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적의 소음을 분석해 위치를 계산했습니다.
AR 렌즈에 2층 보조 갑판의 상황이 반투명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마치 아래쪽에서 철판을 투시해 2층을 보는 것처럼 해적들의 위치가 잘 보였다.
- 소리를 내지 않는 적은 위치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됐어.”
나강인이 갑판으로 걸어나갔다.
낙귀가 2층 갑판에서 스칼렛에게 요구했다.
“총을 치웠으니까 이제 앞으로 나오….”
낙귀가 멈칫했다. 스칼렛의 표정이 대놓고 밝아지는 게 보였다.
“어? 왜….”
갑자기 바로 아래쪽 갑판에서 빛이 번뜩였다. 동시에 해적 한 놈의 몸에 칼이 꽂혔다.
“켁!”
나강인은 낙귀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부하를 먼저 잡았다. 그놈의 총구가 갑판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적들은 돌발상황에 당황했다.
“무, 무슨….”
제일 왼쪽에 있던 놈의 총구가 움직였다. 나강인이 조리실에서 가져온 칼을 그놈에게 날렸다. 칼이 빨랫줄처럼 날아가 해적의 몸에 푹 꽂혔다.
“으아악!”
AI 전지인이 제일 오른쪽 해적의 몸에 경고 표시를 띄웠다.
- 적이 쏩니다!
나강인이 더 빨랐다. 그는 몸을 반쯤 회전시키며 왼손에 들고 있던 칼을 적을 향해 던졌다.
칼날이 고속으로 날아가 적에게 꽂혔다.
“아악!”
적은 뒤로 넘어가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이 발사되면서 총탄이 하늘로 날아갔다.
2층 보조 갑판에 있던 자칼은 이제야 나강인을 발견했다. 나강인이 바로 아래에 있는 갑판 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적들의 위치에서는 발견이 늦었다.
벌써 해적이 셋이나 칼을 맞았다. 그것도 총을 쏘려던 순서대로 맞았다.
해적도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난간 뒤로 숨었다. 자칼도 마찬가지였다.
자칼이 엄폐물 뒤에 숨은 채로 외쳤다.
“저, 저 새끼 뭐야!”
나강인은 폭이 좁은 식칼 한 자루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주방에서 던지기 좋은 칼 네 자루를 가져왔다. 그중 세 자루를 던져 해적을 잡았다.
이제 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조리실에 있던 칼 중에 투척하기 좋은 건 네 자루가 다였다.
그런데 해적이 칼보다 많이 남았다.
“지인아. 저놈들이 왜 저렇게 많아?”
- 그러게 말입니다.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적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며.”
- 적의 숫자가 분대 병력조차 되지 않습니다. 많은 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는 건 어디서 배웠냐?”
- 요원님을 보고 배웠습니다.
“참 좋은 거 배웠다.”
자칼은 2층 난간 뒤에 숨어서 부하들을 확인했다. 이미 셋이나 칼을 맞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셋이나 당한 거야? 총도 아니고 칼에? 그것도 식칼에?”
해적들의 옷에는 약간의 방검복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도 식칼에 푹푹 뚫렸다.
옆에 있던 해적이 더듬거렸다.
“그, 그런 거 같습니다.”
“저 새끼 도대체 뭐야!”
“모, 모르겠습니다!”
이태호가 활짝 웃으며 속삭였다.
“미정아. 강인 씨다. 이제 우린 살았어.”
장미정은 이민지 쪽을 자꾸 보았다.
“민지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딸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나강인이 눈빛과 손짓으로 말렸기 때문이다.
이태호가 말했다.
“내가 전에도 같이 싸워봐서 아는데, 지금은 강인 씨를 믿어야 해. 그러니까 하라는대로 해.”
나강인은 이민지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낙귀가 조금 전에 이민지를 쏘겠다고 협박하는 걸 들었다.
이제 2층 보조 갑판에는 낙귀와 해적 넷만 남았다.
낙귀가 해적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넌 조그만 여자애를 쏘고, 넌 그 옆에 예쁜 여자를 쏴라.”
해적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예? 저 칼잡이를 쏘는 게 아니고요?”
“자칼을 잡은 한국 특수요원이 권총 사격 정도는 피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연히 과장된 소문인 줄 알았는데.”
낙귀가 칼에 맞고 쓰러진 해적 셋을 보았다.
“갑판에 있는 놈이 식칼을 던져서 총을 든 녀석 셋을 잡았다. 아무래도 저놈이 그 특수요원 같아. 스칼렛에게 한국 정부의 특수요원이 무장 경호원으로 붙어 있었던 거지.”
“그럼 우리 넷이서 저놈에게 화력을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요원은 정면에서 쏜 권총을 피할 정도로 빠르고, 벽을 타고 날아다닐 만큼 점프력도 좋다더라. 낙귀의 부하들은 미련하게 저놈만 쏘다가 당했겠지.”
“아. 먼저 인질들을 쏴서 혼란에 빠뜨리는 거군요.”
“저놈은 정부 요원이니까 그러면 당황할 거야. 만약 저놈이 인질을 보호하려고 들면 더 좋지. 그렇게 놈을 흔든 후에.”
그가 다른 해적 두 명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이 일어나서 저놈을 쏴라.”
먼저 명령한 해적들에게도 추가로 지시했다.
“그때 너희도 저놈을 같이 쏴. 저놈은 그렇게 흔들어놓고 쏴야 확실히 잡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자칼이 손가락을 세웠다.
“셋. 둘. 하나. 갈겨!”
해적 두 놈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AI 전지인이 즉시 해적이 어디를 조준하는지 보여주었다.
신은하와 이민지의 주변에 경고 표시가 떴다.
낙귀는 몰랐지만 나강인은 칼이 한 자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구해야 할 사람은 둘이다.
나강인은 이미 이민지의 근처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그는 마지막 칼을 해적을 향해 던졌다.
칼이 빗살처럼 날아가 신은하를 쏘려던 해적에게 꽂혔다.
“켁!”
나강인이 이민지를 덥석 안고 뛰었다. 그가 뛴 방향은 신은하가 있는 쪽이었다.
이민지가 있던 자리에 총탄이 퍽퍽 꽂혔다.
나강인은 순식간에 신은하의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이민지를 신은하에게 던지듯이 넘기며 돌아섰다.
해적이 다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나강인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나강인의 옷이 출렁였다.
신은하가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나강인이 옆에 있는 탁자를 손으로 훑었다.
이 테이블에는 한식이 놓여있었다. 젓가락도 있었다. 오른손에 젓가락 두 개가 들어왔다.
나강인이 젓가락을 무서운 속도로 던졌다. 쇠로 만든 젓가락이 화살처럼 날아가 적의 몸에 퍽퍽 꽂혔다.
“켁!”
젓가락은 칼보다는 위력이 약했지만, 적의 사격을 저지할 순 있었다.
AI 전지인이 빠른 음성으로 경고했다.
- 적이 더 있습니다! 둘입니다!
뒤따라 일어난 두 놈이 나강인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AI 전지인이 적의 사격 예상 경로를 보여주었다. 총구가 정확히 나강인의 가슴을 노렸다.
나강인은 피할 수가 없다. 그가 피하면 뒤에 있는 신은하와 이민지가 총에 맞는다.
나강인의 가슴에 총탄이 다시 퍽퍽 꽂혔다.
신은하는 나강인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 사람인지 강남에서 충분히 보았다. 지금 그가 가만히 서서 총을 맞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피하라고!”
나강인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탕 쳤다. 그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수저가 일제히 떠올랐다.
그는 공중에 떠오른 젓가락만 잡아챘다. 순식간에 젓가락 여섯 개가 손에 들어왔다.
나강인이 쇠젓가락을 적을 향해 던졌다. 여섯 개의 쇠젓가락이 마치 부챗살처럼 쫙 퍼지며 날아갔다.
여섯 발 중에 명중한 건 두 개뿐이다. 하나는 해적의 팔에, 다른 하나는 그 옆 해적의 어깨에 박혔다.
해적 두 놈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제 잠깐 시간을 벌었다. 적의 어그로도 충분히 끌었다.
나강인이 옆 테이블로 미끄러지듯이 이동했다. 거기에는 식사용 나이프가 세 개가 올려져 있었다.
쇠젓가락은 저지력이 약했다. 비틀거리던 해적들이 다시 총을 들었다.
나강인이 식사용 나이프를 잡아 던졌다. 이번에는 젓가락이 아니라 칼이 날아가 해적의 몸에 꽂혔다.
“컥!”
다른 해적 두 놈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는 그의 뒤에는 사람이 없다.
나강인이 옆으로 움직여 사격을 피하면서 남은 나이프 두 개를 두 손으로 동시에 던졌다.
권총을 쏘던 해적들의 몸에 나이프가 퍽퍽 꽂혔다.
“컥!”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해적들이 입고 있는 옷에는 약간의 방검 능력이 있어서 끝이 둥근 식사용 나이프로는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다. 그 옷을 뚫으려면 차라리 젓가락이 나았다.
잠깐 비틀거렸던 해적 셋이 권총을 다시 들었다.
포크는 이 거리에서 던지기 적당하지 않았다. 그 테이블에는 나이프가 이제 없다.
신은하가 보조 테이블에서 쇠젓가락이 담긴 통을 찾아냈다. 그녀가 그 통을 나강인을 향해 던졌다. 쇠젓가락이 공중에 뿌려졌다.
나강인이 그 젓가락을 잡아채 적을 향해 날렸다. 이제 던질 것이 충분했다. 쇠젓가락이 기관총탄처럼 연속으로 날아갔다.
해적 세 놈의 몸에 쇠젓가락이 화살처럼 퍽퍽 꽂혔다.
해적들이 2층 보조 갑판에 고꾸라졌다.
나강인이 양손 손가락 사이마다 젓가락을 끼운 채로 2층 갑판을 보았다.
일어서는 놈이 없었다.
“다 잡았나?”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적 지휘관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주한 것 같습니다.
“어디로?”
“2층 보조 갑판은 이 배의 조타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강인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여섯 개의 젓가락을 하나로 모으면서 신은하에게 물었다.
“괜찮아?”
신은하가 황급히 다가와 나강인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었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이야! 총에 맞았…. 어?”
딱딱한 게 만져졌다. 촉감이 맨살이나 근육이 아니었다.
그녀가 물었다.
“이게 뭐야?”
“방탄조끼.”
나강인은 그가 직접 만든 드래곤 플레이트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건 철인기공에 제작과 판매를 맡긴 양산형이 아니라, 나강인이 AI 전지인과 함께 직접 제작한 강화형이었다.
신은하가 주먹으로 나강인의 팔을 때렸다.
“진짜 총에 맞은 줄 알았잖아!”
“맞을 만하더라.”
“이씨!”
신은하가 다시 나강인을 때렸다. 나강인은 그냥 맞아주면서 이민지에게 물었다.
“언니가 너무하지?”
이민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근데 총을 왜 맞았어요? 아빠한테 들었는데 과자 아저씨는 총알도 피한다면서요.”
“맞아도 별로 안 아프더라. 그래서 그냥 맞았어.”
신은하가 때리던 걸 멈추었다.
“이…씨.”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방금 전투를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겁이 많은 몇 사람은 고개를 돌렸지만, 대부분은 눈을 돌릴 생각조차 못 했다.
그들이 웅성거렸다.
“바,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총을 든 놈들을 젓가락으로 잡은 거야?”
“칼도 던진 거 같지?”
“어쨌든 해적들을 다 잡은 거지?”
이태호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살았다! 우린 살았어!”
장미정이 이태호의 옆구리에 주먹을 먹였다.
“창피하니까 조용히 해!”
창피해할 일이 아니다. 이태호의 환성 덕분에 사람들도 확실히 깨달았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졌다.
“살았어!”
“우리가 이겼다고!”
“우리가 아니라 저 청년이 이겼지만, 어쨌든 살았다!”
갑판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는 아래쪽에도 들렸다.
스칼렛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도로 계단 아래로 피했다. 그녀가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이겼어?”
비서 제시카도 한국말을 잘한다.
“어떻게?”
청년이 이겼다는 말이 들렸다. 제시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나강인이 또?”
스칼렛이 활짝 웃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그래서 강인 씨를 초대한 거잖아!”
“이렇게 될 줄 알고 초대한 건 아니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결과가 중요하지.”
“연구할 땐 과정을 그렇게 꼼꼼히 따지더니 왜 나강인 씨를 대할 때는….”
“됐어!”
스칼렛이 계단을 올라갔다.
“가서 만나야겠어!”
비서 제시카가 얼른 스칼렛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내가 먼저 볼게.”
제시카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 머리만 위쪽으로 빼꼼히 내밀었다. 갑판 위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괜찮….”
스칼렛이 제시카 옆을 휙 지나가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갑판 위로 올라가자마자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휙 넘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후에 나강인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제시카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저 꼴이지. 머리 다 헝클어진 거 어쩔 거야.”
스칼렛은 머리가 산발에 가깝게 헝클어진 줄도 모르고 도도한 표정으로 나강인에게 말했다.
“나강인 씨. 수고했어요.”
“음?”
나강인이 인상을 살짝 썼다. 스칼렛은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즉시 꼬리를 말았다.
“아? 아. 제가 한국말 조금밖에 못 해요. 할머니가 조금 가르쳐주셨어요.”
“갑자기 못하는 척하지 마시고.”
“죄송해요. 한국 드라마에서 본 걸 따라 해봤어요.”
“그런 거 같더군요.”
그녀가 진심으로 인사했다.
“또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저놈들은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 거 같았으니까.”
“기밀 서버 접속코드를 원하는 거예요.”
스칼렛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지난번 사태 후에 기밀 서버의 보안등급을 두 단계나 높여놨거든요? 그래서 이젠 접속코드만 알아서는 들어갈 수 없는데, 저놈들은 그것까진 몰랐나 봐요.”
“아마 저놈도 자칼과 비슷한 때에 비슷한 방식으로 청부를 받았겠지요. 그래서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나강인이 물었다.
“기밀 서버요?”
“아. 우리 회사의 기밀 서버예요. 거기에…. 기밀이라 뭐가 있는지는 말 못해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강인이 작게 물었다.
“너 이제 데이터도 없이 막연한 추측도 하냐?”
- 자연로보틱스의 신체삽입형 AI는 경험을 통해 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