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페넬로페 II
나강인이 무전기에 사용한 목소리는 이태호가 계단을 내려올 때 바로 뒤에서 계속 떠들던 놈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나강인이 설명했다.
“성대모사 하는 연예인 많이 보셨잖아요. 아까 1층과 2층에 이상이 없다고 대답한 것도 접니다. 그땐 이미 아래층 정리가 끝났을 때였죠.”
이태호는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강인 씨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상황 분석, 전투, 사격, 대응 모두 와…. 혹시 집에 특수부대 군복이 쫙 걸려 있는 거 아닙니까?”
나강인은 특수부대 군복을 한 벌 갖고 있긴 하다. 그런데 그건 2082년 지구 연합의 전략 특수군 군복이다.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은하는 괜찮습니까?”
“예. 제가 내려올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이태호가 정보를 추가로 제공했다.
“아! 놈들이 은하 씨를 특별관리하려는 것 같더군요.”
AI 전지인이 그 이유를 추정했다.
-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인질의 가치가 높습니다. 신은하는 최근 개봉한 영화의 성공으로 이전보다 더 유명해졌습니다. 최고의 인질입니다.
나강인이 인상을 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괜찮은 상황이 아니잖아.”
이태호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나강인 씨. 싸우기 전에 저를 복도 쪽으로 부른 거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사장님이 놈들과 같이 있다가 전투에 휘말려 총이라도 맞으면요. 민지가 절 때릴 겁니다. 그래서 전장 바깥으로 먼저 빼돌렸습니다.”
이태호는 나강인의 농담을 들으며 그때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복도에서 날 부를 때의 그 모습은 정말….’
자연스러웠다. 나강인의 목소리만 들으면 이태호를 여기서 만나서 놀란 것이라고 착각할 만했다. 실제로 복면 괴한 넷은 나강인의 목소리 연기에 속았다.
그런데 이태호는 그때 착각하지 않았다.
나강인의 표정과 손짓은 입에서 나온 말과 달랐기 때문이다.
나강인은 조용히 그의 뒤쪽으로 오라는 뜻을 표정과 손짓만으로 표현했다. 입에서 나온 말보다 그 표정과 손짓이 더 확실히 메시지를 전달했다.
게다가 나강인은 방금 한 번 들은 사람의 목소리와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서 적을 속였다. 그런 걸 아무나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태호는 깨달았다.
‘연기력! 나강인 씨는 연기를 잘해! 아주 잘해!’
손태민 감독은 다음 영화도 나강인에게 무술감독을 맡기고 싶어 했다. 나강인에게 연기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작은 배역이라도 맡기겠다고 했다.
그런데 좀 전에 보여준 나강인의 연기력은 손태민과 이태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나강인 씨. 조금 전에 복도에서 연기하신 것 말입니다. 만약 여기가 오디션장이었다면 전 진짜 박수를 쳤을 겁니다.”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그럴 정도입니다. 인질 구출 프로토콜에 의해 요원님의 표정과 손짓 연기를 ‘제가’ 보조했습니다.
복도에서 이태호를 부를 때 말을 하고 표정을 지은 건 나강인이다. 그런데 그 표정의 디테일한 부분은 AI 전지인이 보조했다. 손짓도 마찬가지였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이런 자랑은 광고하고 느낌이 조금 다른데, 자랑도 혹시 기본 옵션이냐?”
- 아닙니다. 자연로보틱스의 신체삽입형 AI는 인간과 유사한 사고 체계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개체별로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너처럼 자랑을 많이 하는 건 개성이다?”
- 비교 대상 AI가 없어 제가 더 많이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강인이 중얼거리며 쓰러진 놈들의 권총과 탄창을 챙겼다.
“그러시겠지. 근데 난 알 거 같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적의 방탄복이 재사용 가능합니다.
“이젠 말도 돌릴 줄 아네?”
- 피탄되지 않은 방탄복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래층 놈들은 방탄복이 없었는데, 이놈들은 있어. 장비가 달라. 이놈들은 새로 모집한 용병이 아니거나, 아래층보다 상급 용병일 거야.”
그는 두 놈의 방탄조끼를 벗겨 이태호와 하나씩 나눠 입었다.
“이제 은하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이태호가 얼른 제안했다.
“저한테 권총을 주시면 제가 같이 가서 싸우겠습니다.”
“권총은 좀 다룹니까?”
“저 현역으로 제대했습니다. 예비역 육군 병장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보직이?”
이태호는 멈칫했다.
“그게, 국방부 홍보부대에서….”
나강인이 권총 한 자루와 탄창을 넘겨주었다. 다른 권총은 복도에 치워놓았다.
“됐으니까 이 사장님은 여기서 이놈들을 감시하시죠.”
“아, 예.”
나강인은 이태호에게 위층 정보를 조금 더 물어본 후에 계단을 올라갔다. 이태호는 그가 계단 중간 꺾인 곳을 지나가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나강인 씨에게 연기력까지 있는 걸 손태민 감독이 미리 알았다면 햇살 좋은 날의 시나리오를 더 바꿨을까? 어쩌면 임팩트 강한 조연이라도 하나 만들어냈을지도 모….’
갑자기 옆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이태호는 깜짝 놀라 옆으로 휙 돌아섰다. 팔다리에 총을 맞고 기절했던 놈이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이태호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권총 총구가 적을 향한 상태였다.
실수로 방아쇠가 당겨졌다.
약실에서 화약이 폭발하며 소음 권총에서 총탄이 한 발 발사됐다. 아음속 저소음탄이라 총소리는 작았지만 손에 느껴지는 반동은 생각보다 컸다.
총구에서 작은 총탄이 튀어나가 막 깨어나 움직이려던 놈의 몸통에 퍽 박혔다.
“켁!”
이태호가 총으로 적을 겨눈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나강인이 계단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태호가 얼른 말했다.
“저, 저 새끼가 움직이길래 쐈…. 어? 내, 내가 사람을 쐈어?”
이태호의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내가 사람을 죽였….”
나강인이 말했다.
“안 죽었습니다. 그 특수탄은 관통력이 약해서 저런 얇은 방탄조끼조차 못 뚫더군요. 그냥 충격으로 다시 기절한 겁니다.”
이태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 죽었군요.”
나강인이 조언했다.
“머리를 쏴야 한 방에 죽습니다.”
“모, 몸통만 열심히 쏘겠습니다.”
***
7층에는 복면 괴한 두 명이 대부분의 인질을 통제했다. 반자동권총 두 자루면 비무장 민간인 수십 명을 통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래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긴장했다.
“뭐지?”
“한국 경찰이 벌써 올라온 건 아니겠지?”
그 대화를 들은 인질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 레스토랑의 사장이면서 셰프인 오규철이 속삭였다.
“경찰이 왔나 봐.”
레스토랑 홀 책임자도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한민국 만세!”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도로 어두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복면인 중 하나가 무전기로 상황을 확인한 후에 동료에게 말했다.
“5층을 수색할 때 두 놈을 놓쳤대. 그놈들을 잡느라 시끄러웠던 거다.”
“하여간 새끼들이 일 대충 한다니까.”
오규철이 울상을 지었다.
“경찰 아니란다.”
“우린 망했네요.”
레스토랑 내부에서는 계단 쪽이 보이지 않았다. 복면인 둘은 레스토랑 출입구에 서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둘이 거의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급히 권총을 들었다.
소음권총 발사음이 연달아 들렸다. 두 놈의 몸통에 총탄이 퍽퍽 꽂혔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어 뚫리진 않았지만, 총탄에 맞을 때마다 그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총탄이 허공의 먼지를 뚫고 지나갈 때마다 가늘고 긴 궤적이 남았다. 총에 맞은 적이 뒤로 더 밀려났다. 그렇게 꽂히는 총탄이 한두 발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적의 몸에 투명한 화살 여러 발이 연달아 꽂힌 것처럼 보였다.
총탄이 방탄조끼에 박힐 때의 충격 때문에 적들은 제대로 반격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레스토랑 안쪽으로 쭉쭉 밀려났다.
셰프 오규철이 놀라서 외쳤다.
“뭐, 뭐야! 뭐야!”
한 놈이 뒤로 밀려나면서 억지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정면으로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복도 천장 쪽에서 나강인이 날아왔다. 총탄은 그의 발밑으로 지나갔다.
나강인이 공중을 날아 적의 가슴에 발을 콱 내질렀다.
적은 카페 안쪽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나강인은 적을 걷어찬 반동을 이용해 점프했다.
다른 놈이 급히 나강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강인이 레스토랑의 장식물을 걷어차고 더 높이 뛰었다.
적이 권총을 높이 들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천장에 퍽퍽 박혔다. 천장 조명도 총에 맞아 터졌다.
명중탄은 하나도 없었다.
나강인은 순식간에 적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적이 권총을 위로 번쩍 들었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적의 손목을 잡아챘다.
적의 오른팔이 나강인이 날아가는 쪽으로 끌려갔다. 팔이 끌려가면서 몸도 뒤로 뒤집혔다.
나강인이 바닥에 착지했다.
적의 손목은 이미 부러졌다. 권총도 이미 손에서 빠져나갔다.
적은 허리가 뒤로 꺾인 채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적의 왼손이 바지 주머니에 닿았다.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경고 표시를 띄우며 빠르게 말했다.
- 폭탄 격발장치 경고!
나강인이 적의 다리를 차며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적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는 적의 상체를 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나강인이 기절한 적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물건을 꺼냈다.
“야. 넌 이게 폭탄 격발장치로 보이냐?”
주머니에서 잭나이프가 나왔다.
- 폭탄 기폭장치를 작동시킬 때와 유사한 동작이었습니다.
“우리 지인이가 알고 보면 아주 허당이야.”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다가, 구조대가 왔다는 걸 깨닫고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강인은 그들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재빨리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쉿.”
사람들이 급히 입을 막았다. 그래도 환성이 작게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울먹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강인이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구출한 인질 중에 신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대표 셰프 오규철이 얼른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놈들이 신은하 씨와 외국인 여자, 그리고 이태호 씨를 데려갔습니다.”
“복면이 몇 놈 더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몇 놈입니까?”
“제가 본 건 신은하 씨와 외국인을 데려간 쪽에 네 놈, 이태호 씨를 데려간 쪽에 네 놈입니다. 레스토랑 밖에 누가 더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6층까지는 나강인이 확인했다. 이태호와 같이 내려가던 넷은 그가 처리했다. 다른 넷이 갈 곳은 7층 구석과 옥상밖에 없다.
그는 방금 빼앗은 잭나이프를 챙기고 권총 두 자루의 탄창도 갈아 끼웠다. 기절한 두 놈의 방탄조끼도 벗겼다.
그런 후에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아래로 내려가세요. 5층 계단에 있는 사람은 아군입니다. 2층에 있는 사람들도 아군이니 합류하세요.”
오규철은 이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대표다. 그는 여기서 일어난 일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권총을 주시면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나강인이 오규철을 보며 작게 말했다.
“이 사람이 적과 내통했을 수 있을까?”
- 레스토랑 직원 중에 누군가가 적과 내통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정보를 팔아먹을지도 모르지.”
그는 이 레스토랑에 있는 사람에게 무기를 넘겨도 된다는 확신이 없었다.
나강인이 7층에서 입수한 권총 두 자루를 분해해 격발장치를 빼내며 말했다.
“총탄을 피할 자신이 있으면 같이 가시든가.”
“예?”
“방금 싸우는 거 봤을 텐데요?”
오규철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생각해보니 여기가 제 자리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레스토랑을 두고 어디 가겠습니까?”
***
대표 셰프 오규철이 사람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5층 계단 중간에서 이태호를 만났다.
오규철은 사람들을 먼저 내려보낸 후에 호들갑을 떨었다.
“이태호 사장님! 그렇게 끌려가셔서 큰일 난 줄 알았습니다.”
이태호는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오는 걸 보고 긴장했다가 오규철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제가 큰일 난 줄 알았습니다. 강인 씨 아니었으면 정말….”
“어? 방금 우리를 구해준 그분이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이태호가 자랑했다.
“알죠. 제가 강인 씨와 같이 이런 일 겪는 게 처음이 아닙니다. 하하하.”
오규철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분 정체가 도대체 뭡니까? 특수부대 요원입니까? 아니면 첩보원?”
“정체는…”
나강인이 누군지 말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태호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밥차 아저씨죠.”
“예?”
“안 믿어지시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 하하. 와. 진짜 아직도 안 믿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