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드래곤 플레이트 III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은 동생인 THO 엔터 사장 이태호의 차를 타고 나강인의 제작 거점으로 이동했다.
이태호가 불평했다.
“내가 운전까지 해야 해?”
“네 차로 가야 하니까.”
“진짜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는 거 맞아?”
“물건을 본 우리가 기술의 출처를 못 찾아낼 정도면, 경쟁업체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거다. 그럼 계속 모르게 해야지.”
“그 기술의 출처는 전화로 물어봐도 되잖아.”
“이건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니다. 출처가 어디인지 외에도 이야기할 게 많아.”
이태호가 큰소리쳤다.
“거기가 어디든 나강인 씨하고 관계가 있을 텐데, 내가 또 나강인 씨랑 가벼운 인연이 아니야.”
“이쪽 사업은 네가 있는 영화계와는 달라. 인맥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형이 잘못 알고 있는데, 영화계도 인맥만으로 일하는 건 아니야. 우리도 따질 건 다 따진다고.”
그들은 서울 외곽에 있는 나강인의 제작 거점 앞 공터에 도착했다.
이태성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여기 맞아?”
“주소는 맞아.”
“간판이…. 지구연합 제작실? 뭐야? 이게.”
나강인은 새로 산 장비의 성능을 테스트하면서 철판에 글자도 새겨보았다. 지구연합이라는 글자는 특별한 의미 없이 그냥 새겼다.
그는 그 철판을 버리기 아까워서 간판 자리에 임시로 달아놓았다.
이태호가 말했다.
“강인 씨가 SF 영화도 관심이 있나 봐.”
이태성이 딴죽을 걸었다.
“지구연합이면 SF라기보다는 재난영화 아니냐? 외계인이 쳐들어왔으면 지구가 연합해야 하잖아.”
“외계인 나오면 SF잖아.”
“외계인 대신에 몬스터 같은 게 나오면?”
“그럼 SF가 아니라 퓨전 판타지지.”
이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어쨌든 둘 다 영화잖아. 역시 나강인 씨는 영화를 해야 해.”
이태성이 문의 벨을 눌렀다.
“내가 물어볼 거 다 물어보고 나면 영화판에 끌어들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들어가자.”
잠시 후에 나강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태성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입니다.”
“들어오시죠.”
이태성이 예전에는 철공소였던 제작 거점에 들어갔다.
“어….”
한쪽에는 오래된 금속 절삭기계가 있었다. 원래는 망가져 있던 것인데 최근에 나강인이 직접 수리했다.
반대쪽에는 신형 레이저 커팅기 같은 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양쪽 장비가 너무 다른데?’
이태성이 처음부터 철인기공의 본부장이었던 건 아니다. 사장 아들이라서 고속 승진하긴 했지만, 일은 밑바닥부터 배웠다. 현장 경험도 많아서 여기 있는 장비들이 어떤 것인지 안다.
‘왼쪽 장비들을 쓰면 큰 쇠를 가공하기 좋고, 오른쪽 장비들을 쓰면 부품을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겠어. 그런데 왜 이런 게 여기에….’
이태성과 달리 이태호는 처음부터 영화판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런 제작 현장은 잘 모른다.
이태호가 물었다.
“와. 강인 씨. 이게 다 뭡니까?”
“이것저것 만들어보느라고요.”
“이야아. 이런 취미가 있으니까 CF 촬영장에서 고장 난 장비들을 그렇게 쓱쓱 고칠 수 있었군요.”
나강인이 믹스 커피를 타서 두 사람에게 주며 말했다.
“뭐, 그렇죠.”
이태성이 명함을 내밀었다.
“이태성입니다.”
“나강인입니다. 전 명함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예의상 몇 마디를 더 건넨 후에 이태성이 본론을 꺼냈다.
“저희 회사 사격장에서 테스트한 방탄팔찌 말입니다. 그건 어디 제품입니까?”
팔찌라고 부르기엔 폭이 좀 넓었지만, 어차피 임시로 만든 것이라 호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음. 그냥 만들어본 겁니다만.”
“설마 여기서 말입니까?”
나강인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렇죠?”
그곳에 새로 만드는 드래곤 플레이트의 일부분이 있었다. 크기는 아직 손바닥 넓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
그걸 확인한 이태성이 내부를 다시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장비를 쓰면… 불가능한 건 아니겠군요. 그러면 말입니다.”
이태성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팔찌는 어느 회사의 무슨 기술로 만든 겁니까?”
“음….”
- 자연로보틱스의 야전 방어 장비 제작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정규 장비의 손실이 심하고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열화판 장비라도 제작해야 할 때 사용하는 기술입니다.
AI 전지인이 말한 대로 설명할 순 없다. 지구연합이라는 단어는 인터넷만 뒤져도 잔뜩 나오지만, 자연로보틱스라는 이름은 상황이 좀 다르다.
나강인이 그냥 대답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네. 제작을 직접 하신 건 압니다. 그러니까 거기 사용하신 기술이….”
“그러니까 제가 만들었습니다.”
“예? 기술도요?”
이태성은 당황했다.
“혹시 학위가….”
“학교에서 배운 건 아니고요.”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럼….”
이태호가 이태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 민지 생명의 은인이야. 그렇게 따지듯이 묻지 마.”
이민지 납치 사건 때만 신세를 진 게 아니다. 나강인 덕분에 철인기공의 경영권이 공격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이태성이 가만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알려주기 싫어서 그러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진 않는다. 억지로 대답을 들을 수도 없다.
대신에 대답을 유도할 방법은 있다.
이태성이 제안했다.
“저희 회사에서는 테스트하신 방탄 소재 제작 기술을 사고 싶습니다.”
“그걸 사서 뭘 하시려고요?”
“당연히 방탄복을 대량생산해서 팔아야지요. 외국의 군과 경찰은 물론이고 민간 수요도 상당할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 군대에 팔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음….”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지인아. 저게 가능한 일이냐?”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드래곤 플레이트는 사용자마다 다르게 제작해야 하는 개인 맞춤형 방어 장비입니다. 현재 기술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합니다.
나강인이 설명했다.
“그거 개인 맞춤형입니다. 몸에 안 맞는데 억지로 입으면 총알을 못 막습니다. 대량생산은 어려울 겁니다.”
“예?”
“그러니까, 사용자의 체형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계산해서 부품 하나하나를 한땀 한땀 만들어 조립해야 하는 방어 장비입니다.”
“수제 명품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이태성은 쉽게 생각했다.
“그럼 그 측정법과 계산법을 사면 되겠군요. 저희가 그 기술을 산 후에 잘 연구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법을 찾겠습니다.”
“계산법이라…. 그건….”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저도 모릅니다.
나강인이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면서 작게 속삭였다.
“왜 몰라? 네가 만들었잖아.”
- 자연로보틱스의 계산 스킬을 사용하면 제품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 계산 스킬의 원리를 가르쳐주면 되잖아.”
- 그 계산 스킬은 독립 라이브러리에 들어 있습니다.
“응?”
“따라서 제가 그 스킬을 사용해 계산할 수는 있지만, 수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강인이 물었다.
“잠깐만. 지인아. 네가 그동안 스킬이라고 말했던 기술들 말이야. 혹시 전부 다 그런 독립 모듈로 있는 거야? 네가 직접 계산하는 게 아니고?”
-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습니다. 저는 독립 모듈에 데이터를 입력한 후에 계산 결과만 받아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전자계산기나 컴퓨터에 데이터를 넣고 그 결과만 받아보는 것처럼?”
-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읽습니다.
“계산은 스킬이 다 하면, 그럼 넌 뭘 하는데?”
- 저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인간 수준의 사고 능력 구현은 독립 모듈의 단순 계산 스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차원 기술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나강인은 깨달았다.
“지인아. 넌 정말 아는 게 없구나?”
- 그건 아닙니다.
“그거 맞아.”
어쨌든 결론은 났다.
AI 전지인이 도와주면 드래곤 플레이트를 만들 수는 있지만,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해줄 방법은 없다. 이론을 정리해 발표할 수도 없고 기술 문서를 만들 수도 없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강인이 얼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그건 저만 알고 있으려고요.”
“예?”
“기본 수식은 있는데, 변수 부분은 어차피 감에 의존해서 하는 거라 남이 써먹을 수 있는 수식이나 이론으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이태성은 당황했다. 공개하지 않겠다고 해서 당황한 게 아니라, 나강인만 아는 기술이라는 부분 때문에 당황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진짜 그 방탄팔찌를 개발하신 겁니까? 혼자서? 아니, 어떻게요?”
“그 사격장이 원래 저처럼 혼자 만든 장비를 테스트하는 곳이잖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 많을 텐데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런 수준의 기술을 개인이 만들어서 테스트한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전에는 없었어도 이번에 했잖습니까?”
이태성은 나강인의 말이 진실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세상에 괴짜 과학자가 없는 건 아닌데….’
어쨌든 물건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게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술 이전 협상을 정식으로 하시죠. 저희가 만족하실만한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가르쳐줄 수도 없지만, 설사 가르쳐준다고 해도 어차피 대량생산은 불가능하다니까요.”
이태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예산만 충분히 투입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철인기공의 장비도 모두 자동화가 가능한 건 아니다.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나강인이 만든 방탄 팔뚝보호대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건 보통 기계로 만드는 게 생산성이 더 좋다.
이태성은 고민했다.
‘기술을 공개하기 싫다는 걸까? 아니면 값을 올리려는 걸까? 기술 이전비를 화끈하게 지르면 팔려고 할까?’
나강인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태성이 발신자를 곁눈질로 슬쩍 보았다.
‘어? 스칼렛 켈리?’
어차피 대화는 잠시 중단된 상태다.
나강인이 그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하이. 강인 씨. 스칼렛이에요.
“압니다.
- 나 조만간 한국에 갈 거예요. 그때 우리 만나요.
“뭘 굳이….”
- 내가 전에 말한 선상파티 말이에요. 크고 화려하게 준비하고 있거든요? 나강인 씨의 요리 솜씨는 진짜 대단하잖아요. 와서 우리 파티 요리 어드바이스를 좀 해줘요.
“그걸 굳이 내가 왜….”
- 컨설팅 비용은 섭섭하지 않게 지급할게요.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 통이 큰 여자입니다. 조언만 좀 하면 돈도 받고 맛있는 요리도 먹을 수 있습니다. 어서 받아들이십시오.
스칼렛의 제안은 AI 전지인이 조르는데도 거절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일정 보내시죠.”
- 고마워요. 아. 당연히 강인 씨가 그 파티에도 참석하는 조건이에요.
전화는 나강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끊어졌다.
나강인이 혀를 차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태성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오메가테크의 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일정을 보내? 무슨 일정? 혹시 기술 이전 협의?’
오메가테크는 미국 회사다. 그 회사는 각종 장비와 로봇, 그리고 군사용 기술로 유명하다. 철인기공과는 사업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제법 있다.
‘진짜 이 남자에게 그 방탄 소재를 만들 기술이 있는 건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방탄팔찌가 권총탄을 막아낸 영상은 확실히 존재한다.
‘우리가 오메가테크보다 먼저 진행해야 해. 일단 해보고 아니면 그때 포기해도 되니까.’
이태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팔찌로 어떤 물건까지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방탄조끼죠.”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 좋은 소재로 팔찌만 만드는 건 이상하니까요. 그럼 방탄조끼 설계는….”
“설계는 이미 끝났습니다. 사격장에서는 샘플 테스트만 한 겁니다.”
이태성이 마음을 굳히고 물었다.
“강인 씨.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대량생산은 포기하고 수제 명품 방탄조끼를 만드는 겁니다.”
“드래곤 플레이트는 원래 대량생산이 안 됩니다.”
“대신에 구매자를 찾아서 신체 치수를 측정하는 건, 방법만 가르쳐주시면 우리가 하겠습니다.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를 강인 씨가 하시면, 제작은 다시 우리가 맡는 겁니다.”
“흐음….”
이태성이 제작 거점의 장비들을 가리켰다.
“여기 장비도 나쁘지 않지만, 우리 회사 설비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요. 우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생산성 자체가 달라질 겁니다.”
나강인이 이곳에서 직접 작업할 때는 팔뚝보호대 하나를 만드는 데도 꽤 오래 걸렸다. 장비의 정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우리가 설계도면만 주고 나머진 다 맡기는 이런 방식이 가능하냐?”
AI 전지인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철인기공이 실물 제작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 하겠지만, 어차피 고생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너 진짜 사람 다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