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54화 (54/411)

54. 일렉트릭 쇼크

음향 제어장비 위에 뜬 몇 개의 경고 문구 중에서 제일 큰 건 ‘감전 위험!’이라는 네 글자였다.

그 장비 바로 옆에는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이 서 있었다. 그녀는 촬영 전에 나강인을 보고 웃었던 사람이다.

갑자기 곽유선의 몸이 굳었다.

AI 전지인이 고속 음성으로 경고했다.

- 민간인이 감전됐습니다! 장비의 전원을 즉시 차단해야 합니다!

나강인은 지금 LED 제어 패널의 커버로 쓰이는 알루미늄판을 잡고 있다. 그가 그 알루미늄판을 번쩍 들었다.

AI 전지인이 즉시 차단해야 할 전원선까지의 경로를 표시했다.

나강인이 칼을 던지듯이 알루미늄판을 던졌다. AI 전지인이 손가락과 손목의 움직임을 보조해 명중률을 높였다.

얇은 알루미늄판이 마치 칼날이라도 된 것처럼 날아가 전원선에 박혔다.

굵은 전선이 단번에 잘렸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알루미늄은 전기가 잘 통한다.

나강인이 곧바로 드라이버를 던졌다. 화살처럼 날아간 드라이버가 굵은 전선을 정확히 때렸다. 잘린 전선 한쪽이 옆으로 튀어나갔다.

굳은 채로 서 있던 곽유선이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사람들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으어어!”

“뭐, 뭐야!”

“유선 씨! 왜 그래!”

나강인이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을 향해 달려갔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감전 위험 상황을 벗어났습니다. 부상자에게 손을 대서 확인하십시오.

그가 기절한 곽유선의 목에 손을 대며 눈동자를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감전되긴 했습니다만 사람이 사망할 정도로 장시간 노출되진 않았습니다. 신체 반응도 정상입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살아있습니다. 이 정도 감전으로는 죽진 않을 겁니다.”

PD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아….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괜찮긴 하겠지만 그래도 병원에 보내는 게 좋습니다.”

“다, 당연히 그래야죠. 119! 누가 119에 전화 좀 걸어!”

119구급차가 달려와 곽유선을 데려갔다.

그동안 촬영은 중단됐다.

상황이 정리된 후에 PD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번 CF를 찍으면서 나강인 씨 덕분에 정말 여러 번 살았습니다. 보통 분이 아닌 건 알았습니다만….”

PD의 눈이 알루미늄판으로 향했다. 날조차 서 있지 않은 그 판이 닿자마자 굵은 전선이 단번에 잘렸다. 그건 알루미늄판이 아니라 칼을 던져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PD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판이 사람에게 날아가 꽂혔으면? 목에 맞으면 그냥 죽겠는데?’

PD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말했다.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하, 하하.”

현장이 정리되고 다시 촬영이 준비됐다.

PD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 남은 촬영은 빨리 끝냅시다! 다른 일이 또 생기기 전에!”

문제가 또 생겼다. 스태프 한 명이 말했다.

“감독님! 곽유선 씨가 담당하던 장비가 안 되는데요?”

“전원 케이블이 잘렸으니까 당연하잖아. 새 전선을 써!”

“전원 케이블은 이미 새것으로 갈아 끼웠습니다. 그게 아니라, 장비 내부가 타버렸습니다. 그게 타면서 곽유선 씨도 감전된 것 같습니다.”

“어? 저 장비 용도가 뭔데?”

“우리 광고 찍을 때 CM송을 배경으로 깔아주는 장비입니다.”

PD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난 또. 그럼 노래 없이 일단 찍고 배경음악은 나중에 합치면 되잖아.”

이번에는 김유찬이 반대했다.

“어. 그건 좀 곤란합니다.”

“예?”

“그 노래를 들으면서 온종일 고생하고 찍었더니, 마지막 장면도 그 노래를 들으면서 해야 감정이 제대로 살 것 같은데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제 연기 루틴이 원래 그래서, 들리던 노래가 없으면 느낌이 차이가 좀 날 수 있습니다.”

감독이 제안했다.

“그럼 다른 스피커에 연결해서 틀어드릴까요?”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독이 스태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우리 CM송 음원 가진 사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연출이 옆에서 말했다.

“감독님. 광고주가 보안 문제 때문에 음원을 아무도 복사 못 하게 했잖아요.”

“어? 그, 그랬지.”

“CM송 음원이 들어있는 유일한 장비가 방금 타버린 저건데요.”

“따로 저장된 게 진짜 하나도 없어?”

“그걸 작곡가한테서 받아서 직접 가져온 사람이 곽유선 씨인데 방금 병원에 실려 갔잖아요.”

곽유선은 이 CF 제작사 소속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제작사에는 음원이 없다.

“그럼 작곡가에게 연락해서 새로 받으면 되잖아.”

“작곡가가 곽유선 씨 큰오빠인데, 막내 여동생이 감전돼서 기절한 걸 알면 가만있을까요?”

“어…. 날 죽이려고 들겠지?”

“당연하죠.”

“곽유선 씨가 병원에서 검사는 받아보고 나서 작곡가한테 연락해야겠지? 나강인 씨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작곡가한테 연락하면 아마 광고주에게도 연락이 갈 걸요? 여기서 사고가 났다고….”

PD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건 안돼.”

그는 촬영장에서 감전사고가 났다는 걸 광고주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광고주가 재수나 운 같은 걸 많이 따지는 사람이라던데. 사고가 또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도 CF를 다른 제작사에 넘기겠지.’

계약서에는 현장에서 이번 같은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광고주는 아무 손해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박혀 있다. 오늘 촬영을 다 끝내야 광고주가 취소 옵션을 못 쓴다.

조연출이 제안했다.

“감독님. 그럼 우리가 아까 찍은 영상을 틀어주는 건 어떨까요? 거기에 CM송이 들어가는데.”

“야. 그건 다른 오디오가 잔뜩 섞인 거잖아. 그걸 쓰느니 CM송 없이 그냥 찍는 게 낫지.”

사정을 모르는 배우 김유찬이 제안했다.

“전 나머지는 내일 찍어도 되는데요.”

신은하가 조용히 말했다.

“나 내일 스케줄 있는데.”

이 일에 하루를 더 쓰는 건 나강인도 달갑지 않았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그냥 제가 CM송을 부르겠습니다.”

PD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러면 되겠네! 사람이 직접 노래하면 되겠어요! 일단 그렇게 찍고, 음악 없는 버전도 추가로 다시 찍죠. 그 두 개를 잘 조합하면 되니까.”

김유찬이 작게 불평했다.

“원곡만큼 잘해야 어색하지가 않은데…. 그냥 내일 하지.”

PD는 나강인의 제안대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나강인이 CM송을 노래하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노래를 잘하는 사람에게 시키고 싶었다.

PD가 물었다.

“제가 나강인 씨를 못 믿는 건 아닌데, 일단 노래를 어느 정도 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은데요. 아. 우리가 악기는 기타밖에 없는데, 치실 줄 아시죠?”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지인아. 기타 칠 줄 아냐?”

- 가능합니다. 현재 세계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기타 연주법도 습득했습니다.

“응? 그걸 왜?”

- 다른 정보에 섞여서 들어왔습니다.

“자연로보틱스의 신체삽입형 AI는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며. 너 혹시 기타에 관심 있냐?”

- 저는 전투지원 AI입니다.

“알아.”

스태프가 기타를 가져왔다.

나강인은 카메라 앵글 밖에서 의자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기타를 잡았다.

신은하가 엄지를 세웠다.

“오! 자세 나오는데!”

나강인이 처음 이곳에서 정신을 차린 날, 그는 피시방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길가에서 짧게 노래했다.

그때는 AI 전지인이 발성 기관의 임시 제어권을 받은 후에, 길을 걸을 때 들은 음악을 원곡 가수와 음정과 박작, 발음까지 완전히 일치하게 노래했다. 원곡 가수와 다른 건 음색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CF로 나갈 노래라 그러면 곤란했다. 이곳에 있는 장비로 녹음하면 길거리에서 휴대폰으로 녹음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음질의 음악 파일이 생긴다. 그 노래가 원곡과 발음의 특징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노래는 내가 할 테니까 넌 보정만 해. 기타는 다 네가 치고.”

- 노래는 다 외우셨습니까?

“네가 도와줘야지?”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통해 눈앞에 악보를 띄웠다.

“야. 이거 노래방 화면 느낌이 살짝 난다?”

- 개인 노래방 모드입니다. 전쟁터에서도 노래를 즐기는 사람은 많습니다.

“노래방 문화는 2082년에도 있구나. 이 모드에 미래의 히트곡도 들어 있…. 없겠지?

- 없습니다. 노래방 모드는 있지만, 음원 데이터는 사용자가 추가해야 합니다.”

“혹시나 했다.”

- 지구 연합군 군가는 있습니다.

“군가를 누가 노래방에서…. 됐다. 시작하자.”

나강인이 기타의 울림통을 손바닥으로 탁탁 친 후에 기타 줄을 튕겼다. 눈앞에 뜬 가사에 시작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됐다.

가사의 진행 방식은 현재의 노래방과는 조금 달랐다. 음과 박자의 미묘한 변화가 가사와 함께 기호로 표시됐다.

나강인이 노래했다. CM송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음정과 박자가 원곡과 미세하게 다를 때는 AI 전지인이 개입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안 좋은 쪽으로 커지려 하면 바로 개입했지만, 노래에 감정을 담느라 살짝 변하는 건 손대지 않았다.

나강인은 원래 목소리가 좋았다. 그 목소리를 AI 전지인이 추가로 보정했다. 목소리가 훨씬 더 좋아졌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 실력에 감탄했다.

“와아.”

“혹시 본업이 가수야?”

신은하도 놀란 눈으로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하다 하다 이젠 기타도 잘 치고 노래까지 잘해.”

그녀가 나강인을 몽롱한 눈으로 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강인은 지금 그 좋은 노래를 녹색 쫄쫄이를 입은 상태로 부르고 있었다.

신은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풋!”

나강인이 기타를 옆으로 치우며 벌떡 일어났다.

“나 이거 안 해!”

신은하가 얼른 사과했다.

“오빠, 미안해! 안 웃을게!”

“지금도 웃고 있잖아!”

“옷이라도,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CM송을 불러. 그렇게 입고 노래를 잘하니까 더 웃기잖아! 꺄하하하!”

PD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나강인 씨가 부른 거 CF에 그냥 써야겠어.”

조연출이 물었다.

“네? 원래 사용하던 음원이 아닌데요?”

“원래 가수보다 노래를 더 잘하잖아.”

“CF 찍는 내내 원래 음원으로 녹음했는데요?”

“음료수 마시는 장면은 이미 두 개 찍었잖아. 남은 두 개만 나강인 씨 목소리로 가는 거지. 이 부분만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면 더 기억에 남겠지?”

“어? 기존 음원 버전도 두 개가 있으니까 다채로워져서 더 좋겠는데요?”

“광고 마지막 부분에서만 나강인 씨의 노래가 나오는데, 그 확률은 50프로야. 그럼 이 노래가 혹시 나오는지 기다리느라 광고를 끝까지 볼 수도 있겠지?”

“와. 감독님. 광고주가 진짜 좋아하겠습니다.”

“광고가 반응이 좋으면 우리도 좋잖아. 그치?”

“물론이죠.

나강인이 녹색 쫄쫄이를 벗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 마이크가 정식으로 놓였다. 그 위치는 카메라 앵글에 들어가진 않지만, 배우들은 기타를 치는 그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강인이 노래했다.

신은하와 김유찬이 음료수를 마시는 장면을 연기했다.

마지막 두 장면은 아무런 사고도 없이 순조롭게 찍혔다.

***

CF는 일주일 뒤에 방송됐다.

먼저 TV로 광고가 나가고 곧바로 인터넷에도 광고 영상이 떴다. 인터넷용 공식 영상은 TV에는 없는 것들도 들어있었다.

피시방 삼인방이 모여서 인터넷으로 그 영상을 보았다.

윤아름이 말했다.

“가수 목소리가 강인 오빠하고 되게 비슷하다.”

안성환은 급할 때만 부르는 알바라 피시방에 매일 오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오늘은 굳이 이곳에 와서 같이 영상을 보았다.

안성환이 씩 웃으며 말했다.

“몰랐어? 이 CM송 강인이 형이 불렀잖아.”

윤아름이 고개를 휙 돌렸다.

“잉?”

“다 부른 건 아니고, 음료수 마실 때 두 가지 버전만 강인이 형이 불렀어. 아는 줄 알았는데?”

“말을 해줘야 알지!”

그들은 다시 인터넷용 CF 광고 영상을 틀었다.

사장 조카 차은서가 신은하가 싸우는 부분을 보며 말했다.

“근데 이 언니, 옛날 가닥이 나오네.”

안성환이 물었다.

“옛날 가닥이라니요?”

“은하 언니가 옛날에 우리 동네에 살았잖아. 그때 이 언니 흑역사…. 아니다. 자세히 말하면 이 언니가 날 죽일 거야.”

“에이. 은하 누나가 그럴 리가요. 은서 누나라면 몰라도.”

“네가 내 손에 죽고 싶구나?”

그들의 뒤쪽에서 신은하가 말했다.

“은서야. 너야말로 내 손에 죽고 싶구나?”

차은서는 뒤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라 변명했다.

“앗! 언니? 오해예요! 언니는 옛날부터 청순가련한 우리 동네 여신이었죠! 그 찬란한 빛역사를 동네가 아직도 기억해요!”

신은하가 손가락 두 개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지켜보고 있어.”

“넵!”

“강인 오빠는?”

“오늘 여기 안 왔는데요?”

신은하가 툴툴댔다.

“가수 데뷔 축하하려고 했더니 전화도 안 받아. 어디 간 거야?”

“가수 데뷔요? 강인 오빠는 CM송 하나 부른 게 다인데요? 이 짧은 노래 하나로는 공연을 못 하잖아요.”

“그렇다고 가수가 아니니? 어중간한 노래 하나보다 이게 낫지. 이제 강인 오빠가 부른 이 노래가 TV에서 엄청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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