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설계자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야전에서 손이 노는 병력이 있으면 그런 식으로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 노는 병력의 몸에는 너 같은 AI가 없어?”
- 자연로보틱스의 신체삽입형 전투지원 AI는 아무나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내가 좀 특별하긴 하지.”
어쨌든 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나강인이 이태성에게 말했다.
“뭐, 그러시죠.”
***
정식 계약은 구체적인 협의를 마친 후에 하기로 했다. 이태성도 계약서를 준비하려면 일단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때는 이태성이 운전했다.
그가 회사로 가는 길에 물었다.
“나강인 씨 말이야. 대역배우라며.”
이태호가 대답했다.
“이젠 무술감독이라고 해야지.”
“IT 보안 전문가이기도 하고.”
“어. 철인기공에 보안 시스템을 구축한 팀이 강인 씨 실력을 보고 혀를 내둘렀어.”
“IT 보안 전문가가 무술까지 잘할 수는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스칼렛 켈리와 직접 통화하는 이유가 뭐지?”
“아. 형은 모르겠구나.”
“뭘?”
이태호가 설명했다.
“스칼렛 켈리가 레스토랑 페넬로페에서 국제 용병 조직에게 납치될 뻔했을 때, 그놈들을 박살 내고 그 여자를 구한 사람이 나강인 씨잖아.”
갑자기 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이태호가 뒤를 보았다. 도로에 다른 차는 없었다.
“미친! 사고 날 뻔했잖아! 핸들을 왜 꺾어!”
이태성도 소리를 질렀다.
“넌 그 말을 왜 이제 하는데!”
“대외비야! 대외비! 경찰에서 혹시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까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고!”
“아니,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줬어야지! 내가 형인데!”
“지금 말했잖아.”
이태성이 차를 몰며 물었다.
“그럼 총도 잘 쏘겠네?”
“진짜 명사수야. 난 그 레스토랑에서 권총 쏘는 거 실제로 봤잖아. 그리고 우리 사격장에서도 5단계 표적을 전부 명중시켰어.”
“어?”
그건 본부장에게 보고할만한 사안이 아니라 이태성에게는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도 우리 총으로. 총이 잘 맞는다더라.”
이태성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느 나라 특수부대 출신이래?”
“나야 모르지.”
이태성은 확신했다.
“특수부대 출신에 IT 보안 전문가라…. 미국 특수부대 출신으로 제대 후에 다른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을 몇 명 알아. 씰이나 델타 출신이겠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이번에는 이태호가 물었다.
“그런데 나강인 씨한테 설계를 맡긴 거 말이야. 실력 확인 안 해보고 그냥 맡겨도 돼?”
“확인은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가 해야지. 만들어서 테스트했더니 성능이 안 나오면 이번 일은 그냥 헤프닝이 되는 거야.”
“성능이 나오면?”
“일상생활을 할 때도 입을 수 있는 고성능 수제 방탄조끼니까 VIP들에게 주문제작으로 팔아야지.”
“대량생산이 안 되는데, 그렇게 몇 벌 판다고 돈이 되나?”
“회사의 인지도가 올라가.”
“아아. 그래서 하는 거야?”
“그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는데….”
***
계약서는 이튿날 바로 만들어졌다. 내용은 단순했다.
철인기공 회의실에서 이태성이 설명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나강인 씨는 개인 맞춤형 설계만 맡아주십시오. 사용자 신체 측정과 부품 정밀 제작, 제품 조립 완성 및 판매까지 저희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여기 나머지 조항들은요?”
“그건 우리 회사의 일반 계약에 들어가는 조항들인데….”
나강인이 그 조항들을 대부분 삭제하고 몇 개만 남겨두었다. 기술에 대한 모든 권리는 나강인에게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렇게 하시죠?”
이태성은 불만이 없었다. 기술을 직접 넘겨받는 건 아니지만, 제품이 예상한 수준으로 나오면 얻는 건 있다.
‘설계도면을 매번 분석하고 부품을 만들다 보면, 우리 연구소도 배우는 게 있겠지.’
그가 이 방탄조끼 사업을 하려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VIP 고객에게 팔아 회사 인지도를 높이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연구원들이 그 과정에서 뭔가 배우길 바라서다.
이태성은 그 기술의 출처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는 이 기술을 나강인이 개발했다는 말이 잘 믿어지진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았다.
‘수제 방탄조끼는 개인이 명품을 만드는 경우가 가끔 있으니까.’
서로 계약서에 날인한 후에 이태성이 물었다.
“방탄조끼의 재질은 알루미늄 합금과 스테인리스 스틸이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건 더 필요한 게 없으신지?”
나강인이 씩 웃었다.
“알루미늄과 스뎅은 그냥 싸서 쓴 겁니다.”
“네?”
테스트 버전은 예산도 아낄 수 있고 구하기도 쉬운 소재를 썼다.
“판매용으로 만들 땐 다른 합금을 써야죠. 가볍고 특성 좋은 거 많잖습니까? 그런 건 좀 비싸서 그렇지.”
이태성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소재를 바꾸면 계산도 바뀌기 때문에 방어력이 꼭 높아지는 건 아닙니다. 대신에 제가 추천하는 소재를 쓰면 더 가볍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건 아닌데, 소재를 바꾸면 조끼가 가벼워지죠.”
이태성이 활짝 웃었다.
“지금도 얇고 가벼운데, 그러면 진짜 일상복 속에 입고 다닐 수도 있겠군요!”
지금도 일상복 속에 입을 수 있는 얇은 방탄조끼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건 총알을 막긴 막아도 이렇게 완벽하게 방어하진 못한다.
나강인이 어떤 장비로 설계할지는 어제 이미 알려줬다. 그 데이터를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는 지금 정해야 한다.
이태성이 물었다.
“우리 연구소에 와서 설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장비를 제공해 드릴까요?”
“설계용 장비를 제 제작실에 설치해주시죠. 기왕이면 그걸 제가 가진 장비에도 물려서 쓰게요.”
“아. 지구연합 제작실…. 오늘 바로 설치팀을 보내겠습니다.”
***
장비는 그날 바로 설치됐다. 서버도 갖다놓았고 무정전전원장치도 제공했다. PC에는 철인기공에서 쓰는 설계 프로그램이 설치됐다.
상하좌우로 위치가 조절되는 고해상도 대형 모니터 네 대와 넓은 책상도 철인기공이 선물했다.
이번에는 본부장 이태성은 오지 않았다. 대신에 이태호가 찾아왔다.
이태호는 THO 엔터의 사장이지만 가끔 철인기공의 일을 외부에서 돕곤 했다. 이번 일은 괜히 신나서 그가 맡았다.
이태호가 설명했다.
“지금 철인기공 본사의 3D 스캐너로 데이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실험용 더미를 스캔해서, 그 데이터로 같은 방탄조끼를 여러 벌 만들어 테스트할 겁니다.”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장비를 테스트도 안 하고 팔 수는 없다. 철인기공은 철저한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냥 마네킹보다는 인체와 물리적 특성이 비슷한 더미를 쓰는 게 더 좋습니다.”
“회사에 그런 게 있는지는 저도 잘…. 아. 테스트용 샘플을 여러 개 만드는 건 미리 양해를 구하라더군요.”
계약에 의하면 나강인은 설계비를 먼저 받는다. 그리고 방탄조끼가 팔리면 판매 대금의 일정 부분을 또 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테스트용 방탄조끼는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처음 설계비 한 번 외에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테스트용은 시험 과정에서 파괴되기 때문이다.
“뭐. 그러시죠.”
나강인은 테스트까지 돈 내고 하라고 할 정도로 모질지 않았다.
***
이튿날 철인기공에서 더미 인형의 상체 형태를 정밀하게 측정한 데이터가 들어왔다.
나강인이 물었다.
“지인아. 이 데이터로 드래곤 플레이트를 만들 수 있겠냐?”
- 제가 직접 측정한 것보단 못하지만, 이 정도면 오차 허용범위 안쪽입니다. 다만 다소간의 성능 감소가 예상됩니다.
“제작을 남에게 맡겼으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설계 소프트웨어 사용법은 알지?”
- 설명서를 읽고 분석했습니다.
그 설명서는 나강인도 같이 봤지만, 페이지를 휙휙 넘기는 바람에 그는 내용을 하나도 모른다.
“그럼 시작하자.”
***
신은하는 나강인에게 매번 그녀가 먼저 연락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존심이 살짝 상한 그녀는 일부러 연락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사흘이 한계였다.
“와. 무슨 남자가 내가 연락 안 한다고 아주 톡 한 번을 안 날려? 내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그녀가 참지 못하고 먼저 톡을 날렸다.
- 오빠. 뭐해?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 일.
“연락은 안 해도 대답은 금방 잘하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 피시방에서 요리해? 나도 밥!
- 아니.
- 그럼 어딘데? 철공소?
- 어.
그녀가 투덜댔다.
“피시방에서 밥을 하는 거면 그 핑계로 얻어먹으러 가려고 했더니…. 어? 잠깐만.”
신은하가 톡 화면을 가만히 보았다.
“아니, 왜 이리 답이 짧아? 역시 이 인간은 안 되겠어!”
그녀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간다.
그녀는 지금 본가에 와 있다.
그녀가 나갈 준비를 하는 걸 보고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밥 먹고 가.”
“나가서 먹을 거야.”
“누구랑?”
“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야?”
신은하는 살짝 당황했다.
“어? 어?”
“이상한 놈 만나는 건 아니지?”
신은하는 나강인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다.
“이상하진 않고 신기한 사람이긴 해.”
그녀의 어머니가 조건을 걸었다.
“외박은 안 된다.”
“그런 거 아니라고! 오늘은 그냥 밥만 먹을 거라고!”
“오늘은?”
“아니라고!”
***
신은하는 차를 몰고 나강인의 제작 거점으로 갔다.
그녀의 본가는 차동석의 피시방이나 나강인의 아파트와 같은 동네에 있다. 제작 거점은 그녀의 본가에서 멀지 않았다.
그녀는 제작 거점 앞 공터에 차를 세웠다. 바로 옆에 나강인의 차도 보였다. 나강인은 중고차 시장에서도 안 받아주던 차를 헐값에 사서 멀쩡하게 고쳐 타고 다녔다.
“내 차도 좀 봐달라고 할까?”
그녀가 제작 거점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 번호는 나강인과 그녀만 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따졌다.
“강인 오빠. 진짜 이러기…. 어머?”
내부는 며칠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와…. 여기 며칠 안 와봤다고 뭐 이렇게 많이 바뀌었어?”
그녀가 왼쪽을 보았다.
원래 이곳에 있던 낡은 절삭장비가 그대로 있었다.
오른쪽을 보면 신은하와 같이 공구상가에 가서 산 레이저 커팅기와 각종 최신형 장비들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대형 모니터 몇 개와 새 책상이 추가되었다. 그 모니터들은 집에서 보던 것과는 때깔부터 달랐다. 네 개나 되는 모니터는 2단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 이제 무슨 비밀기지 같아. 이러다 이 밑에서 지구방위 로봇이라도 나오는 거 아냐? 간판도 지구연합 제작실이잖아.”
나강인이 돌아앉았다.
“지구방위 로봇?”
나강인의 표정이 진지했다. 신은하는 멈칫했다.
“어? 설마 진짜 그런 걸 만드는 건 아니지? 그런 거면 미쳤다고 하려고.”
“방탄조끼를 설계하는 중이다.”
“응? 방탄조끼라니?”
신은하가 모니터를 보았다.
인터넷 화면이 뜬 모니터도 하나 있었지만, 나머지 세 대에는 복잡한 도면이 떠 있었다.
“아니, 이제 하다 하다….”
“응?”
“차를 잘 고치는 건 알았지만, 이젠 설계까지 해? 그것도 뭐? 방탄조끼? 그런 건 왜 설계하는 거야?”
“당연히 설계비를 받기로 했으니까.”
“어? 설마…. 이거 그냥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프로젝트야?”
“어.”
그녀가 손바닥을 부채처럼 얼굴 옆에서 흔들었다.
“아니, 양파는 까다 보면 크기가 줄어들기라도 하지, 이 오빠는 왜 까면 깔수록 크기가 점점 더 커져?”
“나 양파 아니다. 거의 다 했으니까 기다려라.”
신은하는 나강인이 작업하는 걸 옆에서 구경했다.
손이 굉장히 빨리 움직여서 부품 하나하나를 3D 도면 형태로 그렸다. 부품은 몇 가지 정해진 패턴에서 세부 형태만 조금씩 변하는 게 많았다. 그런데 가끔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도 있었다.
나강인이 마지막 부품 도면을 큰 도면에 붙었다.
“끝났다.”
신은하는 완성된 3D 도면을 보며 물었다.
“강인 오빠. 방탄조끼를 설계한다며? 이건 방탄조끼가 아니라 반팔 내복 아냐? 전쟁터에서 이런 걸 입어?”
“전장에서는 이렇게 얇게 만들 필요가 없어. 그냥 두꺼운 방탄복을 옷 위에 걸쳐도 돼. 이건 평소에 옷 속에 입는 용도야.”
작업을 마무리한 나강인이 설계도 파일을 철인기공으로 전송했다. 파일 용량이 꽤 커서 전송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강인이 돌아앉았다.
“무슨 일이야?”
“밥….”
“밥 먹으러 가자고?”
“먹으러 왔는데, 오빠 일하는 거 보니까 되게 신기하다. 아니, 무슨 배우가 해커도 잡더니 이젠 이런 설계까지 해? 오빠 혹시 박사학위가 막 서너 개씩 되고 그런 거야?”
“아니. 나 평범한 사람이다.”
신은하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가 평범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