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56화 (56/411)

56. 시나리오

나강인은 곽찬석 곽유선 남매와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그 레스토랑의 대표 셰프 전동선은 말을 좀 재수 없게 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음식은 훌륭했다.

“맛있네.”

AI 전지인도 만족했다.

- 맛있습니다.

AI 전지인은 직접 만든 요리보다 남이 만든 음식을 더 좋아한다. 그것이 설사 라면이라도 남이 만든 걸 더 원하는데, 오늘은 전동선이 서비스를 워낙 많이 줘서 식탁이 굉장히 풍성했다.

- 여기 사장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연로보틱스는 진짜 대단하구나. 우리 지인이가 서비스 요리 몇 개에 매수당했네?”

- 성의를 받아들이는 관대함이라고 해 주십시오.

“변명도 잘하고.”

식사 도중에 곽찬석이 CF 촬영장에서 문제를 일으킨 장비 이야기를 꺼냈다.

“나강인 씨가 수리한 LED 조명 제어장비 말입니다. 왜 고장 났는지 밝혀졌습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그 장비에 누군가 고장이 나게 미리 손댔을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손댄 놈이 누구입니까?”

“어? 알고 계셨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는요.”

“하긴. 그 장비를 고치신 분이니까….”

“임시로 땜빵만 한 건데요. 그래서 범인이?”

“이전에 그 CF를 맡았다가 계약이 해지된 제작사의 사장이, 새 제작사에 엿을 먹이려고 장비에 수작을 부린 후에 빌려줬습니다.”

“새 제작사가 잘리면 CF 제작 일정을 맞춰줄 수 있는 곳은 원래 제작사뿐이니까?”

“맞습니다. 이미 한 번 준비했던 곳이니까요. 그래서 촬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다시 CF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곽찬석이 포크로 음식을 콱 찍으며 말했다.

“그놈은 그거 한 대만 손댄 게 아니라, 우리 막내가 다루던 장비에도 수작을 부렸습니다. 그 장비도 그 회사에 갔다가 왔거든요.”

“적당히 고장 내려다가 실수해서 감전사고가 날 정도로 망가뜨린 거군요.”

“역시 그놈들이 그렇게 말하리란 것까지 예상하고 계셨군요.”

그건 지금 듣고 알았다.

곽찬석이 계속 설명했다.

“그놈들은 그 정도로 망가진 줄은 몰랐다고 잡아떼더군요.”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곽찬석이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리 막내를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 민간인 구조는 지구 연합군의 기본 임무입니다.

“구할 수 있으니까 구한 것뿐입니다.”

“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강인이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그래서 그 일을 저지른 사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당장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저만 신고한 게 아니라 CF 제작사, 그리고 광고주까지 다 나섰습니다. 그놈은 이제 끝났습니다.”

“광고주도 열 많이 받았겠네요.”

“광고주가 강인 씨에게 고마워한다고 들었습니다.”

“저한테요?”

“그 음료는 그 회사가 작정하고 만든 신제품입니다. 저에게 의뢰해서 CM송을 새로 만들 정도로 공을 들였죠. 그런데 CF를 찍다 사망 사고라도…. 생각만 해도 또 화가 나네요. 만약 그랬으면 그 음료는 광고 없이 팔아야 했을 겁니다. 그것도 뒷소문이 무성한 상태로요.”

나강인이 잘 요리된 새우를 먹었다. 맛있었다.

“그 회사 음료는 저도 좋아합니다. 잘 해결됐으면 됐죠.”

식후에는 디저트가 나왔다.

나강인의 자리에는 디저트가 원래 코스에 들어있는 것보다 많이 나왔다.

김유찬이 따졌다.

“아니, 사장님? 왜 우린 디저트가 하나씩인데 저긴 두 종류씩….”

대표 셰프 전동선이 대답했다.

“서비스입니다.”

“아, 예. 그러시겠죠.”

김유찬이 디저트를 맛본 후에 말했다.

“이걸 먹으니까 강원도 세트장에서 먹었던 그 디저트가 생각납니다. 그거 정말 맛있었는데.”

전동선이 물었다.

“디저트요?”

“티라미수 비슷하면서도 과자가 씹히는 그런 조각 케이크였는데, 진짜 맛있습니다.”

“어디서 산 겁니까?”

“나강인 씨가 그 세트장 밥차에서 만든 거죠.”

전동선이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나강인은 후식 디저트를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요원님. 돈을 더 벌어서 자주 먹으러 오십시오. 맛있습니다.

곽유선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강인 씨가 만드셨다는 그 디저트,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어요.”

나강인이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내가 있는 피시방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한번 들러요. 내가 거기 없을 때가 많으니까 미리 연락하고요.”

곽유선이 얼른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가르쳐주세요.”

나강인에게 이 레스토랑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한 건 곽찬석이다. 곽유선은 곽찬석에게 물어보면 그의 번호를 알 수 있는데도 일부러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강인이 번호를 찍어주었다. 곽유선이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에 배시시 웃었다. 이제 곽유선의 번호가 나강인의 휴대폰에 남았다.

나강인이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옆을 보았다. 김유찬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어? 강인 씨. 그 피시방에 가면 그 디저트를 먹을 수 있는 거였습니까?”

“제가 있을 때 오면 그렇죠. 은하는 가끔 와서 디저트를 상자에 담아갑니다만?”

김유찬은 분노했다.

“은하 이 배신자! 나도 좋아하는데 그동안 혼자 몰래 먹었어!”

***

이튿날 ‘햇살 좋은 날’의 배우 김유찬과 신은하, 그리고 감독 손태민과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7층 레스토랑 페넬로페에 모여 식사를 했다.

모임 명분으로는 영화 대박을 축하한다는 걸 써먹었다.

이태호가 벽에 꽂힌 총알 자국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날 여기서 벌어진 전투를 바로 앞에서 보니까, 진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이런 거구나 싶더군요.”

신은하가 자랑했다.

“맞아요. 그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강인 오빠가 저를 구하러 왔잖아요.”

“저는 총을 들고 포로를 감시했습니다. 한 놈은 반항하길래 쏴버리기도 했죠.”

이태호의 자랑이 너무 셌다. 신은하가 놀라서 물었다.

“네? 사람을 죽였어요?”

이태호가 와인잔을 느긋하게 돌리며 웃었다.

“후후후. 죽이고 싶었으면 머리를 쐈겠죠. 일부러 방탄조끼 위에 쏴서 도로 기절시켰습니다.”

“와…. 이 사장님도 총 좀 쏘시는구나.”

“제가 군대를 병장 만기 제대했습니다. 하하하.”

손태민 감독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쉬워했다.

“그때 나도 이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내가 그걸 직접 경험했으면, 다음에는 진짜 실감 나는 액션 느와르를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신은하가 고개를 돌렸다.

“어머. 감독님은 로랜스가 주력이시잖아요. 로코 액션 한 번 하시더니 다음에는 진짜로 액션 느와르로 가시게요?”

“은하 씨. 내가 말이야. 로맨스로는 명성을 얻을 만큼 얻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이젠 액션 느와르를 해도 되겠다 싶네?”

신은하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그 영화에서 전 여자 주인공을 할까요?”

“오디션은 봐야지?”

“쳇.”

김유찬이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신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은하야. 너 말이야.”

“왜요? 오빠는 그냥 캐스팅될 거 같아요?”

김유찬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이번 영화에서 얼마나 터프했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야수성 꽃미남이래.”

“액션은 실제로는 강인 오빠가 다 했는데 야수는 무슨. 괜히 따라 하다가 손목만 다쳤으면서.”

신은하의 말 돌리기에 넘어갔던 김유찬이 그 이름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 내가 이거 이야기하려던 게 아니지. 너 말이야. 강인 씨한테 가서 디저트 얻어간다며?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앗! 어떻게 알았지?”

김유찬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쳤다.

“야! 어떻게 너 혼자 좋은 걸 먹을 수 있어?”

“나만 먹는 거 아닌데?”

“너 말고 배신자가 또 있단 말이냐!”

이태호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딸이 좋아해서 말이죠.”

김유찬은 멈칫했다. 싸울 상대가 둘이 되면 김유찬이 밀린다.

“어…. 민지야 뭐… 애니까 그럴 수도 있죠.”

“미정이도 좋아하고.”

“선배님도 뭐….”

“나도….”

“이 사장님. 어디까지 하실 겁니까?”

신은하가 물었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알았어요?”

“나 어제 마포 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나강인 씨를 만났다.”

“엥? 강인 오빠가 유찬 오빠를 왜 그런 곳에서 만나요? 한턱 쐈나? 나도 부르지.”

“거기 다른 약속으로 갔다가 우연히 만난 거야. 그런데 강인 씨는….”

김유찬이 씩 웃었다. 방금 밀린 걸 뒤집을 무기가 생각났다.

“강인 씨가 젊은 아가씨하고 거길 왔더라고.”

신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왼쪽 광대 주변도 살짝 경련했다.

그녀는 배우다. 표정은 좀 굳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평소 톤 그대로였다.

“일 때문에 상담하러 만났나 보죠.”

“거기는 여기랑 비슷하게 고급인 레스토랑이야. 그런 곳에서 무슨 상담을 하냐?”

“흥. 그래서 뭐? 예뻐요?”

“예쁘더라.”

“나보단 못할걸? 나보다 예쁘면 배우를 했겠…. 어?”

신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배우는 아니죠?”

“흐흐. 글쎄?”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대표 셰프 오규철이 다가왔다.

“배우가 아니라 음향 엔지니어입니다. 곽찬석 작곡가의 여동생이라더군요.”

신은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녀는 김유찬에게는 대놓고 묻지 못하던 걸 물었다.

“오 셰프님도 어제 거기 계셨어요?”

“후배가 하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강인 오빠가 그 여자하고 단둘이 왜 거기서 만났는데요?”

김유찬이 신은하를 살살 긁었다.

“데이트 아닐까?”

“유찬 오빠는 좀 닥치고요.”

오규철이 웃으며 설명했다.

“최근에 CF 촬영장에서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나강인 씨가 곽유선 씨를 구해줬다더군요. 그래서 고맙다고 밥을 산다던데요.”

신은하도 그 CF에 나온다. 그녀는 곽유선이 누군지 깨달았다. 재빨리 얼굴과 몸매부터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신은하가 여유를 가지며 웃었다.

“훗. 내가 이겼네.”

오규찬이 설명을 보탰다.

“곽유선 씨의 오빠인 곽찬석 씨와 같이 만났으니까 데이트일 라도 없고요.”

신은하가 즉시 김유찬을 째려보았다.

“이거 뭐지? 이야기가 많이 다른데요?”

김유찬이 아쉬워했다.

“에이. 놀리는 거 재미있었는데.”

“캬아악!”

이태호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만 모르는 것 같은데요.”

김유찬이 물었다.

“이 사장님도 나강인 씨가 어떤 여자분을 만났는지 궁금하세요?”

“아뇨. CF 사고 말입니다.”

“아. 그거 광고주 쪽에서 입단속을 시킨 데다가, 아직 수사 중인 사건이라 기사가 안 나갔는데….”

“CF가 유명해지면 촬영장 비화도 알려질 겁니다. 유찬 씨가 우리 영화 촬영장에서의 일을 라디오 방송에서 함부로 말한 것처럼요.”

지은 죄가 있는 김유찬이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시작은 연예기획사 몇 곳이 해킹당한 것부터인데요.”

그는 나강인이 해커를 역추적한 이야기와 CF 촬영 현장에서 장비를 수리한 이야기, 그리고 감전사고가 터졌을 때 곽유선을 어떻게 구출했는지를 설명했다.

셰프 오규철도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는 곽유선을 구한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해킹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신은하는 다 아는 이야기다. 그녀는 해커를 역추적할 때도 나강인의 옆에 있었고 CF를 찍을 때도 옆에 있었다.

손태민 감독과 이태호는 전부 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손태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기를 켰다.

“나 지금 새 영화 시나리오가 떠올랐어. 국내 최고 여배우의 약점을 쥐고 있는 기획사 사장. 기획사 컴퓨터를 해킹해 그 약점을 빼내서 여배우를 손에 넣으려는 악당. 연쇄 살인마도 넣고, 대기업과 조폭 조직도 하나씩 넣어서 액션도 추가하고.”

손태민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그 여배우와 같은 편은 남자 주인공 해커 한 명밖에 없는 거지. 둘이서 적에게 쫓기기도 하고, 역으로 적을 해킹하고, 그러다 추적당해서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고, 다치고, 죽을 위기도 넘기고.”

손태민이 활짝 웃었다.

“이야아. 이러면 격투만 중요한 게 아니라 탈출 과정도 굉장히 중요하겠네.”

손태민은 원래 로맨스로 유명한 감독이다. 신은하가 물었다.

“로맨스는요?”

“중간부터는 로맨스도 넣어야지. 전장에서 꽃피는 사랑. 키스신도 넣고 베드신은…. 그건 시나리오 쓰면서 결정해야지.”

손태민이 자기 이야기에 신나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크으. 좋다. 이러면 무술감독은 나강인 씨한테 부탁하고, 해킹 자문도 나강인 씨한테 부탁하면 되겠네?”

신은하가 얼른 손을 들었다.

“앗! 감독님. 저 그 영화 여주인공이요. 네?”

“아직 시나리오도 안 썼어.”

“시나리오 엄청 빨리 쓰시잖아요.”

“오디션부터 보라니까.”

“저는 여주인공 시켜주고 남주인공은 강인 오빠 시키면 안 돼요? 그럼 대역 쓸 필요도 없잖아요.”

“강인 씨는 배우가 아닌데 그런 연기를 어떻게 해?”

THO 엔터 사장 이태호는 나강인이 자칼 일당의 손에서 그를 구할 때 어떻게 연기했는지 똑똑히 봤다.

이태호가 말했다.

“어…. 나강인 씨는 연기를 굉장히 잘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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