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57화 (57/411)

57. 방탄조끼

손태민 감독이 눈을 끔뻑이다가 피식 웃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말했다.

“진담입니다. 나강인 씨는 대사를 진짜 실감 나게 칩니다.”

“이 사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바로 이 건물에서 봤으니까요. 나강인 씨는 그 국제 용병들과 싸울 때 그놈들을 속이려고 무전기로 성대모사를 했습니다. 그 목소리 연기에 안 속는 놈이 없었습니다.”

손태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그런데 진짜 대박은 그때 저에게만 보여준 표정과 손짓 연기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과 몸으로 행동하는 연기의 의미가 서로 달랐는데, 표정과 손짓 쪽이 진짜라는 걸 바로 알겠더라니까요.”

이태호는 독립영화를 몇 편 찍어본 사람이다. 비록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부족하지만, 연기자를 보는 눈까지 없는 건 아니다.

손태민 감독은 진지해졌다.

“확실히 나강인 씨는 몸을 쓰는 격투 연기는 잘하지요. 거기다 표정과 손짓, 대사까지? 카메라 테스트를 한번 해봐야겠군요.”

신은하가 옆에서 말했다.

“헐. 강인 오빠는 하다 하다 이제 연기까지 잘해.”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제안했다.

“나강인 씨가 방금 말씀하신 영화에 출연하면 우리 회사가 직접 투자해서 제작하고 싶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아직 아이디어만 몇 줄 적은 건데요?”

“손태민 감독님의 로맨스와 나강인 씨의 액션이 동시에 나오는 영화인데, 잘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이태호는 옵션을 하나 더 걸었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예산 문제만 아니라면 영화 시나리오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투자자의 입김 없이 감독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조건이다. 그러다 흥행에서 망하는 영화도 많지만, 손태민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흥행 감독이라 그럴 위험은 낮았다.

손태민의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

“음…. 일단 시나리오부터 나온 후에 이야기하시죠. 저도 지금은 아이디어 수준이고, 나강인 씨가 영화에 출연할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시나리오가 나온 후에 하기로 하고.”

이태호가 김유찬에게 물었다.

“해킹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만. 나강인 씨가 해킹을 그렇게 잘합니까?”

“해커를 잘 잡긴 하던데요.”

신은하도 말을 보탰다.

“제가 잘 아는 해커 동생이 그러는데 강인 오빠는 진짜 쩌는 실력자래요. 근데요. THO 엔터는 영화와 공연이 전문인데 이 사장님이 그건 왜….”

***

이튿날 나강인은 서울 외곽에 있는 제작 거점으로 갔다.

오늘은 새로 주문한 설비가 들어오는 날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오늘은 제작 거점이 제대로 가동되는 첫날입니다.

“기대되냐?”

- 지나치게 구형 장비라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 목소리가 평소보다 밝아.”

장비는 오전에 배송됐다.

업체에서 나온 사람들이 철공소에 장비를 설치하며 물었다.

“여긴 원래 철공소였던 것 같은데, 업종을 바꾸시나 봐요?”

“그냥 이것저것 취미 삼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어우. 우리 장비는 최신형이라 비싼데 이걸 취미로….”

AI 전지인이 말했다.

- 60년 전 구형 장비입니다.

“우리 지인이. 또 목소리 밝아졌다.”

출장 나온 사람들은 장비를 모두 설치한 후에 돌아갔다.

나강인이 손을 비볐다.

“어디, 쇠부터 잘라보자.”

이곳은 원래 철공소였다. 조금 뒤져보기만 해도 안 쓰는 철판 조각이 나왔다.

나강인이 그중 하나를 레이저 커팅기에 올려놓았다.

“지인아. 너 이런 기계 좀 아냐?”

- 낙후된 지역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할 때는 쇳조각과 나뭇가지로 창을 만들어서 싸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구형 장비라 해도 사용법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장비도 쓸 줄 알겠네?”

- 범용 사용법을 알고 있습니다.

“범용? 그럼 이 장비는 몰라?”

- 범용 장비 사용법을 이 장비용으로 변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공부해야 한다는 거네?”

- 예.

나강인이 장비 사용 설명서를 꺼냈다. 설명서의 두께가 어지간한 책보다 두꺼웠다.

“해라. 열심히.”

나강인은 설명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AI 전지인이 그의 손을 빌려 종이를 부지런히 넘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천천히 한줄 한줄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AI 전지인은 책자를 한 줄이 아니라 한 페이지씩 이미지를 뜬 후에 분석했다.

두꺼운 설명서의 페이지를 모두 넘기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간 후에 나강인이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우. 끝났냐? 야. 눈 뻑뻑하다.”

- 눈을 부릅뜨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멍하니 있으니까 졸려서 그랬어. 자. 그럼 이제.”

나강인이 손을 비볐다.

“테스트다. 이 쇠를 잘라보자.”

AI 전지인이 장비 조작법을 홀로그램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나강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장비를 제어했다.

나강인이 올려놓은 철판을 레이저가 긁었다. 얇은 쇠가 천천히 잘려나갔다.

“잘린다! 와! 잘려!”

- 성능이 부족합니다. 더 좋은 장비가 필요합니다.

최신형이라고 해서 성능까지 최고사양인 건 아니다. 출력이 더 강한 레이저 커팅기는 더 비싸다.

“우리 예산으론 이게 최선이다.”

- 최근에 활동 예산을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더 좋은 장비를 살 수 있습니다.

“너 솔직히 말해봐. 그냥 새 장비가 갖고 싶어서 그런 거지?”

- 더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서입니다.

“됐어. 이미 산 건 어떻게든 써봐야지. 네가 이 장비의 성능을 강화할 수는 없냐?”

- 저는 전투지원 AI 부관이지 산업용 AI가 아닙니다. 이런 정밀 장비의 업그레이드는 제 능력을 벗어납니다.

“언제는 구형 장비라더니?”

- 이만하면 그럭저럭 쓸만합니다.

“그럼 이 제작용 장비들을 잘 써서 내가 쓸 개인장비를 만들어보자. 뭘 먼저 만들까?”

AI 전지인이 즉시 제안했다.

- 요원님은 지금 비무장 상태입니다. 무기가 필요합니다.

“칼? 철판을 잘 자르면 단검용 칼날을 만들 수 있겠네.”

- 당연히 총입니다. 총부터 만드십시오.

“이 시대의 한국에서 총을?”

- 안 들키면 됩니다.

“시끄러워.”

뭘 만들지는 금방 결정됐다.

“방어구부터 만들자. 그건 들켜도 불법이 아니니까. 네가 이 장비로 만들 수 있는 방어구는 어떤 게 있냐?”

- 현재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개인 맞춤형 드래곤 플레이트를 제안합니다.

“그게 뭔데?”

눈앞에 반투명 홀로그램이 떴다.

사람의 상체와 비슷한 형태의 방탄조끼가 나타났다. 두께는 사슬갑옷처럼 얇고 표면은 비늘갑옷 같은 무늬로 뒤덮여 있었다.

- 어깨 일부와 가슴, 배를 보호하는 방탄조끼입니다. 어깨와 목 보호대를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거 표면이 얇은 조각 수백 개를 짜 맞춘 것처럼 생겼다? 그리고 잘 보면 조각의 모양이 다 제각각이네? 이거 무슨 그림 퍼즐이냐?”

- 드래곤 플레이트는 사용자의 신체에 맞는 충격 분산 구조를 정밀하게 계산한 후에, 부품 하나하나를 계산 결과에 맞춰 다른 형태로 제작하여, 정확하게 조립해야 완성됩니다. 그래서 표면이 조각 퍼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한땀 한땀 만드는 명품이네? 용도는?”

- 개인 맞춤형 방탄조끼입니다.

“재료는 특수한 합금 소재를 쓰겠지? 그 합금도 만들 수 있냐?

- 저는 전투지원 AI라 합금 제조 기술은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나 했다. 넌 콜라 만드는 비법도 모르고 합금 제조 기술도 없구나.

- 전쟁터에서 금속 소재를 새로 만들 리가 없잖습니까?

“그건 그래. 굴러다니는 철판을 자르고 펴서 쓰겠지.”

- 이 드래곤 플레이트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금속판을 잘라서 만들어야 합니다.

나강인이 홀로그램 영상 속 방탄조끼를 보며 물었다.

“방어력은?”

- 두께를 두껍게 할수록 방어력은 올라갑니다.

“옷 속에 입으면 표가 안 날 정도로 얇으면서 총알을 막으면 좋겠는데.”

- 방어력을 낮추면 가능합니다.

홀로그램으로 표시된 방탄조끼의 두께가 얇게 변했다.

- 타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완전 충격 분산으로 5.56mm와 7.62mm 저격소총탄 한 발을 확실히 막는 디자인과, 9mm 권총탄 여러 발을 방어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설마 저격소총을 쏘는 놈이 있겠냐? 자칼 패거리가 권총 들고 날뛴 것도 특이한 일이었는데. 권총탄 방어로 가자.”

- 요원님의 상체를 기준으로 계산할까요?

“그래. 내 몸을 가지고 계산…. 어? 잠깐.”

나강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야. 사람의 몸매는 살다 보면 변할 수도 있잖아.”

- 약간의 체형 변화는 고려해서 설계합니다. 다만, 설계 당시와 비교해 체형이 변한 만큼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어…. 몸매가 많이 변하면?”

- 요원님의 경우는 배가 나오면 방어력이 감소합니다.

“원래 배가 나온 사람은 살이 빠지면 안 되고?”

- 물론입니다. 지나친 체형 변화는 방어력을 크게 떨어뜨립니다.

“이거 진짜 개인 맞춤이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면 어떻게 되는데?”

- 체형이 차이 나는 만큼 방어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드래곤 플레이트는 개인 귀속 장비로 취급됩니다.

“그럴 거 같더라. 어쨌든 지금 우리 장비로 이걸 만들 수 있는 거지? 재료는 안 모자라고?”

- 지난번에 배송받은 금속 소재로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당장 설계부터 시작….”

전화가 왔다. THO 엔터 사장 이태호였다.

“여보세요.”

- 강인 씨. 이태호입니다.

“아, 예. 무슨 일로?”

- 제가 어제 페넬로페에서 저녁을 먹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커를 잘 잡으신다고요?

“아아. 그거요? 그냥 애송이 한 놈 잡은 겁니다.”

- 그 해커의 위치를 겨우 4분 만에 찾아냈다면서요.

“네, 뭐. 쉽더라고요.”

- 그래서 연락드렸습니다.

“음? THO 엔터가 해커의 공격을 받았습니까?”

- 그건 아닙니다. 요즘 연예계 회사들을 노리는 해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회사도 전문 보안업체와 계약해 방화벽 시스템을 보강했습니다.

“제가 잡아준 놈 외에도 해커가 있나 봅니다?”

- 강인 씨가 그놈을 잡은 후에도 해킹당한 연예 기획사가 있습니다.

“쯧. 하긴. 세상에 해커가 그놈 한 놈밖에 없을 린 없죠.”

- 이번에 보강한 그 시스템을 점검해 주십시오.

나강인이 휴대폰을 입에서 멀리 떨어뜨리며 작게 말했다.

“나보고 그 시스템을 뚫어달라는 건가? 지인아. 할 수 있지?”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 해킹 스킬은 신분 위조 등에 제한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해킹방어는 그런 제한이 없잖아.”

- 그렇습니다.

“THO 엔터에 설치된 게 지금 세상 기준으로 상급 해킹방어 시스템인지 확인할 수는 있겠네? 그것도 해킹방어 활동이잖아.”

- 그건 가능합니다.

그가 다시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내일 들르면 되겠습니까?”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나강인은 이튿날 THO 엔터를 찾아갔다. 혼자가 아니라 대학생 해커 안성환을 데려갔다.

안성환이 THO 엔터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와아. 건물 좋다.”

“임대래. 저기서 두 층만 쓰는 거야.”

“영화사랑 공연 기획사를 같이 하는데도 두 층으로 되는구나. 하긴. 연예인을 키우는 회사는 아니니까 연습실이나 녹음실 같은 건 필요 없겠네요.”

“음? 이 회사 유명하냐?”

“글쎄요? 전 연예인이 없는 회사는 관심이 없어서….”

“여자 연예인이겠지.”

“당연한 거 아녜요?”

이태호가 나강인을 맞았다.

“강인 씨. 일찍 오셨군요.”

“오전에 시간이 나서요.”

“제 방으로 가서 차라도 한 잔 드시고 시작하시죠.”

이태호가 나강인과 안성환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직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다.

“누군데 사장님이 마중까지 나가신 거야?”

그 회사 직원 중에는 영화 촬영장에서 나강인을 본 사람이 있다.

“나강인 씨야.”

“어? 저 사람이 그 나강인 씨?”

다른 직원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와. 우리 일어나서 박수라도 쳐야 하는 거 아냐? 덕분에 영화 대박 나서 우리도 보너스 받게 됐잖아.”

“오버하지 말고 앉아 있어. 나강인 씨는 연예인이 아니라서 지나친 시선은 부담스러워한대.”

“응? 연예인 다 된 거 아니었어?”

다른 쪽으로 감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직원 두 명이 속닥였다.

“김유찬의 대역도 했다더니, 진짜 몸매가 연예인 몸매다.”

“딱 내 스타일인데 여친 있을까?”

“없어도 박 대리랑은 상관없겠지?”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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