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장비 수리
차은서가 피시방 빈자리 정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스칼렛의 식사도 끝났다.
스칼렛은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맛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만오천 원입니다.”
그녀가 왼팔을 보여주었다.
“지금 손이 하나라서 지갑을 꺼내기 불편해요.”
“그런 손으로 용케 여기까지 왔군요.”
“차 타고 왔죠. 밖에서 차가 기다려요.”
“그럼 돈은?”
“전화번호 알려줘요. 톡으로 쏴줄게요.”
나강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미국인이 그런 것도 쓸 줄 압니까?”
스칼렛이 자랑했다.
“할머니가 한국분이시라니까요. 한국에 아는 사람 많아요.”
나강인이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스칼렛이 번호를 확인하며 말했다.
“저 오늘 출국해요.”
“잘 가요.”
“조만간 다시 한국에 들어올 건데, 그때 파트타임 요리사로 일할 수 있죠? 바다에서 선상 파티를 할 거라서요.”
“바쁩니다.”
스칼렛이 피시방 주방을 보았다.
“바쁜 사람 맞아요?”
“여기 말고도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서.”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 번호로 연락할게요. 꼭 와줘요.”
그녀가 피시방을 나간 후에 차은서가 호들갑을 떨었다.
“강인 오빠. 저 외국 여자가 방금 오빠 번호 딴 거예요?”
“밥값 보내주려고 그런 거잖아. 이 번호로 파트타임 요리 의뢰도 하겠대.”
“아닌데. 딱 봐도 번호 딴 건데….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야 모르지. 난 저 아가씨 이름도 모른다.”
나강인은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그가 그 건물 7층에서 그녀를 구하긴 했지만, 그녀의 신분을 제대로 알려준 사람은 없다.
신은하는 안다. 그 건물 레스토랑에 있을 때 THO 엔터 사장 이태호에게서 그녀가 누군지 들었다.
신은하가 대신 대답했다.
“미국 회사 사장이래.”
차은서가 부러워했다.
“와. 저렇게 젊은데? 집이 부자인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공학자 출신 사장이래. 직접 만든 기술도 있다더라.”
“돈 많고 얼굴도 예쁜데 거기다 머리까지 좋아? 와. 자괴감 든다. 그치?”
신은하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나도 돈은 좀 있고 얼굴은 내가 더 예뻐서, 난 뭐 자괴감까지는….”
“이 언니가 진짜. 내가 언니 흑역사 한번 떠들고 다녀봐?”
신은하가 즉시 꼬리를 말았다.
“은서야. 참아. 나 연예인이잖아.”
***
스칼렛 켈리는 주차장에서 대기하던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차에서 친구이자 비서인 제시카가 물었다.
“이야기는 잘 됐어?”
“예상대로.”
“잘 안 됐구나?”
“그래도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어.”
제시카의 눈이 커졌다.
“어느 특수부대 출신인지 알아냈구나! 역시 스칼렛!”
“요리를 참 잘해.”
“응?”
스칼렛이 방긋 웃었다.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진짜 깜짝 놀랐어.”
“그게 무슨….”
***
THO 엔터 사장 이태호의 아버지는 군과 경찰용 장비를 만드는 철인기공의 사장이다.
이태호의 형인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이 해외 출장을 위해 인천공항을 이용했다.
그런데 그는 공항 로비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어? 스칼렛 켈리?”
스칼렛이 이태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입니다.”
“아아. 철인기공. 반가워요.”
이태성이 그녀의 팔 보호대를 보며 인사 삼아 말했다.
“고생하셨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스칼렛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옆에 있던 제시카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사장님은 팔을 삔 것뿐인데요.”
“아. 그 레스토랑에 같이 계신 분이시군요. 머리의 상처를 보니까 알겠습니다.”
상대는 제시카의 머리에 왜 상처 보호용 패치가 붙어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아니라고 해봤자 의미가 없다.
비서 제시카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아셨죠? 그 사건이 벌어진 곳에 우리 사장님이 있었다는 건 비공개 정보예요. 그런데 사장님만이 아니라 제 정보까지 알아요? 철인기공의 정보력이 정말 놀랍군요. 경찰 쪽에 선이 있나요? 우리 뒷조사라도 한 거예요?”
이태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내 동생이 거기 밥을 먹으러 갔다가 그 사건에 휘말렸거든요. 동생한테 들었습니다.”
“네?”
“뒷조사한 게 아닙니다. 하, 하하.”
스칼렛이 물었다.
“동생이요?”
“보셨을 텐데요. 5층과 6층 사이 계단을 지켰니까요.”
스칼렛의 표정이 풀렸다. 누구 이야기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얼굴도 좀 닮았다.
“아아. 그때 그분이 동생이군요.”
이태성은 스칼렛과 비서의 반응이 예상보다 날카로운 걸 보고 살짝 당황했다.
이태호가 그때 그 레스토랑에 간 건 이태성이 부탁해서다.
이태성은 그때 이태호와 함께 식사하다가 스칼렛에게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이태성은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곳에 없었다.
전해 들은 이야기로 아는 것과 실제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느낀 것은 많이 다르다.
이태성은 후회했다.
‘그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업 이야기를 좀 할까 했는데, 잘못하면 스칼렛 켈리의 경계심만 높이겠다.’
이태성이 대화의 방향을 동생 쪽으로 슬쩍 돌렸다.
“제 동생이 영화와 공연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입니다. 그 레스토랑 셰프는 방송에 종종 나오는 분이고요. 그러니까 원래 아는 사이죠. 그래서 그날 그 레스토랑에 갔던 거고요.”
“아. 그렇군요.”
상대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태성이 다른 주제를 시도했다. 국내에서는 잘 먹히던 주제였다.
“제 동생이 이번에 대박 난 영화를 직접 제작했습니다. ‘햇살 좋은 날’이라는 영화인데 혹시 보셨습니까?”
“아뇨. 제가 지난 이틀을 병원에서 보내는 바람에 못….”
그녀가 멈칫했다.
자칼은 마지막에 그녀와 함께 예쁜 여자를 납치했다. 그 여자의 직업은 영화배우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그 영화배우를 나강인이 일하는 피시방에서 만났다.
제시카가 옆에서 말했다.
“비행기 시간 다 됐어요.”
이태성이 얼른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다음에 다시 뵈면 좋겠군요.”
스칼렛이 제시카에게 말했다.
“내 명함 드려. 제가 지금 멀쩡한 손이 하나라서 명함 지갑을 못 써요.”
이태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괜찮습니다. 제가 전화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
이태성과 헤어진 후에 스칼렛이 제시카에게 말했다.
“한국 여배우들 사진을 보여줘. 나이는 20대, 또는 20대로 보이는 외모. 그리고…. 예뻐.”
제시카가 태블릿PC를 꺼내 검색한 후에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여기 있어.”
“나 지금 손이 이렇잖아. 넘겨줘.”
사진이 몇 장 넘어갔다. 아는 얼굴이 나왔다.
스칼렛이 말했다.
“맞아. 이 여자야.”
“누군데?”
“넌 그때 기절해서 못 봤겠지. 나랑 같이 자칼에게 납치될뻔한 여자.”
“아….”
“어떤 여자인지 좀 보자.”
제시카가 사진을 눌렀다. 신은하의 프로필이 떴다.
제시카가 화면을 보며 설명했다.
“이름은 신은하. 조연으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어. 최근에 출연한 영화는….”
“햇살 좋은 날. 거기 나왔구나.”
“거기서도 조연인데 실제 비중은 거의 주연급이래.”
스칼렛은 병원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기밀 서버의 보안 등급을 갑자기 높여놓은 것도 처리해야 했고, 회사 연구원들도 동요하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느라 바빠서 그때 만난 사람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진 못했다. 신은하의 이름도 지금 처음 알았다.
스칼렛이 말했다.
“오늘 그 피시방에 갔더니 이 여자가 있더라.”
“응? 배우가 왜 거기에….”
스칼렛은 그곳에서 먹은 해물 볶음이 떠올랐다. 맛있었다.
그런데 그 해물 볶음의 식재료는 신은하가 백화점에서 사서 피시방으로 가져왔다.
“식재료까지 사 와서 나강인 씨에게 밥을 만들어달라고 했어. 나강인 씨와 잘 아는 사이니까 그런 부탁을 따로 할 수 있었겠지?”
“그야 그렇지.”
“이 영화를 만든 회사 사장도 나강인 씨하고 잘 아는 사이겠지? 그러니까 나강인 씨가 그 사장을 믿고 그 계단을 맡긴 거겠지?”
“그렇…겠지?”
스칼렛이 이태성의 명함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 영화 말이야. ‘햇살 좋은 날’. 어떤 영화야?”
“로맨스코미디 앤 액션이래. 액션이 정말 멋지다는 평이 많아.”
“액션? 음…. 비행기 타기 전에 시간이 남지?”
제시카는 조금 전에 이태성에게는 비행기 시간이 다 됐다고 말했다.
“한국 스케줄이 대부분 취소돼서 시간은 많이 남아. 비행기 타기 전까지 영화 한 편 볼 시간은 있어. 이 공항에 영화관이 있는데 지금 보러 갈까?”
스칼렛이 걸음을 옮기려다가 제시카를 보며 말했다.
“영화는 정보 수집 차원에서 보는 거야.”
스칼렛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제시카가 코웃음 쳤다.
“그러시겠지.”
***
나강인은 이튿날 서울 외곽에 마련한 제작 거점으로 갔다. 위치는 주거 거점으로 얻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제작 거점은 원래 철공소였다. 아직은 내부에 손댄 것이 거의 없었다.
그가 철공소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인아. 이곳에 있는 모든 장비의 상태를 점검해.”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작업 과정을 보여주었다.
먼저 철공소에 있는 모든 장비의 외곽에 반투명한 사각형 선이 죽죽 그려졌다.
그 사각형은 곧바로 줄어들어 장비의 외곽선이 되었다.
이 안에서 제일 비싼 절삭 가공 기계의 외곽선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 너무 낡아 사용할 수 없는 장비입니다.
다른 장비의 외곽선도 하나씩 빨갛게 변했다. 나중에는 모든 장비가 빨갛게 칠해졌다.
공구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노란색이 뜬 장비가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곧바로 빨간색으로 변하곤 했다.
“왜 색이 변하냐?”
-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낡았습니다.
그나마 노란색 공구가 몇 개 있기는 했다. 파란 건 하나도 없었다.
“진짜 상태가 다 왜 이래? 잘못 본 거 아냐?”
-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정확도는 다소 떨어집니다만, 잘못봤을 확률은 낮습니다.
“그냥 봐도 상태가 다 엉망이긴 하다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철공소 주인이 이곳을 폐업할 때, 상태가 괜찮은 장비와 공구는 모두 팔아버린 것 같습니다.
“어쩐지 싸게 빌려주더라. 장비도 마음대로 쓰라고 하고 고장 나도 상관없다고 하더니, 더 고장 낼 것도 없네.”
- 고철이나 다름없는 수준입니다.
“지인아. 여기를 빌리자고 한 건 너다. 인터넷에서 이곳을 네가 찾아냈잖아. 여기가 제작 거점으로는 최선이라며.”
AI 전지인이 말을 슬쩍 바꾸었다.
- 공구와 자재를 보충하면 야전 수리 스킬로 장비를 수리할 수 있습니다. 수리를 제안합니다.
“하긴. 폐차하겠다던 차도 그 스킬로 고칠 수 있었으니까.”
그는 며칠 전에 중고차 시장에 들렀다가, 원인불명의 고장을 해결하지 못해 폐차하려던 차를 샀다.
그 차를 이곳으로 끌고 와 AI 전지인이 알려주는 대로 전기 계통을 손보자 차 상태가 멀쩡해졌다.
나강인이 지시했다.
“필요한 도구와 자재를 사러 가자. 사는 김에 여기 수리도 좀 하고. 건물이 너무 낡았어.”
***
종합병원 외과 과장 이정호가 사진 두 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장은 스칼렛 켈리의 팔 총상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교차로 사고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은 환자의 사진이었다.
“사진으로 보면 사용한 기술이 확실히 비슷한데 말이야.”
그가 외과 의사 김중석에게 물었다.
“넌 두 케이스 다 직접 봤으니까 더 잘 알 거 아냐. 네가 보기엔 어때?”
김중석이 장담했다.
“분명히 같은 의사가 상처를 꿰맨 겁니다. 간격도 그때와 같고 매듭 모양도 똑같습니다.”
“총상 환자는 지혈할 때 몇 바늘 꿰매지도 않았잖아. 우연히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단추 다는 데 쓰는 실로 상처를 꿰맨 것까지 우연이진 않을 걸요?”
“하긴.”
이정호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김중석이 물었다.
“과장님. 휴가까지 내고 미국에 가신 이유가 바로 이런 정교하고 빠른 봉합 실력을 가진 의사를 찾기 위해서였잖아요. 드디어 찾았는데 왜 그러세요?”
“이걸 찾았다고 해야 할지…. 그 의사 이름도 모르는데 말이야.”
“예?”
“경찰 쪽에 알아봤는데 알려줄 수 없대.”
“의사가 의사 이름 좀 물어보는데 왜 그걸 안 알려준다는 겁니까?”
“모르지. 나도 답답해.”
“이대로 포기하실 건 아니죠? 연지 수술하려면 이 의사가 꼭 필요하잖아요.”
이정호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딸을 포기하는 아빠도 있냐? 우리 딸은 반드시 살린다.”
“역시 우리 과장님!”
“일단 인맥을 동원해서 국내 의사 쪽을 알아봐야지. 넌 주변에 아는 사람 없어? 경찰이나 검찰, 기자 쪽으로.”
“저야 뭐…. 없죠.”
외과 과장 이정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의사는 지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어느 병원에서 사람을 살리고 있겠죠.”
***
신은하는 제작 거점에 들렀다가 당황했다.
“강인 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이 기계를 살리고 있다. 고장 났거든.”
나강인은 절삭 가공 기계를 완전히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고 있었다.
“이게 뭔데?”
“쇠를 깎고 가공하는 기계. 이걸 먼저 고쳐서 부품을 깎아야 다른 장비들도 고칠 수 있거든.”
신은하는 이런 기계는 잘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모르는 사람도 눈으로 보면 오는 느낌이라는 게 있다.
“이거 딱 보니까 엄청 고물인데? 작동하긴 해?”
AI 전지인이 큰소리쳤다.
- 자연로보틱스의 야전 수리 스킬은 전투로 파괴된 장비를 전장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합니다.
나강인이 중요 구동부의 조립을 마친 후에 말했다.
“날 믿어. 내가 이런 거 잘 고쳐. 자. 봐라. 전원 스위치를 딱 넣으면 여기 이 부분이 윙하고 돌아갈 거야.”
나강인이 스위치를 눌렀다.
곧바로 그가 말한 부분 바로 옆에서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신은하가 겁을 먹고 뒤로 쓱 물러났다.
“그거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그냥 스파크만 조금 튄 거야.”
“앗! 연기 난다!”
방금 수리한 장비에서 불꽃만 튀는 게 아니라 연기까지 모락모락 올라왔다.
나강인이 얼른 스위치를 내렸다.
“어휴. 불날 뻔했다. 지인아. 이거 진짜 살릴 수 있냐?”
- 장비가 완전히 사망했습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