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낙귀
유람선은 서해를 돌아다녔다.
유람선의 앞쪽에는 배를 조종하는 조타실이 있다. 파티를 즐기는 갑판은 뒤쪽이다.
갑판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폭이 좁은 보조 갑판이 하나 더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배의 내부에만 있고 외부에는 없다.
조타실은 2층에 있다.
선미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 아래의 공간은 무척 좁았다. 그곳을 통해서는 배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은 연인이 오붓하게 바다를 구경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바다를 천천히 떠다니는 배 옆으로 모터가 달린 고속 고무보트가 달라붙었다. 그 보트에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높이가 그나마 낮은 배의 뒤쪽에는 스크루가 있어 고속 고무보트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은 갑판까지의 높이가 높아 직접 올라가기 어렵다.
고속 고무보트는 배의 앞쪽으로 이동했다. 그쪽은 높이가 갑판 쪽보다 더 높았다.
이 보트에 탄 놈들은 모두 해적이다. 그들은 원래 동남아에서 주로 활동했다.
해적 두목의 별명은 낙귀다. 그는 사람을 죽일 때 배에서 바다에 떨어뜨려 죽인다고 해서 낙귀라고 불렸다.
낙귀는 중국 출신이지만 한국말을 잘했다.
서해는 낙귀의 평소 활동 영역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돈만 충분히 주면 어느 나라 영해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낙귀가 손전등을 깜빡였다.
배 위에서 줄사다리가 아래로 주르륵 내려왔다. 부하들이 줄사다리에 고속 고무보트를 연결했다.
낙귀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좁다. 빨리 올라가라.”
해적들이 줄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올라갔다.
먼저 올라간 놈들은 권총을 꺼내 주변을 경계했다.
낙귀는 느긋하게 배 위에 올라갔다.
출장파티회사 조리실 직원으로 위장한 해적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적이 조금 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상 사다리를 내려주었다.
낙귀가 물었다.
“상황은?”
“사람들은 대부분 뒤쪽 갑판 파티장에 있습니다.”
“무장 병력은?”
“타깃이 고용한 경호원들이 배에 있습니다만, 여긴 한국이라 총은 없을 겁니다.”
낙귀도 그렇게 생각했다.
“경호원이면 기껏해야 삼단봉이겠지. 이 배의 선원들은?”
“대부분 파티장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조타실과 기관실에 있습니다.”
“그것도 예상대로군. 그 외에는?”
“조리실에 출장파티회사 요리사가 몇 명 있습니다.”
낙귀가 피식 웃었다.
“요리사 따위야 뭐. 조리실은 나중에 접수하기로 하고.”
병력이 남아도는 건 아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제일 먼저 장악해야 하는 건 배를 조종할 수 있고 무전기도 있는 조타실이다.
두목이 앞쪽으로 손짓했다.
“조타실부터 간다.”
***
바다를 순항하던 유람선의 엔진이 갑자기 꺼졌다.
손님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가 어디로 가든 나중에 인천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파티 주최자인 스칼렛은 달랐다. 그녀가 물었다.
“우리 배가 바다에서 정지하기로 했나? 무슨 이벤트야?”
제시카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 이벤트는 없어.”
제시카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통화는 실패했다. 그녀는 안테나 표시가 몇 개나 떴는지 확인했다.
“전파가 안 잡혀.”
“인천에서 멀리 나왔잖아.”
제시카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핸드백에서 비상용 무전기를 꺼냈다. 그 작은 무전기로는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하지만, 배에 있는 직원들에게 지시할 수는 있었다.
“모두 주의하세요. 배가 바다 한복판에서 정지할 계획은 없었어요. 누가 조타실로 가서 상황을 확인….”
갑자기 배의 조타실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제시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스칼렛을 붙잡고 갑판 뒤쪽으로 뛰었다.
그 갑판 뒤쪽 끝으로 가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방금 들린 소리가 총소리라는 걸 눈치챈 사람들도 조타실과 반대쪽인 갑판 뒤쪽으로 물러났다.
갑자기 2층 좁은 갑판에서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권총을 들고 있었다.
해적단 두목 낙귀가 권총을 위로 들고 흔들며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전부 대가리 박….”
갑판에 있던 경호원이 재빨리 2층으로 사격했다.
낙귀의 옆에 서 있던 해적이 총에 맞고 나자빠졌다.
“으악!”
낙귀는 깜짝 놀라서 자세를 바짝 낮췄다.
“씨발! 경호원한테 총이 없을 거라며!”
먼저 배에 잠입했던 해적이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저, 저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낙귀는 재빨리 판단했다.
“여긴 한국 바다야. 총이 있어 봐야 한두 놈이겠지.”
낙귀는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기억해냈다. 그가 손으로 두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 후에 외쳤다.
“총을 가진 놈은 둘이다! 그놈들부터 잡아!”
낙귀가 다시 수신호를 했다. 동남아 해적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낙귀가 지목한 장소에는 무장 경호원이 없었다. 해적들은 당황했다.
“어? 저기가 아니야?”
낙귀가 갑판 뒤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뒤쪽이다! 저놈하고 저놈! 갈겨!”
해적들이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갑판 뒤쪽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무장 경호원들은 조금 전에 해적들을 쏜 후에 갑판 후미 쪽으로 후퇴했다. 경호 대상인 스칼렛은 이미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적의 총탄이 날아왔다.
무장 경호원 한 명은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른 한 명은 운이 나빴다. 그는 낙귀가 쏜 총에 어깨를 맞았다.
“으악!”
그 경호원은 총에 맞은 채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아래로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갑판에 남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아아악!”
“사, 살려줘!”
사격이 중단됐다. 무장 경호원 두 명이 갑판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적 두목 낙귀가 갑판 바닥에 총을 몇 발 쏜 후에 소리를 질렀다.
“닥쳐! 소리 지르는 것들부터 쏴버린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파티 참석자 중에 선미 공간으로 피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상부 갑판에 있었다.
***
나강인은 조리실에서 이민지에게 줄 스페셜 디저트를 상자에 넣고 포장했다.
“이 정도면 민지 친구들까지 넉넉하게 먹….”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AI 전지인이 즉시 경고했다.
- 이 배의 조타실 방향에서 누군가 총을 쐈습니다.
그는 조리실부터 확인했다.
요리사들은 총소리와 엔진에서 나는 이상 소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엔진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런가 봐요. 엔진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잖아요.”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이중엔 적 병사가 없는 것 같지?”
- 총성에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민간인으로 추정됩니다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나강인이 디저트 상자에서 손을 떼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권 이탈 표시가 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요원님은 지금 바다에 나와서 쇠로 만든 배 안에 있습니다. 여긴 지난번에 싸운 강남이 아닙니다. 당연히 통화가 불가능합니다.
“시계 본 거야. 몇 시인지 궁금해서.”
- 지금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따지지 마라.”
갑자기 총소리가 또 들렸다. 이번엔 무장 경호원들이 쏜 총소리였다.
나강인이 요리사들을 돌아보았다.
요리사들도 이제야 그 소리가 총소리인 걸 깨달았다.
“어? 뭐야? 우리 해경에서 쏘는 거야?”
“배가 설마 북으로 가는 건 아니지?”
“야. 알바 어디 갔어? 나가서 확인 좀 해봐!”
“알바는 아까 화장실 간다고 갔는데요?”
“새끼가 빠져가지고! 지금 이럴 때 자리를 비우면 어쩌잔 거야!”
나강인은 추가 정보를 얻었다.
“적이 알바로 신분을 위장해 배에 침투한 후에 뭔가 했겠지.”
낙귀의 부하가 그 역할을 했다.
곧바로 요란한 총격전 소리가 들렸다. 해적들이 무장 경호원들을 향해 총탄을 쏟아붓는 소리였다.
나강인이 말했다.
“적은 여러 놈이다. 알바가 비상 사다리를 내려서 저놈들을 배로 끌어올렸을 거야.”
- 적의 수가 많아 보입니다. 무기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나강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리실에는 총은 없지만 칼이 많았다.
***
오메가테크의 사장 겸 연구책임자인 스칼렛 켈리가 갑판 뒤쪽 아래 좁은 공간에서 놀란 얼굴로 말했다.
“우리 경호원한테 총이 있어! 여긴 한국인데 왜 총이 있어?”
바닥에 뛰어내린 경호원과 굴러떨어진 경호원 모두 권총을 한 자루씩 갖고 있었다.
제시카가 설명했다.
“한국 정부가 우리 경호원의 무장을 허가했어. 지난번에 자칼 일당에게 납치될 뻔한 것 때문에 미국 정부에서 한국 정부에 부탁했거든.”
“그걸 난 왜 몰랐는데?”
“이건 그냥 만약을 대비한 조치였으니까. 이런 거로 네 기분을 망쳐서 파티를 못 즐기면 안 되잖아.”
스칼렛이 위쪽을 보았다. 갑판 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낙귀가 외치는 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스칼렛이 말했다.
“그렇게 대비했어도 소용없잖아. 우린 겨우 두 명인데 저쪽은 되게 많….”
어깨에 총을 맞은 경호원이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끄으으….”
당황한 스칼렛이 그곳으로 도망친 사람들에게 외쳤다.
“저 사람 저러다 죽겠어! 의사나 간호사 없어요? 아니면 위생병이라도!”
***
해적단 두목 낙귀가 이 배에 먼저 침투한 해적에게 물었다.
“여긴 한국인데 경호원이 왜 총을 갖고 있지?”
“그러게 말입…. 헉.”
낙귀가 해적에게 총을 겨누었다.
“너 이 새끼. 준비를 이렇게밖에 못해? 바다에 던져줄까?”
“사, 살려주십쇼!”
“젠장. 미국 정부가 손을 썼나?”
다른 해적이 다가와 보고했다.
“무전 차단은 조타실에서 확실히 처리했습니다. 이제 저놈들이 이 배에서 외부로 연락할 방법은 없습니다.”
“경호원 새끼들이 무전기라도 갖고 있으면?”
“여긴 바다 한복판입니다. 휴대용 근거리 무전기로는 육지와 연결이 안 됩니다.”
낙귀가 화를 벌컥 냈다.
“저 새끼들이 총을 가지고 있어! 이미 상식이 깨졌다고! 그런데 무전기가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나!”
해적이 움찔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타실에 가서 당장 배 출발시켜.”
“예? 원래 계획은 여기서 일을 다 처리하고 고속 고무보트로 탈출….”
“타킷 확보에 차질이 생겼잖아. 상황이 변했으면 계획을 바꿔야지. 지금부터는 고속 고무보트가 아니라 이 배를 타고 간다. 일 처리는 가면서 하면 돼.”
***
무장 경호원이 말했다.
“지금 이곳 상황을 무전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스칼렛이 물었다.
“여긴 바다 한가운데인데 무전이 돼요?”
경호원이 총에 맞은 동료의 허리 뒤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무전기에 피가 묻어있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는 상황을 고려해, 통신 거리가 긴 무전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럼 빨리 연락해요! 전투기든 군함이든 싹 다 보내달라고 해요!”
경호원은 유람선의 현재 상황을 무전으로 보고했다. 그런데 그 무전기는 짧은 통신 후에 먹통이 됐다.
경호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무전기가 갑판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고장 난 것 같습니다.”
***
통신은 짧게 끝났지만, 배가 해적에게 점령됐다는 건 확실히 전했다. 그 소식은 곧바로 미국 대사관과 한국 경찰에 전해졌다.
경찰 상황실은 비상이 걸렸다.
“지금 해경 배 어디 있어?”
“30분 거리에 있습니다.”
“당장 그쪽으로 보내!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문제 뭐?”
“유람선이 상당히 크고 적이 총기로 무장한 상태인 데다가 인질까지 많습니다. 작은 배로는 막기 어렵습니다. 그 유람선보다 큰 배는….”
“어디야!”
“한 시간 거리입니다.”
경찰 상황실 책임자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젠장! 해군은?”
“우리 배보다 더 멀리 있습니다.”
“진짜 환장하겠네.”
다른 경찰이 제안했다.
“실장님. 공군이 출동하면 금방….”
“전투기가 가서 어쩌게? 그 배를 격침이라도 시키게?”
“아닙니다.”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레이더 정보 확인했습니다. 유람선이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방향은….”
“어딘데?”
“중국 쪽입니다!”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