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75화 (75/411)

75. 가이드

철인기공 윤주성 이사가 물었다.

“잠깐만. 조준선을 저런 식으로 바꾼 것만으로 고속 이동 물체 명중률이 올라가?”

조준기 개발팀장이 대답했다.

“배치만 추가한 건 아닙니다. 나 팀장이 조언한 방향으로 소프트웨어도 수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능 테스트만 가능하게 소스코드를 마구 집어넣은 수준입니다만.”

다른 이사가 감탄했다.

“와…. 사격 고수는 장비를 딱 보기만 해도 저런 개선점이 떠오르나?”

철인기공 사장 이정민이 질문했다.

“그러니까 저 테스트 모듈은 저 그림을 보고 그대로 만들는데, 나 팀장은 저 그림을 현장에서 그렸다는 건가?”

“예. 나 팀장의 그림은 마치 눈앞에 있는 물건을 보면서 그린 것처럼 정밀해서, 구현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화가의 재능까지 있다는 건가?”

“그건 저도 잘….”

“그래서 저 제품의 단점은?”

“예측 조준 기능을 제외했는데도 제작비가 올라갔습니다.”

“홀로그램 모듈을 두 개나 쓰는데 당연하겠지.”

“배터리 소모도 빠릅니다.”

“그것도 당연하고. 다른 단점은?”

“없습니다.”

“어? 단점이 그게 다야?”

“양산 단계에서는 달라질 수 있지만, 저희 팀이 테스트했을 때는 다른 단점은 없었습니다.”

사장 이정민이 회의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문제는 제품 단가라는 건데….”

본부장 이태성이 의견을 말했다.

“제작비가 올라가는 건 고급형 모델로 따로 출시해서 가격을 높여 받으면 됩니다.”

“좋은 생각이야. 매출이야 안 나오겠지만, 우리 기술력을 보여주는 좋은 홍보수단은 되겠지. 조 팀장. 배터리 소모가 아무리 빨라도 전투 도중이 꺼질 정도는 아니지?”

“예. 그렇습니다.”

사장 이정민이 씩 웃으면 손을 비볐다.

“그럼 고급형 모델을 개발해야지. 반대하는 사람 없으면 이 자리에서 결정하고 진행하자고.”

당연히 반대는 없었다. 대신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있었다.

윤주성 이사가 물었다.

“조 팀장. 이런 간단한 조치로 조준기의 성능이 좋아진다는 걸 나 팀장은 어떻게 알았지? 제품을 미리 보내줬나?”

“아닙니다. 사격장에서 탄창 하나를 비우더니 그 자리에서 제안하더군요.”

“아니, 그게 말이 돼?”

“원래는 말이 안 되긴 합니다만….”

본부장 이태성이 말했다.

“윤 이사님. 나 팀장이라면 현장에서 개선점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드래곤 플레이트의 개발자인 데다가 실전 사격의 고수니까요.”

“아니, 아무리 드래곤 플레이트의 개발자라고 해도…. 설마 무기 공학의 마스터라도 되는 건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만들고 조준기도 그 자리에서 업그레이드할 부분을 찾아내는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교수님 중에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공들여 만든 걸 쓱 보고는 그 자리에서 개선점을 말해주시곤 했습니다.”

“그거야 대학생과 교수는 지식이 차원이 다르니까…. 어? 그럼 나 팀장은 차원이 다른 무기 공학자라는 이야기야?”

사장 이정민이 대놓고 입맛을 다셨다.

“딸이나 손녀가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

그런데 이정민에게는 딸이 없다. 아들만 둘이다. 하나 있는 손녀는 초등학생이다.

이태성이 말했다.

“불가능한 걸 바라셔 봤자….”

이정민이 이태성에게 화를 벌컥 냈다.

“네가 일찍 결혼만 했어도! 넌 왜 결혼을 안 하냐!”

“왜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십니까? 지금 회의 중입니다.”

“젠장. 역시 이런 놈들 말고 딸을 하나 낳았어야 했어.”

윤주성 이사가 손을 슬그머니 들었다.

“사장님. 제가 딸이 있으니까, 제 사위로 삼….”

“윤 이사 딸? 걔 이제 겨우 대학교 1학년 아냐? 장난해?”

***

며칠 뒤에 작곡가 곽찬석이 피시방으로 찾아왔다.

차은서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앗! 곽찬석 작곡가님?”

“어…. 여기서 저를 알아보는 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곽찬석은 방송에 가끔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길게 나온 적은 없다. 보통은 가수가 그를 찾아가서 몇 마디 나누는 장면이 방송에 슬쩍 나가곤 했다. 그래서 일반인이 그를 알아보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차은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팬이에요!”

“고맙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 안내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오늘은 나강인 씨를 만나러 온 거라서요.”

“네? 아! 오늘 강인 오빠가 밥하는 날인 거 알고 오셨구나! 지금 요리하고 있어요.”

곽찬석이 막내 여동생 곽유선과 레스토랑에서 나강인을 만났을 때, 배우 김유찬이 그의 요리 실력을 엄청 자랑했다.

곽찬석은 그때 일이 생각났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 온 김에 그 맛있다는 요리를 먹어볼까?’

“여기서 식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인 오빠 고정석 근처 자리를 드릴 테니까, 거기서 모니터를 보고 주문하세요. 아니다. 제가 직접 설명해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

오늘 요리는 이 피시방에서 종종 나오는 잡탕밥이다.

곽찬석은 모니터 앞에서 그 요리를 먹으며 감탄했다.

“이거 진짜 맛있네.”

그는 왜 김유찬이 나강인의 요리 실력을 그렇게 칭찬했는지 이해가 갔다. 너무 맛있어서 먹을 때마다 점점 줄어드는 음식이 안타까웠다.

그는 그릇을 완전히 비운 후에 고민했다.

‘한 그릇 더 시켜야 하나? 배가 부른데….’

그는 고민이 됐다. 밥값이 문제가 아니라 배가 부른 게 문제였다. 새로 주문한 밥을 반 이상을 남기면 요리를 한 나강인에게 예의가 아니다.

그의 옆자리에 젊은 여자가 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로 가리고 코트까지 입었다. 그렇게 가렸는데도 풍기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곽찬석은 이런 사람을 평소에도 자주 본다.

‘이건 연예인 느낌인데?’

곽찬석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옆자리 여자도 곽찬석을 슬쩍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앗! 곽찬석 작곡가님?”

“어…. 누구신지?”

신은하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저예요.”

“아. 신은….”

곽찬석이 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신은하 씨가 여기는 왜 왔습니까?”

“밥 먹으러 왔죠. 오늘 강인 오빠가 밥을 판다고 해서요.”

“아아. 이 밥이라면 그럴 가치가 있죠. 그럼 이제 주문할 겁니까?”

곽찬석은 신은하가 주문할 때 같이 한 그릇 더 주문할까 싶어서 물어봤다. 그런데 신은하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아뇨. 전 직원 휴게실에서 먹을 거예요.”

“네? 이 피시방 직원 휴게실을 왜 은하 씨가….”

“저 여기 애들이랑 되게 친해요. 여기 사장 아저씨하고도 옛날부터 잘 알고요. 저 원래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아아.”

“근데요. 곽찬석 작곡가님처럼 유명한 분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

신은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작곡가님. 제가 진짜 노래 잘하는 신인 한 명 추천해도 될까요?”

“신인이요?”

“아직 CM송 하나밖에 발표한 게 없지만, 진짜 노래 잘해요. 아. 지금 들려드릴게요.”

신은하가 얼른 인터넷을 검색해 음료 광고를 찾았다. 인터넷에는 나강인이 CM송을 부른 부분만 따로 편집된 영상도 있었다.

“이거요. TV에서 자주 보셨죠? 이 노래 부른 신인을 제가 알거든요?”

“어…. 저도 압니다만?”

신은하가 또 활짝 웃었다.

“아! 따로 알아보셨구나!”

“이 노래를 제가 작곡했습니다만….”

“네?”

“거기까진 안 알아보셨나 봅니다. 신은하 씨가 출연한 CF인데.”

“어…. 어….”

그녀가 시선을 슬쩍 피하다가 도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진짜 노래 잘하죠? 막 곡 하나 주고 싶고 그러죠?”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네? 앗! 설마!”

신은하가 환성을 질렀다.

“꺄아아! 읍!”

그녀가 얼른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님들의 눈치를 살폈다. 피시방에서 소리를 잠깐 질렀다고 해서 누가 찾아오진 않았다.

“작곡가님. 강인 오빠 주려는 노래는 장르가 뭔가요? 발라드? 댄스? 힙합? 설마 랩?”

“곡 가이드 알바를….”

신은하는 당황했다.

“넹? 알바요?”

***

피시방 주방에서 곽찬석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김유찬 씨에게 들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알바를 하신다고요.”

배우 김유찬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냥 이것저것 하는 편입니다.”

신유미가 옆에서 뿌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다 엄청 잘하는데.”

“넌 왜 부어 있냐?”

신은하가 툴툴댔다.

“아니, 유명한 작곡가님이 직접 찾아오시길래 당연히 강인 오빠한테 곡 주려고 오신 줄 알았는데….”

곽찬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곡을 쏟아내는 스타일은 아니다.

작곡할 때는 하나하나 다듬어서 만든다. 그러다 마음에 안 들면 구석에 묻어뒀다가 나중에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다듬는다. 그렇게 다듬어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 곡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도로 묻어둔다.

그는 곡 하나하나를 공을 들여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곡이 금방 나오진 않는다.

대신에 그가 만든 곡은 히트곡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완성한 곡은 이미 계약이 되어 있어서 나강인을 줄 수 없다. 가수 기획사 사장은 곡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계약부터 했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아 묻어버린 곡을 나강인에게 줄 수도 없다.

나강인은 곽찬석의 막내 여동생 곽유선을 감전사고에서 구해줬다. 곽찬석은 그 신세를 좀 갚고 싶다. 묻어버린 곡을 주는 건 그의 기준에서는 신세를 갚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 그는 나강인이 다양한 알바를 한다는 말을 배우 김유찬을 통해 들었다. 그래서 신곡의 가이드 알바라도 제안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이 정도로 신세를 갚을 순 없지만, 소소하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나강인도 카메라 앞이나 대규모 공연장에서 노래하는 것만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늘 밥은 다 팔았는데, 지금 가면 됩니까?”

곽찬석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가시죠. 저녁도 제가 사겠….”

그는 방금 먹은 잡탕밥 생각이 났다. 어지간한 식당에 가도 그런 맛있는 음식을 먹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더 맛있는 걸 살 수 없다면, 정성이라도 들어간 요리를 대접하는 방법도 있다.

“저녁은 우리 막내가 준비할 겁니다. 유선이가 제가 굶어 죽지 않게 하려고 식사를 차려주곤 합니다. 제가 곡에 집중하면 밥도 거르고 그러거든요. 하하하.”

신은하가 얼른 말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곽찬석이 물었다.

“은하 씨는 스케줄이 없습니까?”

“저 요즘 휴식기라 놀아요. 시간 많아요.”

“요즘 한창 잘나갈 텐데 휴식기요?”

그녀는 최근에 사건 사고를 많이 겪어서 영화나 드라마는 당분간 쉬기로 했다. 지금은 CF나 간단한 행사 참여만 한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요.”

“어…. 그럼 뭐….”

그들은 곽찬석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곽찬석은 넓은 단독주택을 사서 1층은 주거 공간으로 쓰고 2층을 작업실로 썼다.

곽찬석이 설명했다.

“가이드 녹음은 가수처럼 잘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음정과 박자, 분위기를 가수가 이해하기 쉽게 부르면 됩니다. 제가 의도한 게 있는 부분은 따로 말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악보를 보았다. 그 악보에는 노래할 때 주의할 점이 잔뜩 적혀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개인 노래방 모드를 활성화합니다.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악보와 가사가 떴다. 악보는 곽찬석이 프린터로 출력해준 악보 그대로였다.

- 이 노래의 정보가 부족하여 노래방 모드의 기능을 모두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정보가 추가되면 기능을 확장하겠습니다.

곽찬석이 말했다.

“일단 한 번 불러보시죠. 나강인 씨의 목소리부터 듣고 나서 손볼 곳을 찾아야 하니까요. 아. 음정과 박자는 최대한 정확하게 해주시고요.”

나강인이 악보를 대충 본 후에 앞을 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지금 AR 렌즈에는 2082년식 개인 노래방 모드의 악보가 떠 있다. AI 전지인은 음정과 박자를 조금 더 정확하게 하는 정도의 보정작업만 했다.

녹음실 밖에서 신은하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와. 악보를 한번 보고 다 외웠나 보다. 하다 하다 이젠 기억까지 잘해.”

곽찬석은 다른 것 때문에 놀랐다.

“음정과 박자가 완벽하잖아?”

처음이니까 정확하게 불러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부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목소리도 좋아.”

나강인의 목소리는 원래 듣기 좋은 음성이다. 노래를 부를 때는 더 듣기 좋아졌다.

노래가 끝났다.

곽찬석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비볐다. 흥이 돋았다.

“목소리가 참 좋군요. 음정과 박자도 기계처럼 정확하고요. 자 이제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서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

가이드 녹음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은 2층이 아니라 1층에서 요리 재료를 준비하면서 기다렸다.

곽찬석도 녹음장비를 잘 다루기 때문에 가이드 녹음만 할 때는 그녀의 도움까지는 필요 없었다.

그녀는 곽찬석이 내려오자 불평했다.

“큰오빠. 무슨 가이드 녹음을 이렇게 오래 해?”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곽유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인 씨가 노래 잘하는 줄 알았는데, 영 아니야? 이상하다. 그날 CF 촬영장에서는 미리 연습한 노래가 아닌데도 진짜 잘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도 적당히 시키지. 어차피 가이드 녹음인데.”

“적당히가 안 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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