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68화 (68/411)

68. 낙귀 II

유람선을 점령한 해적단 두목 낙귀가 말했다.

“일단 중국 바다에 접근하면 한국 전투기는 못 날아온다.”

부하 해적이 맞장구를 쳤다.

“전투기가 온다 해도 설마 이 배를 격침하겠습니까? 인질이 저렇게 많은데요.”

“당연히 미사일은 못 쏘지. 그런데 그건 전투기 이야기고, 군함이 오면 큰일이잖아?”

그들이 동남아에서 해적질할 때는 비행기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군함이다. 군함도 민간인이 잔뜩 탄 배에 함포를 쏘지는 못하지만, 대신에 군함은 다른 공격 옵션이 많다.

낙귀가 말했다.

“우리가 중국 바다에 붙어야 한국 군함도 못 오고 헬기도 못 와.”

“두목. 그럼 조타실에 가서 그냥 서쪽으로 쭉 가라고 할까요?”

“아니. 중국 어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라. 거기서 어선들과 섞인 후에 우리만 따로 빠져나간다.”

“알겠습니다.”

자칼이 갑판을 보았다.

“물론 그 전에 타깃을 손에 넣어야지.”

해적이 망설였다.

“놈들도 총이 있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훈련받은 놈들입니다. 그놈들을 잡으려면 갑판을 통과해야 하는데….”

탁 트인 갑판을 뛰어가면 아무리 엄호사격을 해도 무장 경호원의 총알밥이 되기 쉽다.

그런데 그게 무섭다고 하면 낙귀가 화를 낼 게 뻔하다.

부하 해적이 다른 핑계를 댔다.

“그런 상황에서 놈들을 제압하려면 총을 많이 쏴야 합니다. 그러다 눈먼 총알에 타깃이 죽기라도 하면 우리는 고생만 하고 돈은 못 벌잖습니까?”

낙귀가 잠깐 생각한 후에 결정했다.

“그럼 타깃을 먼저 끌어내야지.”

“예?”

낙귀가 권총으로 갑판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타깃이 나올 때까지 갑판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처형해. 처형 방법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자. 바다에 던져버려.”

***

김유찬과 신은하는 아직 갑판 위에 있었다.

김유찬은 덜덜 떨었다.

“이, 이게 뭐야? 서해에 해적이 왜 있어? 나, 날 노리고 왔나?”

신은하는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김유찬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유찬 오빠는 왜 이렇게 겁이 많아요?”

“은하야. 넌 이 상황에서 겁 안 나냐?”

“겁나죠. 그래도 난 믿는 구석이 있어서 괜찮아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김유찬이 얼른 물었다.

“그런 게 있어? 뭔데?”

“이 배에는 강인 오빠가 있잖아요.”

김유찬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가 아는 나강인은 무술 고수다.

“야! 총을 든 놈이 저렇게 많은데 강인 씨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나강인은 강남 7층 건물을 점령한 자칼 일당을 혼자 때려잡았다. 이 배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이태호는 넘어진 테이블 뒤에 숨어있었다. 이민지도 조금 떨어진 테이블 아래에 혼자 숨어있었다.

이태호의 위치에서 이민지에게 가려면 갑판 위를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두 사람의 위치가 다 노출된다.

이태호가 조용히 말했다.

“민지야. 괜찮아. 아빠만 믿어.”

작게 말해서 목소리가 확실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민지는 이태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은 알아들었다.

이민지가 물었다.

“과자 아저씨가 또 구해주는 거 아녔어?”

“어? 어. 그렇지? 그럼. 그럴 거야.”

장미정은 이태호와 같이 있었다. 그녀가 이태호를 구박했다.

“야. 왜 우리까지 이런 파티에 데려왔는데?”

이태호가 변명했다.

“이게 다 우리 형 때문이야. 저번에도 대신 가달라고 그러더니 또 형 때문에 나만 이게 뭐야. 형은 또 쏙 빠져나가고! 이번엔 민지도 있는데!”

“나는?”

“미정이 너도 있고!”

“죽는…. 너 이따 봐!”

***

경찰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경찰은 신속하게 유람선 선상파티 참석자 명단을 확보했다.

그 자료는 즉시 담당 부서로 전달됐다.

경찰 상황실에도 자료가 들어왔다.

상황실장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잘못하면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현장 정보에 집중하십시오.”

모든 상황실 직원이 이 일에 투입될 수는 없다. 원래 해야 하는 치안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 대응에 투입된 상황실 요원들에게만 승객 명단이 전달됐다.

그런데 그 요원 중 한 명은 강남 7층 건물 점령 사건 때도 대응팀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어?”

그 요원이 실장에게 가서 조용히 말했다.

“실장님. 잠깐만 이쪽으로.”

“뭔데?”

요원이 상황실장을 조금 뒤쪽으로 데려간 후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 배에 나강인이 있는데요?”

상황실장은 당황했다.

“어? 설마 강남 자칼 사건 때 그 나강인?”

“예. 그 나강인입니다.”

***

경찰이 이 사건 대책반을 새로 꾸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경찰은 일단 기존 조직 중 하나를 임시 비상대책반으로 지정해 정보를 분석했다.

강남 자칼 사건 때 나강인을 담당했던 상황실 요원이 자료를 챙겨서 비상대책반으로 넘어왔다.

나강인에 관한 정보는 경찰 내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요원은 나강인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간단히 브리핑했다.

노트북과 연결된 대형 모니터에 사진이 한 장 떴다. 그 사진은 동영상에서 뽑아낸 것이다.

“서울 동북부 원룸 건물 화재 당시에, 건물 사이에 줄을 연결하고 사람을 구출한 일이 있습니다. 여기 줄 위에 이 사람이 나강인입니다.”

사진이 방화 살인자의 얼굴로 변했다.

“그때 나강인이 범인의 몽타주를 그려준 덕분에 살인자를 체포하고 마약파티까지 소탕했습니다.”

사진이 바뀌었다.

“강원도 영화 촬영장에서 있었던 납치 사건인데,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납치범들을 제압하고 여자아이를 구한 사건입니다.”

대책반장이 아는 체를 했다.

“어. 저 장면은 나도 알아. ‘햇살 좋은 날’ 촬영장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예. 여기 이 사람도 나강인입니다.”

이번에는 강남 7층 빌딩을 자칼 일당이 쳐들어왔을 때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이때는 사건 당시의 영상이나 사진은 남아있는 게 없었다. 화면에 뜬 건 경찰이 현장에 진입한 후에 찍은 사진이었다.

“이 빌딩에서 국제 용병조직인 자칼 일당을 일망타진한 사람 역시 나강인입니다.”

임시 대책반 요원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그게 다 나강인 혼자서 한 겁니까?”

“예.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습니다만, 합동수사본부에서 확인한 내용으로는 그렇습니다.”

“와….”

상황실 요원이 계속 설명했다. 이번에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쪽 자료였다.

“나강인은 영화 ‘햇살 좋은 날’에서 무술감독과 액션 대역배우로 활동했….”

대책반장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

반장은 상황실 요원과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강남 자칼 사건 때도 나강인이 거기 있었는데, 이번에도 현장에 있어? 그것도 바다 한복판 배 위에? 이게 우연일까?”

“우연일 겁니다.”

“아니야. 의심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라, 나강인이 그놈들과 커넥션이 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상황실 요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남 자칼 사건 때는 영화배우 신은하가 밥을 사려고 나강인을 그곳에 데려갔습니다. 그건 합수부에서 보내준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책반장이 물었다.

“이번에는?”

직원이 이번에 새로 확보한 문서를 보며 말했다.

“오메가테크 사장 스칼렛 켈리가 나강인을 직접 초대했습니다.”

오메가테크가 어떤 곳인지는 대책반 사람들도 자료를 받아봐서 안다.

대책반장이 물었다.

“액션 배우를 왜 초대해?”

“아뇨. 손님이 아니라 셰프로 초대했습니다.”

“어?”

“제가 강남 자칼 사건 때 나강인에 관한 자료를 좀 봤습니다. 나강인은 요리를 굉장히 잘합니다.”

“혹시 직업이 레스토랑 셰프야?”

“아뇨. 밥차 아저씨도 하고….”

“어? 밥차?”

“피시방에서 밥도 파는데요. 배우들이나 관할서 형사 말로는 요리가 진짜 맛있다고….”

임시 대책반장이 손을 흔들었다.

“야. 야. 잠깐만. 그러니까 이 선상파티를 주최한 미국 오메가테크의 사장이 셰프로 초빙한 사람이, 우리나라 영화 촬영장을 따라다니는 그 밥차 아저씨다?”

“그, 그렇죠?”

“안 이상하냐?”

“그러니까 나강인의 요리가 진짜 맛있다고….”

“아냐. 스칼렛 켈리와는 무슨 다른 커넥션이 있을 거야. 그게 뭘까?”

상황실 요원이 말했다.

“반장님. 스칼렛 켈리도 강남 자칼 사건 때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때 신세 진 거 좀 갚아보려고 일감을 준 거 아닐까요? 제가 알기론 나강인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책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말이 되지. 이제 알겠어. 그때 일이 고마워서 밥차 아저씨를 파티요리팀에 부른 거네. 일감이라도 좀 챙겨주려고. 나강인은 해적 놈들하고 한패는 아니구나.”

상황실 요원이 작게 투덜댔다.

“제가 계속 그렇다고 말했잖습니까?”

임시 대책반 요원이 물었다.

“반장님. 나강인이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줄까요?”

대책반장이 인상을 썼다.

“새끼가. 나강인만 믿고 구경만 하다가 일이 잘못되면 우린 다 엿 되는 거야. 무인도 파출소로 전출되기 싫으면 저 배에 나강인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응해.”

“예.”

다른 요원이 의견을 냈다.

“반장님. 혹시 스칼렛이 나강인을 경호원으로 쓰려고 데려간 거 아닐까요?”

“어?”

“미국 애들이 우리 정부에 부탁까지 해가면서 스칼렛에게 무장 경호원을 두 명이나 붙였잖습니까? 스칼렛도 만약을 대비해서 나강인을 부른 거라면….”

대책반장이 턱을 긁었다.

“그게 더 그럴듯한데? 나강인은 혼자서 빌딩 하나를 다 털어버린 사람이니까, 곁에 있으면 든든하겠지.”

“그런데 그러면 스칼렛도 이런 상황을 조금은 예상하고 대비했다는 건데요?”

“당연히 그렇다고 봐야겠지?”

***

스칼렛은 무장 경호원이 두 명이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제시카. 넌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무장 경호원을 붙였어?”

“만약을 조치한 대비였어,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으니까. 너 마음 편하게 파티를 즐기라고 내가 알아서 한 거야.”

“그래도 말은 해줬어야지.”

제시카는 당당했다.

“대신에 넌 내 덕에 총 안 맞았잖아.”

“아…. 그건 인정.”

***

낙귀의 원래 플랜 A와 B를 준비했다.

플랜 A는 이 배를 점령한 후에 스칼렛을 협박해 기밀 서버의 접속코드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는 배가 바다에 떠 있는 동안은 모든 통신을 차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정보를 빼내고 이용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 스칼렛이 어떤 수단을 써도 입을 열지 않으면, 아예 납치해서 빠져나갈 계획도 있었다. 그게 플랜 B였다.

그런데 플랜 A나 B는 먼저 스칼렛을 잡아야 쓸 수 있다. 그것도 산 채로 잡아야 한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스칼렛이 총에 맞을 수도 있다.

자칼이 갑판을 내려다보았다. 경호원 두 명은 갑판 끝부분 아래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낙귀가 소리를 질렀다.

“거기 계속 숨어있으면 갑판에 있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겠다!”

낙귀가 손짓을 했다. 해적들이 갑판에 총을 겨누었다.

하필 그때 이민지가 숨어있던 탁자의 식탁보가 바람에 날아갔다.

낙귀가 신이 나서 외쳤다.

“오! 저기 아이가 있구나! 네가 안 나오면 저 아이부터 바다에 던져버리겠다!”

스칼렛이 말했다.

“안 되겠어. 내가 올라갈게.”

제시카가 얼른 그녀를 잡았다.

“미쳤어? 지금 올라가면 죽을 수도 있어! 대책 없이 이러면 어떻게 해!”

스칼렛도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대책이 왜 없어? 있어.”

“어?”

스칼렛이 작게 속삭였다.

“우리 배에는 나강인 씨가 있잖아.”

제시카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그게 대책이야?”

“그럼 어떻게 해? 다른 방법이 없는데. 일단 시선이라도 끌어야지.”

스칼렛이 계단을 통해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계단 위로 상체만 내밀고 외쳤다.

“내가 올라왔다! 그러니까 총 치워! 총을 치워야 앞으로 갈 거야!”

그녀의 위치는 여차하면 계단 아래로 다시 뛰어내릴 수 있는 곳이다.

낙귀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흐흐. 총을 치워는 드려라.”

해적들이 총구를 내렸다.

낙귀가 스칼렛을 보며 웃었다.

“크흐흐흐. 들은 대로군. 역시 인질을 이용해서 협박하는 게 효과가 제일 좋아.”

이민지가 겁먹은 얼굴로 해적들을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조금 내렸다. 2층 갑판 아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곳에서 나강인이 나타났다.

이민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나강인이 이민지를 보더니 손가락을 하나 세워 입에 댔다.

이민지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강인이 이번에는 손으로 눈을 가리킨 후에 손가락 두 개를 붙이는 시늉을 했다.

이민지는 수신호의 의미를 깨닫고 얼른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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