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53화 (53/411)

53. 촬영현장

나강인은 CF 촬영현장에서 신은하와 김유찬을 열심히 굴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나강인이 손으로 도와줄 때도 있지만, 말만 가지고 굴릴 때가 더 많았다.

“은하는 이리 구르고, 유찬 씨는 그 위로 발을 쭉 뻗어요.”

신은하가 항의했다.

“강인 오빠! 방금 나보고 구르라 그랬어! 일부러 굴리는 거 맞네!”

“진짜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 피하라고.”

김유찬도 하소연했다.

“강인 씨. 내가 발이 높이 안 올라가는 고질병이 있어요. 옛날에 군대에서 간첩 잡다가 다쳤는데….”

“골격과 근육 상태를 보면 그런 병 없습니다. 간첩 잡은 적 없는 거 다 알고요. 다리 좀 찢어줘요? 쭉 올라가게.”

“내가 열심히 올려보겠습니다.”

나강인은 말로 굴릴 때도 옆에 서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지켜보기는 했다.

그가 김유찬이 내지른 다리를 슬쩍 밀며 말했다.

“어허. 요령 피우는 거 다 보입니다. 다리 더 올려요. 은하 너는 왜 그렇게 힘이 없냐?”

다시 2초 분량을 더 찍고 나서 짧은 휴식 시간이 돌아왔다.

신은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완전히 속았어. 이번 CF도 영화 찍을 때처럼 휙휙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때는 나강인이 김유찬의 대역이 되어 다른 배우들을 직접 상대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일이 쉬워진다.

지금은 신은하와 김유찬 두 사람만 화면에 나와야 한다. 나강인도 녹색 쫄쫄이를 입고 도와주고 있지만, 카메라 정면에서 두 사람을 가리면 안 되기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많았다.

게다가 나강인이 지금 쓰는 건 훈련교본 제작용이 아니라 훈련병 교육용 스킬이다.

김유찬이 지쳐서 벌렁 드러누운 채로 말했다.

“강인 씨하고 다음에 또 CF 찍게 되면, 꼭 직접 출연하게 해야겠어.”

신은하가 물었다.

“누굴요?”

“당연히 강인 씨지. 강인 씨가 주도하는 액션이 초보자 모드로 버스에 업혀가는 거면, 옆에서 도와주는 이런 액션은 완전 하드코어 난이도잖아.”

“인정. 다음엔 진짜 꼭 출연시켜야지. 얼굴 나오는 게 싫으면 오페라 가면 씌워서라도 시킬 거야.”

김유찬과 신유미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지만 PD는 신났다.

PD가 영상을 돌려보며 말했다.

“나강인 씨가 액션이 제대로 안 나왔다고 다시 찍자고 한 영상들 말이야. 왜 하나같이 고품질이야?”

조연출도 옆에서 맞장구쳤다.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하자고 해서 찍었는데, 아예 다른 동작처럼 보이는 게 장난 아니게 많아요.”

“그치? 카메라 각도에 따라서 달라 보이는 것도 많고.”

PD가 손바닥을 비볐다.

“TV 방송본 네 개만 모아서 인터넷용으로 쓰려고 했는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인터넷용에 쓸 소스가 넘쳐나잖아.”

“인터넷 영상에 TV에서 안 보여준 걸 넉넉히 넣을 수 있겠어요.”

“흐흐. 소비자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벌써 들린다.”

조연출이 나강인과 배우들을 보며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대단하네요.”

“그게 다 내 신의 한 수 아니겠냐?”

“나강인 씨는 광고주가 대놓고 요구했다면서요?”

“어…. 이 바닥은 광고주가 신이잖아. 그 말이었어.”

***

CF 격투 영상은 신은하가 이기는 것 두 개, 김유찬이 이기는 것 두 개가 필요했다.

한참 더 촬영한 후에, 신은하가 의자에 파김치처럼 늘어진 채로 헐떡였다.

“나 이제 때려죽여도 못해. 더 할 거면 그냥 날 죽여! 아니, 난 이미 죽어있어!”

두 사람이 열심히 구른 덕분에 액션씬은 충분히 찍었다.

나강인이 PD에게 말했다.

“더 찍는다고 더 좋은 그림이 나오진 않을 겁니다.”

PD가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

“덕분에 좋은 영상 많이 건졌습니다. 그럼 격투 영상은 이쯤 해야겠네요.”

신은하가 그 말을 듣자마자 기운을 내서 일어났다.

“내가 살아났다!”

PD가 말했다.

“나머지 촬영은 저한테 맡기시죠.”

신은하가 PD에게 물었다.

“네? 다 끝난 거 아니에요?”

“이제 승자가 음료를 마시고 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좌절하는 씬 찍어야죠.”

“아. 맞다. 흐흐. 오늘 고생한 거에 비하면 음료 마시는 연기 정도는 쉽죠.”

김유찬도 흐느적거리면서 걸어왔다.

“막판에는 강인 씨가 물도 못 마시게 해서 갈증이 장난 아닙니다. 빨리 찍죠.”

그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신은하는 음료를 정말 시원하게 마셨다. 누가 봐도 행복하게 마시는 모습이었다. 마신 후에는 진심을 담아 대사를 쳤다.

“캬아아! 시원하다아!”

PD가 감탄했다.

“와. 이거 한 방에 가도 되겠는데?”

조연출은 안쓰러워했다.

“은하 씨가 오늘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거 한 잔에 저렇게 행복해할까.”

김유찬은 음료를 소중하게 마셨다. 마신 후에는 시원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말했다.

“하아아. 내가 이 맛에 산다.”

PD는 아까보다 더 신났다.

“저 진심이 절절히 느껴지는 표정 봐라. 이 CF가 나가면 이 바닥에서 내 명성이 쭉 올라갈 거야. 흐흐흐.”

조연출도 같이 좋아했다.

“감독님. 그럼 제 이름도 조금 알려질까요?”

“너한테 TV CF는 아직 어렵겠지.”

“에이….”

“대신에 인터넷용 CF는 너한테 제안이 가지 않겠냐?”

“앗! 진짜요?”

“그래. 그리고 그걸로 실적을 쌓으면 TV CF도 제안이 들어오겠지.”

“이야아. 이 CF 저한테도 진짜 중요하네요.”

“당연하지. 이 CF가 방송에 나가면 우리 둘 다 대박을….”

옆쪽에서 갑자기 당황한 소리가 들렸다.

“어? 이게 왜 이래?”

PD가 옆을 돌아보았다.

스태프 한 명이 당황한 얼굴로 조명 제어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PD가 물었다.

“뭐야? 뭔데?”

“조명 컨트롤러가 나갔습니다!”

“무슨 소리야? 조명 잘 들어오잖아!”

“그게 아니라, 배경 조명용 LED 제어장치가 나갔습니다.”

배우가 음료를 마실 때는 배경에 심어놓은 LED 조명들이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화려하게 빛나야 한다. 조금 전까지는 그 조명 효과가 제대로 들어갔다.

“어? 야! 그거 나가면 안 돼! 그게 왜 나가! 그거 누가 가져왔어?”

“이전 제작사에서 쓰던 거 그대로 넘겨받은 장비입니다.”

“아. 그렇지. 그 회사는 뭐하는 놈들이야! 우리 엿 먹이려고 일부러 맛이 간 장비 넘긴 거 아냐?”

PD가 화를 낸다고 해서 장비가 고쳐지진 않는다.

조연출이 물었다.

“감독님. 그냥 저 배경은 빼고 갈까요?”

“안돼. 광고주가 저 배경이 마음에 든다고 꼭 넣어달라고 했어. 그래서 우리가 이전 제작사에서 장비를 받아온 거야.”

이 광고는 원래 다른 제작사에서 찍으려던 것이다. 그런데 배우가 사고로 다치는 바람에 제작이 중단됐다. 배우만 교체해서 다시 찍는 방법도 있었지만, 광고주는 아예 광고 제작사를 지금 이 회사로 바꾸었다.

조연출이 물었다.

“그럼 저건 수리 맡기고 고쳐지면 다시 찍을까요?”

“언제 고쳐지는데?”

“그, 글쎄요? 오늘은 안 되겠죠?”

“수리가 되긴 하고? 저거 직수입품이라며?”

“그러네요?”

PD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환장하겠네. 음료 마시는 씬 두 개만 더 찍으면 되는데. 이거 안 그래도 마감이 코앞인 광고인데, 광고주한테는 뭐라고 하지?”

“설마 우리도 잘리진 않겠죠. 방송일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던데….”

“시간이 없는데도 제작사를 우리로 교체한 거 보면 몰라? 제품부터 출시하고 광고는 나중에 하자고 하면 우리는 그냥 잘리는 거야.”

“그럼 진짜 어떻게 하죠?”

구경하러 온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기요. 제가 좀 볼까요? 저 컨트롤러도 어차피 컴퓨터의 일종이니까요.”

PD는 안성환이 며칠 전에 회사에서 해커의 공격을 밝혀낸 보안 전문가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아! 컴퓨터 전문가! 이거 고칠 수 있겠어요?”

“제가 원래 이런 거 잘해요.”

“내가 일당 잘 챙겨줄 테니까 얼른 좀 고쳐줘요.”

안성환이 자신만만하게 LED 조명 제어장치 앞에 앉았다.

그 장치에는 조명 패턴 설정 작업에 쓰는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 등의 입출력장치가 달려 있었다.

안성환이 장비를 점검한 지 5분 만에 말했다.

“이거 사람 불러야겠는데요?”

PD가 물었다.

“왜요? 뭐가 문제인데요?”

“아무래도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와. 환장하겠네. 이거 직수입품이라던데 어쩌죠?”

“어…. 그럼 이런 장비를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사람을 찾아보셔야….”

신은하가 끼어들었다.

“강인 오빠가 기계를 잘 고치던데?”

안성환이 물었다.

“어? 형은 IT 보안 전문가 아니에요?”

신은하가 대놓고 자랑했다.

“강인 오빠는 차도 잘 고치고 기계도 잘 고치고 하여간 다 잘 고쳐. 서울 외곽에 개인 공방도 있어. 전에는 나랑 같이 공구 상가에 가서 레이저 나가는 기계도 샀다.”

“네? 레이저요?”

“레이저로 뭘 자르는 기계래.”

“광선검 같은 거예요?”

“그거겠냐? 공구 상가에서 샀다니까. 철공소 같은 데서 쓰는 기계야.”

PD는 며칠 전에 나강인이 해커의 위치를 얼마나 빨리 찾아내는지 옆에서 봤다.

그가 얼른 나강인에게 부탁했다.

“나강인 씨! 이거 직수입품이라서 수리하려면 외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좀 살펴봐 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이 CF 오늘 안에 꼭 찍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인 씨의 녹색 쫄쫄이를 CG로 지울 시간이 생겨요.”

나강인도 오늘 중으로 일을 마치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오늘 못 끝내면 나중에 다시 와야 한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수리할 수 있냐?”

- 이 제품은 전투 관련 장비가 아니라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점을 파악하려면 내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일단 좀 뜯어보죠. 드라이버 있습니까?”

스태프가 즉시 공구함을 가져왔다.

AI 전지인이 풀어야 할 나사를 표시해주었다.

나강인이 드라이버로 나사를 분리하고 제어장치의 케이스를 열었다. 알루미늄판으로 만든 제어 패널 커버도 분리했다.

AI 전지인이 장치 내부를 확인한 후에 보고했다.

- 야전 수리 스킬로 임시 수리가 가능합니다.

“넌 모터나 엔진 달린 기계만 잘 고치는 줄 알았더니 전자공학도 잘하네?”

- 전쟁터에서 아군 장비가 고장 나면, 수리될 때까지 적이 기다려주진 않습니다. 그럴 땐 임시 조치로라도 일단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식 수리가 아니라 임시 조치구나. 하긴. 지금은 부품이 없지. 알았으니까 일단 동작하게만 만들자.”

CF 촬영팀이 가지고 다니는 공구 중에는 전기인두와 실납, 전선, 전기 테스터 등이 있었다. 오실로스코프 같은 장비는 없었지만 그 정도면 아쉬운 대로 쓸 만했다.

AI 전지인이 그 도구들을 이용해 전선 몇 개를 장비에 연결했다. 그 작업을 하는 이유는 AR 렌즈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강인은 사람들에게 그 긴 설명을 간단하게 줄여서 말했다.

“회로에 바이패스 선을 몇 개 달았으니까 일단 동작은 할 겁니다.”

PD가 다급히 물었다.

“고쳐진 겁니까?”

“임시 조치입니다. 오늘 촬영 정도는 버틸 텐데 제대로 된 수리는 나중에 따로 하셔야죠.”

“그래야죠! 아. 되는지 좀 볼 수 있습니까?”

나강인이 케이스를 열어놓은 상태로 전원을 켰다. 그런 후에 미리 설정된 대로 배경용 LED 조명을 작동시켰다.

곧바로 촬영장 뒤쪽에서 화려한 조명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PD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만세! 살았다!”

안성환이 감탄했다.

“와. 강인이 형은 해킹방어만 잘하는 게 아니라 전자공학도 잘하는구나?”

신은하가 자랑했다.

“내가 그랬잖아. 강인 오빠는 뭐든 다 잘 고친다고.”

“왜 누나가 형 자랑을 해요?”

신은하가 얼른 말을 돌렸다.

“저렇게 잘하는 게 많은데 왜 피시방에서 밥을 팔까?”

나강인은 요즘도 이삼일에 한 번은 피시방에서 요리한다.

“맞아요. 강인이 형은 피시방에서 밥을 팔 게 아니라 다른 일을 해야 해요.”

“맞아. 당연히 연예계로 와야 하는데 말이야. 난 밥은 따로 얻어먹으면 되니까.”

“형은 당연히 IT 보안 쪽으로 와야죠.”

“연예계라니까.”

나강인이 PD에게 말했다.

“이건 임시 조치니까 나중에 수리 맡겨서 부품을 교체하세요.”

“하하하. 어차피 우리 장비도 아니고 빌려온 건데요. 이 기계를 반납할 때 꼭 이야기하겠습니다.”

나강인이 LED 조명 제어장비를 다시 조립하기 위해 제어 패널의 알루미늄 커버를 잡았다.

나강인은 갑자기 피부의 솜털이 일어서는 느낌을 받았다.

AI 전지인이 즉시 경고했다.

- 감전 위험이 감지됐습니다! 7시 방향!

나강인이 고개를 뒤쪽으로 휙 돌렸다.

음향 제어장비와 젊은 여자의 주변 허공에 경고 표시 수십 개가 주르륵 떴다가, 번개 표시와 경고 문구 몇 개만 남기고 싹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