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총권도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현장에서 총을 많이 쏘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나강인이 도로 물었다.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고 적의 총을 빼앗아서 좀 쐈는데, 그게 죄가 됩니까?”
형사가 두 손을 흔들었다.
“어이구. 아니죠. 누가 감히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오늘 그 건물에서 사상자가 대량으로 나왔으면 관할 경찰서는 물론이고 서울지방경찰청에도 옷을 벗는 사람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부상자라고는 약에 당해 기절한 경비원 한 명과 팔에 총을 맞은 외국인 한 명밖에 없다. 그 외국인이 입은 총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경찰의 대응도 빨랐다. 사건 초반에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즉시 건물을 포위했다. 이후에도 지원병력이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자칫하면 여러 명이 옷을 벗을 뻔한 사건이, 순식간에 표창장이 쏟아져나오는 개꿀 사건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경찰은 나강인에게 호의적이다.
“선생님이 총을 쏘긴 했지만 죽은 놈도 없는데요.”
나강인이 적과 싸우다 몇 놈 죽였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러면 경찰이 그냥 적당히 넘어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나강인은 적을 모두 산 채로 잡았다.
총알을 몇 발씩 박아넣은 놈도 있고 대놓고 팬 놈도 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형사가 물었다.
“너무 대단하셔서,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선생님이 영화 무술감독이시란 말은 들었습니다만, 목격자 증언을 들어보면 오늘 아예 날아다니셨던데요.”
“날지는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능력이 있으신 겁니까? 제가 듣기론 특수부대 출신도 아니시던데….”
AI 전지인이 눈치 빠르게 핑곗거리 리스트를 눈앞에 띄웠다.
- 잠입 침투 작전 교범에 첨부된 ‘급할 때 쓰는 변명거리’ 리스트입니다. 마지막 항목은 교범에는 없지만 제가 추가했습니다.
나강인이 다섯 개의 항목 중에서 AI 전지인이 추가한 마지막 것을 골랐다.
“2년 정도 제가 세상에 나오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경찰은 이미 그것도 조사해서 알아냈다. 하지만 그때 나강인이 뭘 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 기간에는 휴대폰이나 신용카드 사용 기록조차 없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때 산속에서 수련했습니다.”
“예?”
AI 전지인이 제안한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강인이 만들어내야 한다.
“무술을 수련했죠. 폭포수 밑에 온종일 앉아있던 추억이 생각나는군요. 그 폭포가 물이 참 맑았는데.”
형사는 당황했다.
“그, 그러니까 무술 수련을 하러 산에 들어가셨다? 지난 2년 동안?”
“그렇죠. 태백산맥을 돌아다니면서 수련했습니다. 그러다 가끔 산삼도 캐서 먹고요.”
“아니, 그러면 총은요? 권총을 엄청나게 잘 쏘셨던데요. 군대는 행정부대를 나오셨으니까 권총을 쏠 일이 거의 없으셨을 텐데요?”
거짓말도 하다 보니 술술 나왔다.
“제가 깨달음을 얻어 만든 무술은 총도 쏩니다.”
“예?”
“무술 이름은 총권도입니다.”
“초, 총권도요?”
“비비탄 총으로 열심히 연습했는데, 오늘 쏴보니까 진짜 총으로도 되더라고요. 이런 게 재능의 힘인가?”
“예?”
***
건물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다. 경찰이 피해자를 계속 잡아둘 순 없다.
경찰은 신원확인을 확실히 한 후에 모두 돌려보냈다.
경찰은 그들을 보내면서 수사 중인 사건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현장에서는 다들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닌데, 그 많은 사람이 모두 경찰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리 없다.
인터넷에 목격담이 속속 올라왔다.
- 오늘 강남 건물 7층 테러 사건 아시는 분? 형이 오늘 거기 2층에서 직접 본 쩌는 이야기 해줄 테니까 다 모여봐요.
- 님 진짜임? 진짜 거기 있었음?
- 당연하죠. 진짜 쩔었습니다.
다른 목격자도 댓글을 썼다.
- 님도 거기 계셨구나. 근데 7층이 더 쩔었습니다.
2층과 7층에서 구출된 사람들이 서로 누가 더 대단한 걸 봤는지 싸우기도 했다.
- 2층 카페에서 총든 놈 셋을 상대로 진짜 바람처럼 휘몰아쳤다니까요?
- 어디선가 총탄이 레이저처럼 연발로 날아와 놈들의 몸통에 퍽퍽 꽂히는 모습을 보면, 7층 레스토랑 전투가 최고였다는 걸 인정하실 텐데.
- 카페에선 놈들을 칠 때마다 그놈들이 날아가 탁자를 부수면서 처박히더라니까요?
- 레스토랑에서는 총탄부터 박아넣고 공중 옆차기로 날려버렸습니다만?
- 레스토랑에서는 총이 있으셨으니까 더 쉬우셨겠죠. 그 총이 바로 2층 카페에서 놈들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빼앗은 겁니다.
7층 전투가 더 대단했다는 사람이 또 나타났다.
- 7층 레스토랑 옆 복도를 보셨으면 그런 말 못하시지. 두목이 부하들과 함께 인질을 두 명이나 잡고 있었는데, 그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구출하셨어요.
- 어? 그걸 어떻게 아시지? 우린 다 밑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그 복도에 있던 사람은….
- 들었어요! 직접 본 건 아니고 들었다고요!
다른 걸 묻는 사람도 있었다.
- 6층에서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처박혀 있던 놈들 보신 분.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합니다.
- 글쎄요. 저도 보고 지나가기만 해서….
일반인들의 댓글도 줄줄이 붙었다.
- 오늘 그 현장 본 눈 삽니다.
-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모험을 하셨네.
- 거기 내 단골 카페인데 난 왜 오늘 거길 안 갔을까?
나강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 그런데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 모르죠. 처음 보는 분이었습니다.
- 저 오늘 그 카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경찰이 제 신원조회 할 때 그분은 누구시냐고 물어봤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요.
- 누구랍니까?
- 모른다던데요?
- 예? 설마 현장에서 바람처럼 사라진 겁니까?
- 그건 아닌데요. 절 담당한 경찰관님도 그분이 누군지는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 정부 소속 특수요원인가? 신분이 공개되면 안 되는 그런 특수요원요.
- 아마 그렇겠죠?
***
외과 의사 김중석이 다른 환자의 수술을 마치고 나온 과장 이정호에게 보고했다.
“과장님. 그 응급 수술을 한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응급이 한둘이야? 누구?”
“재봉틀 봉합법 말입니다. 재봉틀.”
이정호의 눈빛이 당장 변했다.
“그 사람이 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호가 주변을 재빨리 둘러본 후에 조용히 물었다.
“이름은?”
“아직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찾을 수 있다며?”
“과장님이 수술하시는 사이에 우리 병원에 총상 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총상?”
“예. 팔에 총을 맞았는데, 오늘 누가 현장에서 상처를 꿰매 지혈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딱 그때 그 봉합법 그대로입니다.”
이정호가 흥분했다.
“우리 과 환자지? 어디 있어?”
“그게요. 여기선 기본 처치만 받고 다른 병원으로 가버렸습니다.”
“뭐? 환자를 왜 그냥 보내! 붙잡았어야지!”
“흉터 안 남기는 병원을 찾아가겠다고…. 미국인이라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후우. 어떻게 잡은 단서인데….”
과장이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알았어. 중요한 건 이미 떠난 환자가 아니라 누가 했느냐지. 경찰에게 누가 했는지 물어봤어?”
“물어봤죠. 그런데요. 모른다던데요?”
“어? 경찰이 모르면 누가 알아?”
***
경찰은 나강인을 친절하고 정중하게 조사하고 돌려보냈다.
그렇다고 경찰이 나강인에 관한 조사를 그걸로 끝낸 건 아니다.
나강인의 주소지 관할 경찰서에 보충 조사 요청이 들어왔다.
형사팀장이 서류 봉투를 형사 박기정에게 주며 말했다.
“야. 합수부에서 조사 담당자 딱 한 명만 보라더라. 그래서 안에 든 건 나도 못 봤어. 너만 봐.”
박기정이 투덜댔다.
“에이. 독박으로 저 혼자 일 다 하란 말이잖아요. 진짜 너무하시네.”
“야. 내가 널 제일 믿으니까 너한테 주는 거야.”
“제발 좀 믿지 마시라고요.”
팀장은 그 서류를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누굴 조사하라는 건지는 들었다.
“그 건물에서 활약한 사람 이야기는 나도 인터넷에서 봤다. 근데 그게 어떻게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냐. 합수부도 믿어지지 않으니까 이렇게 조사하는 거겠지.”
형사 박기정이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읽어보며 맞장구를 쳤다.
“의심하는 게 우리 일이긴 하죠.”
팀장이 슬쩍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이 자료는 팀장님도 보면 안 된다면서요?”
“그래서 그건 안 보고 너한테 직접 묻잖아.”
박기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햇살 좋은 날’ 아시죠?”
“알지.”
“그 사람이 그 영화의 액션을 책임진 무술감독이라는데요?”
“그래? 야아. 우리 딸이 그 영화의 액션이 진짜 대박이라고 하더라.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박기정이 합법적으로 놀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 팀장님. 저 그 영화 보러 가야겠는데요?”
“야. 너한테 영화 보러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자료 조사 차원이죠. 그러니까 근무시간에 당당히…. 어?”
“왜? 뭐 나왔어?”
박기정이 서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팀장님. 이 사람 우리가 아는 사람인데요?”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전과자야?”
“그게 아니라요. 최근 방화 살인사건에서 건물 사이에 줄 걸고 외줄타기하면서 사람 구출한 분 있잖아요.”
“알지. 그분이 우리한테 범인 초상화도 그려줬잖아. 덕분에 그 방화 살인자 새끼 잡아서 실적 쫙 땡겼지.”
박기정이 고개를 들어 팀장을 보았다.
“이 자료에 있는 사람이 그때 초상화를 그려준 그 사람입니다.”
팀장은 깜짝 놀랐다.
“어? 진짜 그 화가야?”
“서류 보니까 딱 알겠는데요. 그 사람 맞습니다.”
팀장은 감탄했다.
“와. 그 사람이라면 그런 활약이 가능하지. 사람을 한 명 안고 건물 사이에서 줄타기할 때부터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봤다고.”
박기정이 서류를 도로 봉투에 넣으며 물었다.
“제가 아는 거 바로 정리해서 보고할까요?”
“그래라. 얼른 보내버리고 우리의 빠른 조사 속도를 자랑하자. 그리고 말이야.”
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우리 서에서는 진짜 너랑 나만 알자. 그 테러리스트 놈들을 잡은 사람이 민간인인데, 우리한테서 그 사람 정보가 흘러나갔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다 우리 책임이다.”
“팀장님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저 입 무겁잖아요.”
“박 형사. 넌 다른 것도 다 문제인데, 말만 하면 개기는 그 입이 제일 문제야.”
***
합동수사본부 회의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요리사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일반 음식점 요리사가 아니라, 밥차도 하고, 피시방에서 음식도 팔고….”
“그건 더 말이 안 되잖아요!”
합수부의 수사 대상은 국제 용병 자칼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7층 건물 점령 사건과 그 배후 및 배경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을 구출한 나강인은 합수부의 주요 수사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합수부가 나강인을 없는 사람 취급할 수는 없다. 사건을 나강인 혼자 다 해결했기 때문이다.
합수부는 직접 조사가 아니라 다른 기관에 신원조회를 요청해 나강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 했다. 합수부는 나강인의 주소지 관할 경찰서에도 신원조회 협조 요청을 보냈다.
담당 형사 박기정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들이 납득할 만한 것도 있었다.
“불타는 건물 사이를 사람을 안고 외줄타기로 건넌 적이 있군요.”
“저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역시 전에도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군요.”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많이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당황했다.
“무슨 요리사가 총을 그렇게 잘 쏴요?”
행안부 간부가 서류를 보며 말했다.
“그 영화를 찍을 때 밥차를 잠깐 몰았고, 지금도 피시방에서 종종 음식을 판다니까 요리사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피시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라니…. 그거 그냥 피시방 주방 알바 아닙니까? 거기서 무슨 총을 만집니까?”
“원래부터 총을 잘 쐈을 수도 있죠.”
합동수사본부장이 물었다.
“군 경력은 제대로 확인했지요? 행정부대라는 건 당연히 위장일 테고, 실제로는 어느 특수부대 출신입니까?”
군 수사관이 대답했다.
“저도 특수부대 출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기밀 부대까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진짜로 행정부대에서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혹시 서류상 위장이 철저한 거 아닙니까?”
“당시 부대 지휘관에게 직접 확인했습니다. 사진까지 보여줬는데 확실하답니다.”
“어이가 없군요. 그럼 사격술은 어디서 배웠답니까?”
“훈련소 사격 기록은 무척 우수합니다만, 자대 복무 중에는 사격 기록이 아예 없습니다. 거기가 워낙 일이 많은 부대라서 사격장에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니까 이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를 군대에서는 행정병으로 쓴 겁니까? 무장공비 한 팀쯤은 혼자 때려잡을 수 있는 실력자를요? 아니, 왜요?”
“그게 참…. 할 말이 없습니다.”
경찰 간부가 다른 자료를 꺼냈다.
“우리 쪽에서 해답이 될지도 모르는 자료를 확보한 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죠.”
“나강인 씨는 지난 2년간은 공식적인 활동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갑자기 서울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요?”
“본인에게 물어봤는데 그 2년간 산속에서 무술을 수련했다고 합니다.”
합수부장이 물었다.
“어…. 그러니까 폭포 아래에서 정좌하고 수련하는 그런 거 말입니까?”
“예. 폭포. 그것도 했다더군요.”
“무슨 농담을 진담처럼 하십니까?”
“그거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딱히 없잖습니까? 그렇게 산에서 무술을 수련했으니까 복도 벽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총은 왜 그렇게 잘 쏘는 겁니까?”
“총권도라고, 주먹도 쓰고 총도 쏘는 무술을 직접 만들었답니다.”
“환장하겠네. 그 말을 믿으셨고요?”
“제가 믿었다는 게 아니라,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합수부장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럼 폭발물 해체 기술은요? 정확히 기폭장치만 해체했다던데, 그 기술도 폭포수 아래에서 배웠답니까?”
“그, 글쎄요? 그건 안 물어봤는데…. 인터넷에서 보고 배운 거 아닐까요?”
“지금 장난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