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48화 (48/411)

48. 제안

사건 이틀 후에 신은하가 피시방에 찾아왔다.

그녀는 커다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렸다. 모자도 썼다. 거기다 롱코트도 입어 몸매를 가렸다.

그쯤 되면 바로 옆에서 들여다보지 않는 한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기 어렵다.

그녀가 피시방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장 조카 차은서는 처음에는 그녀가 손님인 줄 알았다.

“손님.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

신은하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은하야. 나야.”

“아. 언니였구나.”

그녀는 피시방 카운터 안쪽 휴식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그곳에 있는 간이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나 비서어. 시원한 아아 한 잔 가져와.”

나강인도 식사 준비 때문에 안쪽에 들어와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돈 내라.”

“커피 한 잔에 얼마나 한다고. 그냥 좀 주면 안 될까?”

“어. 안돼.”

차은서가 얼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만들어왔다.

“언니. 여기요!”

“역시 우리 은서밖에 없다니까? 뭐 필요해? 내 싸인 피시방 벽에 걸어둘래?”

“어머. 언니. 내가 설마 싸인 바라고 커피 준 거 같아요? 실망이네요.”

“그럼?”

차은서가 스마트폰을 살살 흔들었다.

“같이 셀카? SNS에 올리게.”

“이리 와서 옆에 앉아. 여기서 찍자.”

신은하는 당분간은 방송이나 영화 스케줄을 잡지 않고 쉬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이 많았다.

사진을 찍은 후에 신은하가 말했다.

“나 앞으로 여기 단골 찍을 테니까 내 자리 고정석으로 비워놔.”

“언니. 고정석은….”

“얼마면 돼?”

“언니 고정석은 매일 소독약 뿌려리고 새 물티슈로 닦아서 관리할게요.”

신은하는 강원도 촬영장에서 겪은 붕괴 사건의 영향을 꽤 오래 받았다. 잠을 자다 악몽을 꾸고 벌떡 일어난 날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나강인과 시간을 보낸 날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단순히 악몽만 안 꾼 게 아니다. 7층 건물이 자칼 일당에게 점령됐을 때도 레스토랑에서는 겁이 별로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자칼에게 잡혀서 스칼렛과 함께 끌려갈 때는 무섭긴 했지만, 그날 밤에도 악몽은 꾸지 않았다.

그녀는 이 피시방에 들어온 후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확히는 주방에 서 있는 나강인을 보면 편안해졌다.

‘그 무서운 놈들을 혼자서 때려잡은 실력자가 왜 여기서 밥을 팔까?’

이미 나강인을 이해하는 건 포기했다. 그녀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신은하가 한쪽에 놔둔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나 셰프. 오늘은 스페셜하고 럭셔리한 요리가 먹고 싶어. 저기 재료 사 왔으니까 요리해.”

“스페셜하고 럭셔리한 식당 가서 사 먹어.”

“그런 데는 비싸잖아.”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요즘 뜨는 인기 스타가 왜 이래?”

“그런 레스토랑에 갔다가 또 습격당하면 어떻게 해?”

“그놈들이 널 노리고 습격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걱정을 하냐? 앞으로도 그런 놈들은 너한테는 아무 관심이 없을 거다.”

“이렇게 나올 거야? 그렇다면 말이야.”

신은하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말했다.

“아잉. 맛있는 거 해주세요. 넹?”

나강인이 그런 그녀를 보았다.

활짝 웃고는 있지만 눈빛이 살짝 불안해 보였다.

그가 혼잣말을 작게 속삭였다.

“진짜로 고급 레스토랑이 가기 싫은 건가? 어쩌면 고급 레스토랑에 트라우마가 생겼을지도.”

AI 전지인이 의견을 냈다.

- 아닙니다. 저런 짓을 하는 게 부끄러워서 눈빛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래?”

- 그리고 저렇게 할 정도로 맛있는 요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너도 원하고?”

- 전 남이 만들어준 맛있는 요리를 원하지, 직접 만든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제가 직접 만든 스테이크보다 남이 만들어준 돈까스를 더 선호합니다.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물었다.

“재료 뭐 샀는데?”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이것저것 막?”

나강인이 봉투를 열었다.

AI 전지인이 내부를 재빨리 스캔한 후에 말했다.

- 예상보다 더 고급 식재료로 채워왔습니다. 신은하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습니다.

“직접 만든 건 싫다며?”

- 재료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추천 요리 리스트 띄워봐.”

- 해당 재료로 조리 가능한 야전 요리를 추천합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글씨로 요리 목록이 주르륵 떴다.

그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기왕이면 상큼한 기분이 드는 거로 추천해봐. 쟤 기분 좀 풀어주게.”

다른 목록이 사라지면서 3번 요리의 설명과 사진이 나타났다.

- 이 야전 취사 요리는 건조 해산물과 가루형 과일주스를 주재료로 사용합니다. 해안가 작전에서 신선한 식재료를 현지 조달하는 경우에는 고급형 레시피를 사용….

“간단하게 설명해. 이거 이름이 뭐야?”

- 보통은 상큼 해물 볶음이라고 부릅니다.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말했다.

“해물 볶음 만들어줄게. 상큼한 맛이 나는 거로.”

“응? 백화점에서 산 소고기는 요리에 안 써? 그거 한우야. 한우.”

“나도 남는 게 있어야지. 한우는 내 거다.”

“헐.”

신은하는 질 좋은 식재료를 다양하게 샀다.

나강인은 그중에서 해산물과 채소, 그리고 레몬을 꺼냈다. 다른 재료는 피시방 주방에 있는 것을 썼다.

평소처럼 조리는 금방 끝났다.

나강인이 신은하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얼른 먹고 가서 게임이나 해라.”

“강인 오빠 옆자리 비어있잖아. 나 거기 앉을래.”

“게임은 꼭 돈 내고 해라.”

“그 자리 내 고정석으로 예약했다고 말했나?”

“내 자리는 고정석이 아닌데?”

“괜찮아. 강인 오빠가 자리 옮기면 내 고정석도 옮기면 되니까.”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상큼 해물 볶음의 새우부터 먹었다.

“어머. 맛있다. 기름지면서도 상큼한 신기한 맛에, 육질이 톡톡 터지는 식감?”

“요리 방송 나가냐? 어디서 평가질이야? 그냥 먹어.”

“진짜 신기해. 대충 후딱 만드는 것 같은데, 내놓는 걸 보면 항상 명품 요리란 말이야.”

그녀는 느긋하게 요리를 즐겼다.

‘내가 이 맛에 여길 오지.’

피시방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오메가 테크 사장 스칼렛 켈리가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녀는 어깨에 거는 형식의 팔 보호대에 왼팔을 고정한 상태였다. 그 보호대를 가리기 위한 코트도 걸쳤다.

차은서는 외국인을 보고 당황했다.

“헤, 헬로? 웰컴. 아, 뭐라고 해야 하지? 싯, 싯다운 애니웨어.”

나강인이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은서야.”

차은서가 변명했다.

“내가 진짜 영어만 좀 약한 거예요. 영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한국말로 해. 한국에서 무슨 영어야?”

“하지만 그러면 손님이 못 알아듣잖아요.”

“알아들어. 한국말 잘해.”

“네?”

“할머니가 한국분이시라더라.”

“아! 그런 건 빨리 말해주지.”

차은서가 편안한 표정으로 안내했다.

“손님. 먼저 저쪽 무인결재기에 가셔서…. 어?”

차은서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강인 오빠가 아는 분이에요?”

“아니. 식당에서 한번 본 게 다야.”

“그렇구나. 그래도 오빠가 설명 좀 드려요. 난 자리 정리하러 가야 해서.”

차은서가 스칼렛을 떠넘기고 카운터에서 빠져나갔다.

스칼렛이 나강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엇갈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여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 7층 건물에 있던 다른 손님들은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데 스칼렛 켈리는 이곳까지 찾아왔다. 심지어 여기는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도 아니다.

“한국에 친구가 좀 있어요.”

나강인이 혀를 찼다.

“쯧. 뒷조사 당하는 거 안 좋아하는데.”

스칼렛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내가 뒷조사한 거 아니에요.”

“누군가는 했겠지.”

“한국과 미국 정부에 친구가 있어요. 그리고 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잖아요. 내가 놈들의 타깃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그녀가 왼팔을 가리켰다.

“총까지 맞았으니까요.”

“설득력이 조금 있네. 계속해봐요.”

“친구에게 날 구해준 분이 누군지 물었더니, 정부 비밀요원이라서 알려줄 수 없대요. 처음엔 그런가 했죠. 그런데 말이에요. 비밀요원이 여배우를 구하러 오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가 자칼을 잡았을 때 신은하는 나강인이 특수요원이 아니라고 말했다. 신은하는 그때 나강인이 그녀를 구하러 왔다고도 주장했다.

“그때 들었던 말에 밥차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밥차 하는 거 다 안다고 슬쩍 떠봤죠. 그랬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여기서 요리사로 일한다고 가르쳐주던데요?”

스칼렛이 얼른 한 마디 추가했다.

“아. 정부에서는 나강인 씨를 따로 조사한 건 아니고 그냥 신원조회 정도만 했대요.”

나강인은 정부에서 그 정도는 조사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 일이 터졌는데 정부가 나강인의 신원조회조차 안 할 리는 없다.

스칼렛이 장담했다.

“나니까 여길 찾아올 수 있었지, 기자들도 다들 나강인 씨가 비밀 특수요원인 줄 알 걸요?”

정부는 나강인의 신분을 비밀로 했다. 자칼의 잔당이 있을 경우를 대비한 조치였다.

인터넷에는 그날 정부 소속 비밀요원이 활약한 거라는 이야기가 좀 돌았다.

나강인은 그런 상황을 반겼다.

그의 신분을 무한정 숨길 수는 없다.

스칼렛은 어렵지 않게 그를 찾아냈다. 신은하나 이태호도 그 사람이 나강인이라는 걸 안다. 정부에도 아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일단은 시간을 벌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래서 여길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인사나 하러 들른 분위기는 아닌데.”

스칼렛이 예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 경호원으로 고용할게요.”

그녀의 개인 경호원이 되면, 그녀의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나강인의 임무 수행에 제한이 걸린다.

“싫습니다.”

“조건도 다 안 들어보고요? 최고의 대우를 해줄게요.”

“지금도 먹고사는 데 불편함이 없습니다만?”

그녀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사실 거절할 줄 알았어요. 돈이 필요했다면 요리사가 아니라 이미 경호업계의 최고가 되어 있었겠죠.”

“안 할 줄 알면서 왜 제안한 겁니까?”

“그래도 연봉을 세게 지르면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직원용 휴게실에서 신은하가 나오며 말했다.

“강인 오빠는 돈 많이 벌고 싶었으면 영화계에 진출했을 거예요. 아니면 음식점을 차렸거나.”

스칼렛이 그녀를 보고 살짝 놀랐다.

“아. 당신은…. 그때 그 영화배우?”

“맞아요.”

“여기서 다시 만날 줄 몰랐는데…. 역시 둘이 아는 사이군요.”

신은하가 자랑했다.

“그럼요. 우리 되게 친해요.”

“그런데 영화배우가 여기는 왜….”

“밥 먹으러 왔죠. 강인 오빠가 해주는 밥이 진짜 맛있거든요.”

스칼렛은 그가 여기서 밥장사를 한다는 건 안다.

맛이 궁금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나도 맛 좀 볼 수 있어요?”

나강인이 주방으로 안내했다.

“넉넉히 만들었으니까 한 접시 드시죠. 물론 돈 내고. 오늘 요리 가격은 만오천 원입니다.”

남은 음식을 싸가려던 신은하가 즉시 항의했다.

“아니, 강인 오빠. 재료는 내가 다 샀는데!”

“잘했다.”

“우이씨.”

오메가테크는 미국에서 잘나가는 회사다. 스칼렛은 그 회사의 사장 겸 개발 책임자다.

그쯤 되면 LA나 뉴욕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 특선 요리를 삼시 세끼 매일 먹어도 지갑이 얇아지지 않는다.

물론 항상 그런 요리만 먹지는 않는다. 일 때문에 간단히 때울 때도 있고, 몸매관리를 위해 식사량도 조절한다.

대신에 정식으로 먹을 때는 최고로 맛있는 요리를 찾아 즐긴다.

그런 미식 생활을 누리는 그녀가 나강인이 만들어준 해물 볶음을 먹으며 감탄했다.

“여기서 이런 요리를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이런 수준의 해물 요리를 전에도 먹어본 적이 있다.

‘거긴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었는데.’

그런 요리가 갑자기 피시방 주방에서 튀어나왔다.

신은하가 자랑했다.

“오늘은 내가 백화점에서 진짜 좋은 재료를 샀어요. 내가 샀으니까 더 맛있는 거예요.”

“백화점이요? 최고의 재료를 현지에서 직접 공수해서 요리해도 이 맛을 내긴 어려워요. 그런데 겨우 백화점이라니.”

“저기요. 깐깐하단 소리 많이 듣죠?”

“데이터를 사용해 분석할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스칼렛이 나강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실력으로 왜 여기서 일해요? 훨씬 더 좋은 선택지가 많을 텐데요.”

나강인이 도로 물었다.

“지금 우리 피시방을 무시하는 겁니까? 여기가 보기엔 이래도 장점이…. 음…. 장점이…. 요리가 맛있네.”

“아뇨. 그게 아니라요.”

스칼렛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하긴. 그 빌딩에서 날아다니면서 테러리스트를 잡은 사람이 요리사를 하는 것 자체가 이해 안 가는 일이긴 하죠.”

그녀가 해물 볶음을 먹었다.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그 맛을 아끼면서 즐겼다.

‘집에 가서도 이 요리가 또 생각나겠….’

문득 다른 방법이 생각났다.

그녀가 제안했다.

“경호원이 싫으면요. 요리사는 어때요?”

그녀가 나강인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너 내 전속 요리사 해라.”

“허튼소리 하면 접시 빼앗을 겁니다.”

그녀가 얼른 접시를 손으로 꽉 잡았다.

“농담한 거예요. 제시카한테 배웠어요.”

그녀는 나강인이 만든 요리를 먹으며 생각했다.

‘맛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