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선상파티
나강인이 스칼렛에게 말했다.
“뭐, 파티요리를 맛만 보는 거라면야.”
스칼렛도 원래는 나강인에게 요리까지 해달라고 하려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제시카의 제안이 단칼에 거절됐다는 걸 듣고 그 미련은 버렸다.
대신에 그녀는 다른 건 포기하지 않았다.
“온 김에 우리 회사 선상파티도 즐기고요.”
나강인도 기왕이면 주방에서 맛을 보면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배 위에서 요리를 즐기는 게 낫다.
“그러죠. 아. 커피 드릴까?”
철인기공은 설계 관련 장비를 보내주면서 서비스로 하이브리드 반자동 커피머신도 한 대 설치했다. 그건 가정용치고는 꽤 고가의 커피머신이다. 기계에 딸려온 서비스 원두도 아직 남아있었다.
스칼렛은 나강인이 커피를 뽑는 동안 제작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오메가테크의 사장이면서 동시에 연구책임자다.
‘여기서 도대체 뭘 만드는 거지?’
한쪽에 놓여있는 금속판에는 레이저 커팅기로 잘라내고 남은 구멍 수십 개가 뚫려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멍 모양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네? 마치 조각 그림 맞추기처럼 생겼는데?’
그게 뭔지 구멍을 보는 것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런 건 우리 오메가테크의 장비를 쓰면 더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는데. 이 장비들도 좋긴 하지만 정밀도가 좀 부족하겠네요.”
나강인이 스칼렛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큰 회사 사장님이 남의 알바나 빼앗으려고 하고 말이야.”
“우리 장비가 더 좋단 말만 했거든요? 우리가 이런 작은 일을 받아주기나 하는 줄 알아요?”
“내일 인천항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난 이런 작은 일이나 하느라 바쁘니까 커피 얼른 마시고 가요.”
***
신은하는 매니저 박우섭이 가져온 초대장을 보며 물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하는 선상파티?”
“어. 서해로 나가서 바다를 한 바퀴 돌고 오는 코스인가 봐.”
“난 바다는 동해가 더 맑고 깊어서 좋던데.”
“동해는 서울에서 멀잖아. 거기까지 초대하면 몇 명이나 오겠냐?”
“하긴.”
“할거지? 이미 너 참석한다고 대답했다.”
신은하가 따졌다.
“어? 아니, 그런 건 물어보고 결정해야 하는 거 아냐? 나 휴식 기간인데?”
“내가 신입한테 너한테 참석여부를 물어보고 답변하라고 했는데, 걔가 실수했어. 어떻게, 걔를 막 쥐 잡듯이 잡을까? 네가 원하면 그러고.”
“나를 나쁜 년 만들려고 환장했어? 박 실장 오빠. 이러기야?”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양보해라.”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근데 오메가테크가 왜 날 초대해? 거긴 연예계와는 상관없는, 첨단기술로 유명한 미국 회사잖아.”
박우섭은 살짝 감탄했다.
“네가 이렇게 경제 상식이 뛰어난 줄은 몰랐다. 이 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는 나도 이번에 초대장 보고 검색해서 알았는데.”
그녀는 예전에 7층 레스토랑에서 국제 용병조직인 자칼 일당에게 잡혔을 때 이 회사를 처음 알았다. 그때 자칼 일당의 목표가 오메가테크의 사장 스칼렛 켈리였다.
당시 그 건물에 있던 사람들에 관한 정보는 비공개로 처리됐다. 신은하는 그때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박우섭보다 아는 게 많았다.
그녀가 자랑했다.
“이거 왜 이래? 나 국제 정세와 세계 평화에 관심 많은 여자야.”
“퍽이나.”
“근데 거기서 왜 나를 초대했지?”
짐작 가는 게 있긴 했다.
‘혹시 그날 나도 거기 있어서? 마지막에 같이 있었으니까 전우 같은 느낌인 건가? 거기 사장이 내 또래 같던데 혹시 날 친구처럼 생각하나?’
박우섭이 설명했다.
“너만 부른 게 아니라 요즘 잘나가는 연예인을 몇 명 초대했다더라. 파티 진행도 연예인이 할 거야.”
“응?”
“가서 따로 뭘 할 필요 없이 자리만 빛내주면 섭외비가 들어온다.”
“아아.”
그녀가 방긋 웃었다.
“개꿀이네?”
“그럼 참석하는 거다?”
파티에 참석해서 놀다 오면 돈이 들어온다. 가서 뭔가 할 필요도 없다.
그녀가 물었다.
“사진은 같이 찍어야겠지?”
“그것도 마음대로 하라더라.”
“그럼 당연히 가야지. 아참. 동행을 데려갈 수 있어?”
박우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초대받은 사람만 오래. 나도 못 따라가.”
그녀가 아쉬워했다.
‘강인 오빠한테 같이 가자고 하기 딱 좋은 이벤트인데.’
“어쩔 수 없지. 요즘 좀 심심했는데 바다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돌아오지 뭐. 전에 같이 고생한 사람 얼굴도 좀 보고.”
***
그녀는 이튿날 유람선이 정박한 선착장에 차를 몰고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익숙한 차를 발견했다.
“어?”
그녀가 이 차를 못 알아볼 수는 없다.
그녀는 나강인이 다 망가져 가는 이 차를 살 때도 옆에 있었고, 고치는 것도 옆에서 직접 보았다.
원래 이 차는 엔진룸 내부가 제일 문제였지만, 외부에 손상된 부분도 몇 개 있었다.
나강인은 직접 쇠를 깎아서 그런 부분을 수리했다.
신은하도 옆에서 차량용 페인트를 좀 발랐다. 그래서 그녀는 번호판을 보기도 전에 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차가 왜 여기 있어?”
그녀가 얼른 배에 올라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강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
“강인 오빠가 왜 여기서 나와?”
“오늘 파티요리 때문에.”
“앗! 오빠가 요리하는 거야?”
“아니. 난 요리 문제없는지 점검만 할 거야.”
“에이….”
“그러는 넌?”
배우 신은하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나?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파티의 격을 높여주는 초대손님 역할?”
“맛있는 거 많이 먹겠네.”
“강인 오빠가 만들어줘야 더 맛있…. 아! 그럼 요리 점검 끝나면 파티에 참석해?”
“요리는 파티 전에 거의 준비되니까, 시작한 후에는 나도 갑판으로 올라오겠지?”
그녀가 실실 웃으며 오른손을 들고 가늘고 긴 손가락 다섯 개를 앞뒤로 흔들었다.
“이히히. 그럼 그때 봐.”
***
신은하가 배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실실 웃었다.
“이렇게 나와보니까 서해도 참 좋네. 바람도 좋고, 하늘도 좋고, 바다도….”
김유찬이 다가왔다.
“은하야.”
“다 좋은데 유찬 오빠만 없으면 더 좋겠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 정도면 일부러 끼어드는 거 아녜요?”
“뭐 좋은 거 있어? 같이 좀 알자.”
신은하가 손으로 자기 옷을 툭툭 쳤다.
“이거 왜 이래? 유찬 오빠는 나한테서 좀 떨어져요. 남들이 친한 줄 알잖아요.”
“야. 그래도 우리가 같이 영화도 찍고 CF도 찍고 술도 마셨잖아.”
“맞다. 그날 술 마실 때도 말이야. 강인 오빠랑 둘이 마시려고 했는데 눈치도 없이 끼었으면서.”
“그게 다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
“퍽이나.”
김유찬이 설명했다.
“사실 네가 아니라 영화 때문이었지. 너 그러다 사진이라도 찍혀서 스캔들 터지면 영화 흥행에 악영향이 가잖아.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내가 일부러 껴서 변명거리를 만든 거야.”
“아닌 거 다 아는데 뻥 치시긴.”
“음….”
“다른 핑계는 금방 안 떠오르나 봐요?”
김유찬이 손바닥을 쳤다.
“아! 사실 내가 비밀요원….”
“닥치시고요.”
“어. 그래.”
그들이 대화하는 곳에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다가왔다.
“우리 영화의 주연들이 여기 모여 있었네요. 분위기 좋아 보입니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앗. 이태호 사장님. 안녕하세요.”
김유찬이 반박했다.
“이 사장님. 주연들이라니요. 저는 주연, 은하는 조연이죠. 구분을 좀 명확히 해주세요. 하하하.”
신은하가 불평했다.
“구박 좀 했다고 바로 이러는 거 봐. 이렇게 쪼잔하니까 친구가 없지.”
“야. 나 친구 많아!”
신은하가 이태호에게 물었다.
“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원래 우리 형이 초대받은 파티인데, 제가 땜빵으로 왔습니다.”
“아. 그렇….”
신은하의 눈에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어? 장미정 선배님이랑 민지도 왔네요?”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태호가 말했다.
“가족 동반도 괜찮다고 해서요.”
“와. 난 꼭 혼자 오라던데. 이게 진짜 초대와 초대 같은 섭외의 차이인가?”
나강인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이민지가 나강인을 발견하자마자 다다다 달려가 찰싹 달라붙었다.
“과자 아저씨!”
“너도 있었네?”
“오늘도 과자 만들러 왔어요?”
“아니. 남들이 요리하는 거 구경하러.”
“웅…. 과자 좀 만들어주면 안 돼요?”
“나중에 디저트 만들어줄게.”
“아싸아!”
김유찬이 그 모습을 보면서 신은하에게 말했다.
“네가 왜 뜬구름 보면서 실실 웃고 있나 했더니 저래서였구나? 강인 씨는 네가 불렀냐?”
“아니. 강인 오빠는 여기 요리 자문 역할로 왔대요.”
“오는 줄은 알았고?”
몰랐다. 부두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보고 나서야 나강인도 참석한다는 걸 알았다.
신은하가 뻥을 쳤다.
“당연히 알았지! 내가 모를 리가 있어요?”
유람선은 인천 항구를 떠나 바다로 나갔다.
사람들은 배 위에서 수평선에 떨어지는 해와 석양을 구경하며 파티를 즐겼다.
나강인의 역할은 요리가 준비될 때까지 전체적인 점검을 하는 것이다. 그는 그 점검이 끝나면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파티 주최자 스칼렛 켈리가 친구이면서 비서인 제시카에게 물었다.
“나강인 씨는 왜 안 보여?”
“두리번거리지 마. 없어 보여.”
“아까 갑판에 있는 거 분명히 봤단 말이야. 요리 점검은 끝났을 시간이잖아.”
“디저트 만들러 갔어.”
“응? 요리는 안 한다고 했는데?”
제시카가 이민지를 슬쩍 가리켰다.
“우리 부탁은 안 들어도 쟤 부탁은 들어주더라. 저 꼬마가 디저트를 만들어달라고 졸랐어.”
스칼렛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설마 딸은 아니겠지?”
“그러겠냐? 쟤는 이태호 씨 딸이야.”
그녀가 바로 인상을 폈다.
“아하. 그럴 줄 알았어.”
“너 몰랐어.”
나강인은 잡탕 과자와 티라미수 스타일 잡탕 케이크를 만들어 갑판으로 올라왔다.
이민지는 갑판 위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나강인은 접시 두 개에 과자를 수북하게 담아 왔다.
이민지가 환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와아! 내 과자!”
김유찬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야아. 잡탕 케이크는 오랜만이다. 민지야. 나도 좀 먹어도 돼?”
“웅…. 조금만 먹어야 해요.”
“알았어.”
김유찬이 케이크를 몇 개 챙겨갔다.
신은하도 다가왔다.
“잡탕 과자는 자주 만들어도 케이크는 잘 안 만들어주는데.”
이태호도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이 생각나 몇 개 집어먹었다.
그들이 아는 주변 사람 다가왔다. 그들은 배우들이 맛있게 먹는 과자가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이태호와 안면이 있는 몇 사람이 과자와 케이크를 조금씩 얻어먹었다.
맛을 보자마자 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이 건빵같이 생긴 거 되게 맛있는데?”
“와. 이건 평범한 티라미수가 아니잖아?”
맛이라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접시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과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양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이민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우….”
나강인이 얼른 말했다.
“조리실에 가서 잔뜩 만들어올게.”
이민지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히히. 괜찮아요. 아, 그러니까 조금 나눠줘도 괜찮다고요. 대신에 잔뜩 만들어주셔야 해요. 집에 가져가서 먹을 거예요.”
“네 건 스페셜로 따로 만들어서 선물용 상자에 포장해 올게. 주방에 포장지 많더라.”
“스페셜이요?”
신은하가 옆에서 입맛을 다셨다.
“와. 스페셜이 붙은 요리는 전부 다 진짜 진짜 맛있는데.”
이민지가 얼른 말했다.
“스페셜로 주세요. 포장 꼭 해주고요.”
장미정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녀는 원래 초등학생은 과자를 줄이고 영양 균형이 잘 잡힌 식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도 나강인이 만든 과자 맛을 안다. 이민지가 먹는 걸 자주 나눠 먹었기 때문이다. 그 과자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기 때문에 이민지의 행동이 이해는 갔다.
그렇다고 초등학생 딸이 과자만 먹게 할 수는 없다.
그녀가 조건을 걸었다.
“민지야. 집에서는 그 과자는 밥 다 먹고 후식으로 조금씩 먹어야 해.”
“엄마. 나도 알아. 내가 뭐 애야?”
신은하가 옆에서 말했다.
“민지야. 너 애 맞아. 아직 초딩이잖아.”
나강인은 유람선 조리실로 내려가 과자와 디저트를 넉넉하게 만들었다.
찾는 사람이 많아서 처음 만든 건 파티 손님들을 위해 올려보냈다.
이민지에게 줄 스페셜은 파티용 디저트를 넉넉히 보낸 후에 따로 만들 생각이었다.
***
스칼렛 켈리가 잡탕 케이크를 먹어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시카. 먹어봐. 이거 진짜 맛있다.”
비서 제시카는 잡탕 과자를 먹으며 감탄했다.
“와우. 엄청나네.”
“이거 제품화해서 팔면 대박 나겠지?”
“공장에서 이걸 대량생산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럼 하면 되잖아.”
“유명 파티시에가 만든 디저트 중에도 정말 맛있는 건 있어. 그런데 그런 디저트는 왜 대량생산을 안 할까?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단가가 안 나오거든.”
“충분한 예산과 시간을 쏟아부으면?”
“대량생산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채산성은 무리야. 너무 비싸질 거야.”
“아쉬워라. 미국에 가면 이 디저트를 먹을 수 없단 거잖아.”
“네가 한국에 있어도 나강인 씨가 안 만들어주면 못 먹지.”
“항공 배송으로 보내달라고 할까?”
“그렇게까지 챙겨줄 사람이면, 이 파티에 초대했을 때 냉큼 왔겠지?”
스칼렛이 툴툴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현실을 말해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