네 비서도 살리고 저 사람들도 살려야지?”

스칼렛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민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오메가테크가 연구 중인 기밀 무기 기술이 테러리스트에게 넘어가면 대량 학살이 일어날 수도 있다.

오메가테크의 사장 스칼렛 켈리가 이를 악물었다.

“나, 날 죽여도 말해줄 수 없다.”

자칼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크지 않았다. 권총에 소음기를 끼고 약실소음감소모듈도 추가로 붙인 데다가 총탄도 아음속 저소음탄을 썼기 때문이다.

총알이 날아가 와인이 진열된 장식장을 뚫었다.

장식장의 유리가 잘게 부서져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충격으로 와인도 여러 병이 떨어져 박살 났다. 레스토랑 바닥에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흘렀다.

소음권총의 총소리보다 유리가 부서지고 와인병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더 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신은하도 마찬가지였다.

“꺄아악!”

자칼이 스칼렛에게 말했다.

“건물 셔터가 내려가거나 전화가 끊어진 것만으로는 아무도 신고하지 않아. 직접 방문한 사람은 내 부하가 1층에서 돌려보낼 거야.”

자칼이 낮게 웃었다.

“우린 시간이 아주 많아. 총알도 많고. 넌 결국 접속코드를 말하게 될 거다.”

스칼렛은 절망했다. 구출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위쪽에서 발생한 이상 소음을 감지했습니다. 소음권총의 총격으로 유리가 파손됐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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