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가이드 II
작곡가 곽찬석이 녹음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엔 마치 기계가 부르는 것처럼 정확하게 하더라. 물론 그것도 대단한 거지만 감정 처리는 좀 약하더라고.”
곽유선이 물었다.
“그래서 두 시간이나 걸렸어? 감정 처리가 안 돼서?”
“아니. 처음엔 그랬는데, 그다음부터는 내가 말하는 걸 바로바로 흡수하더라.”
“으응?”
“더 놀라운 건, 일단 한 번 제대로 해낸 건 그다음부터는 실수를 안 해. 뭐든 한 방에 자기 걸로 만들더라니까?”
AI 전지인이 곽찬석의 말을 알아보기 쉬운 기호로 바꿔 AR 렌즈의 악보에 추가했다. 그걸 보면서 노래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거기다 AI 전지인의 음정 보조까지 들어갔다.
“노래를 다시 할 때마다 점점 나아지니까 멈출 수가 없었어.”
“그 정도야?”
“어. 그 정도야. 목소리도 좋지만 습득하는 재능은 더 좋더라.”
나강인과 신은하가 2층 녹음실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이 작은 목소리로 작곡가 곽찬석을 구박했다.
“큰오빠. 근데 은하 씨는 도대체 왜 데려왔어? 안 바쁘대?”
“요즘 논다더라.”
“칫.”
두 사람이 계단을 다 내려오자마자 곽유선이 활짝 웃으며 나강인에게 말했다.
“강인 씨. 요리 엄청 잘하신다면서요?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AI 전지인이 반대했다.
- 요리는 원래 남이 만들어준 요리가 최고입니다. 직접 만들면 얻어먹는 보람이 없습니다.
“그건 나도 동의하는데, 손은 안 쓰고 말로만 도와주는 정도는 괜찮잖아?”
- 간섭질이라면 찬성입니다.
“넌 나쁜 말을 너무 빨리 배우는 거 같다. 간섭질이 뭐냐? 적절한 조언이지.”
나강인이 곽유선에게 말했다.
“기왕이면 유선 씨가 요리하시고, 저는 옆에서 조언만 조금 하는 게 어떨까요? 유선 씨 요리 맛이 궁금해서요.”
그녀가 방긋 웃었다.
“아. 그러실래요? 그것도 좋죠.”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앗! 고맙습니다!”
주방이 광활하게 넓은 게 아니라면, 설거지를 중간에 하면서 요리해야 일이 편하다.
곽유선이 요리를 시작했다. 재료는 이미 다듬어두었기 때문에 밑간 같은 건 조언받을 게 없었다. 그래도 불 조절이나 양념의 사용량 조절 등등 나강인이 간섭할 건 많았다.
신은하가 그 모습을 보며 툴툴댔다.
“나도 다음에는 라면 정도는 직접 끓여야겠다.”
그녀가 곽찬석에게 물었다.
“곽 작곡가님. 강인 오빠 노래 들어보니까 어때요?”
“직업 가수도 아닌데 그렇게 부르려면 재능을 타고나야 합니다.”
툴툴대던 그녀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밝아졌다.
“역시 그쵸? 막 곡을 주고 싶죠?”
“그러고 싶은데, 줄 곡이 없습니다.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네? 보통 유명 작곡가들은 킵해 놓은 곡 몇 개는 있지 않아요?”
“난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아서요. 폐기나 보류는 있어도 킵한 건 없습니다.”
“그럼 오늘 그 노래는요? 진짜 강인 오빠한테 딱이던데.”
“딱이긴 한데….”
“그럼 강인 오빠 주면 되죠.”
곽찬석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 곡은 이미 계약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아. 곡을 만들기도 전에 계약부터 하시는 타입이시구나.”
“원래는 안 그럽니다. 그런데 이번 곡은 친구가 하도 졸라서…. 하, 하하.”
식사 준비가 끝났다. 식탁에는 한식, 양식, 일식이 골고루 차려졌다.
곽찬석이 감탄했다.
“이야아. 진수성찬이네. 잔칫날 같…. 아니, 우리가 원래 평소에도 자주 이렇게 먹지. 암. 그렇고말고.”
식사가 시작됐다. 곽찬석은 먼저 찌개를 맛보았다.
“어?”
맛있었다.
“와…. 우리 유선이가 원래 요리를 잘하기는 하지만….”
곽유선은 요리를 상당히 잘한다.
요리 실력이 없으면 아무리 사전에 준비를 해뒀어도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이렇게 빨리 차릴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찌개는 평소에 곽찬석이 먹던 것보다 더 맛있었다.
신은하가 국자로 찌개를 퍼서 그릇에 옮긴 후에 맛을 보았다.
그녀가 먹어도 맛있었다.
“나도 요리를 배워야 하나….”
그녀는 그동안은 나강인이 해주는 걸 먹기만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위기감이 좀 느껴졌다.
곽찬석이 이번에는 튀김을 하나 집어 먹었다.
“와…. 바삭거리는 느낌이 예술이다. 유선아. 너 이 정도였냐?”
“강인 씨가 기름 온도랑 튀김을 넣고 빼는 타이밍을 알려줬거든. 그대로 했더니 이렇게 바삭하게 튀겨졌어.”
곽찬석은 나강인이 요리를 만들 때 손은 대지 않은 걸 분명히 보았다.
“말만 가지고 이렇게 맛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건가? 이런 능력이 있으면 요리 방송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큰오빠. 요리 방송이라니?”
곽찬석이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말했다.
“초보 연예인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는 방송. 강인 씨는 손은 대지 않고 옆에서 말로 설명만 하고, 요리는 연예인들이 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데도 진짜 맛있는 요리가 쑥쑥 나오는 거야.”
“와. 그거 정말 괜찮겠다.”
신은하도 이 이야기에는 관심을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원래 강인 오빠 요리법은 보통 사람은 못 따라 해요. 일단 힘이 엄청 세야 하고, 양념이나 불 조절도 감으로 해야 하거든요.”
곽유선이 반박했다.
“옆에서 조언만 해주셔도 이렇게 맛있는데요?”
“직접 하는 건 더 맛있어요.”
“와. 나도 먹고 싶다.”
“난 자주 먹는데. 어쨌든, 그만큼은 아니라도 조언만 했는데 이렇게 원래 실력보다 맛있어지면, 이걸 콘셉트로 방송 만들면 대박 칠 걸요?”
곽찬석이 제안했다.
“나강인 씨. 제가 방송계에 아는 사람이 좀 있는데, 이야기해볼까요?”
신은하가 질세라 나섰다.
“오빠. 나도 아는 분 많아. 나 전에 드라마도 했잖아. 내가 이야기해볼게.”
나강인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안 해. 안 합니다.”
“아, 왜!”
“난 아직 방송에 나갈 때가 아니다.”
-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신은하는 그 말을 잘못 이해했다.
“강인 오빠 정도면 이미 그 정도 급은 되고도 남는데 왜?”
“지금은 안 해.”
“어? 그럼 나중에는 할 거야? 언제? 응?”
“밥 먹자. 맛있다.”
***
나강인과 신은하는 저녁을 잘 얻어먹고 돌아갔다.
곽유선은 신나서 곽찬석에게 말했다.
“큰오빠. 우리 이런 자리 자주 만들자. 오늘처럼만 하면 내 요리 실력이 쑥쑥 늘 거 같아. 아니면 나도 그 요리 방송에 나갈까?”
“아직 있지도 않은 그 요리 방송? 강인 씨도 지금은 안 한다고 한 그 방송 말이야?”
“지금만 안 한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언젠간 나랑 같이 그 방송에 나가지 않을까?”
“유선아. 네가 아주 김칫국을 사발로 드링킹 하는구나.”
곽찬석은 그날 밤에 2층 녹음실에서 오늘 녹음한 곡을 들었다. 그가 시계를 보았다. 이미 밤 열한 시였다.
“전화하기엔 좀 늦은 시간이니까 이메일만 보내야겠네.”
그는 녹음 파일을 이메일에 첨부해 계약된 기획사로 보냈다.
***
가수 소속사 중에서 규모가 크고 잘나가는 다섯 회사를 빅파이브라고 불렀다.
SAH 엔터는 음악계 빅파이브에는 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언저리는 가는 중견 기획사다.
게다가 SAH 엔터에는 가수 라인만 있는 게 아니라 배우 라인도 있다.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은 예전에 히트곡을 여럿 낸 가수다. 그는 이제 가수 활동은 거의 접었지만, 요즘도 가끔 싱글 음반을 내곤 한다.
그는 지금 회사 소속 가수들을 모아놓고 회식 중이다.
SAH 엔터의 배우들은 각자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으기 쉽지 않았다.
반면에 소속 가수 중에는 서재현이 예전부터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가수 라인은 이렇게 서재현을 핑계로 종종 모여 놀았다.
이 회식에 소속 가수가 다 온 건 아니다. 그래도 시간이 되는 사람들을 모았더니 숫자가 제법 많았다.
SAH 엔터는 아이돌 팀을 두 개 데뷔시켰다. 남자 넷 한 팀과 여자 넷 한 팀인데, 둘 다 뜨진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묻힌 건 아니라서 가끔 작은 행사가 들어오긴 한다.
그 아이돌 두 팀 여덟 명도 회식에 참가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보는 푸짐한 음식을 맘껏 즐겼다.
걸그룹 프프걸스 네 명도 잘 먹었다.
매니저들은 다른 방에 따로 모여서 회식하고 있어서 오늘은 그녀들을 터치할 사람도 없었다.
“회식 매일 했으면 좋겠다.”
“진짜. 고기도 맛있고 술도 맛있어.”
프프걸스 막내가 말했다.
“나도 술 마시고 싶다.”
“미성년자가 술 마시기 있기 없기?”
“안 들키면 되기?”
“사장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는데? 넌 콜라나 마셔.”
사장 서재현의 눈에도 프프걸스 네 명이 열심히 먹는 모습이 들어왔다.
당연히 체중관리를 하라고 한소리 해야 하는데, 너무 맛있게 먹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재현이 그녀들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먹어라. 오늘 하루 잘 먹는다고 무슨 일 나겠냐.”
그렇다고 무작정 잘 먹이기만 하면 스케줄이 들어왔을 때 문제가 생긴다.
“오늘 먹은 건 트레이너가 며칠 굴리면 빠지겠지. 내일부터 고생 좀 하겠다.”
그들이 있는 방에 SAH 엔터 직원이 들어왔다.
그 직원은 조금 전까지는 옆방에서 매니저들과 회식 중이었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왜? 고기가 모자라? 더 시켜. 우리가 설마 밥값이 없겠냐? 아예 소 한 마리 잡으라고 해.”
“그게 아니라요. 곽찬석 작곡가가 저희 팀 이메일 계정으로 곡을 보냈습니다.”
서재현은 현역으로 한창 활동할 때 히트곡을 몇 번이나 낸 중견 가수다. 그래서 SAH 엔터에는 그의 음악적 능력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회사로 들어오는 모든 곡을 사장인 서재현이 듣는 건 아니다. 그래도 중요한 곡은 그가 직접 듣고 판단했다.
곽찬석은 한두 달에 한 곡 정도 작곡하는데, 그가 만든 곡은 대부분 인기가 있었다. 히트곡도 자주 나왔다.
가수들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사장님. 곽찬석 작곡가님이 곡을 보냈어요?”
“와. 역시 우리 사장님! 곡 섭외력 쩔어!”
술이 좀 들어간 서재현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자랑했다.
“내가 말이야. 한 달쯤 전에 찬석이하고 둘이서 술을 마셨거든? 그때 새 곡 들어갔다고 하길래 그 자리에서 바로 그건 나 달라고 했지. 그, 술집에서 종이 빌려서 계약서까지 썼단 말이야.”
“와. 그분은 원래 그런 식으로는 계약 잘 안 한다고 들었는데요.”
“남들하고는 그렇게 안 하지. 걔가 내 친구니까 해준 거야.”
“하긴. 사장님이 활동 많이 하실 때 히트한 곡 중에 곽찬석 작곡가님이 만드신 거 많잖아요.”
곽찬석이 만든 곳을 서재현이 다 부른 건 아니다. 그는 그중 몇 곡만 가져갔다. 그렇게 가져가 부른 노래들은 다 반응이 좋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가수들은 모두 곽찬석의 곡을 원했다. 마침 신곡이 하나 들어왔다.
문제는 오늘 들어온 그 곡에 이미 주인이 있느냐다.
가수 중에는 서재현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 그 가수가 총대를 매고 물었다.
“서 사장. 그래서 그 노래는 누구 주기로 한 거야?”
서재현이 가수들의 뜨거운 눈빛을 즐기며 말했다.
“형. 나도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노래인데, 누구를 줄지를 어떻게 미리 결정해? 아직 주인 없어.”
즉시 가수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사장님! 제가 꼭 부르고 싶습니다!”
“오빠! 나! 나!”
“재현아! 형 한 번만 도와줘! 우리 딸이 학교에서 아빠 자랑 좀 하게!”
아이돌 그룹 두 팀도 얼른 손을 들었다가, 다른 쟁쟁한 가수들이 경쟁하는 걸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서재현이 왼손을 쓱 들었다.
사람들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들 다시 곡을 달라고 외치려고 입을 움찔거렸다.
서재현이 말했다.
“일단 노래부터 들어보자. 나도 기대된다. 들어보고 노래가 자기랑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사람은 알아서 손 내려.”
직원이 스마트폰으로 곡을 내려받은 후에 휴대용 스피커에 연결했다.
옆방에서 회식 중이던 매니저들도 소식을 듣고 이쪽 방으로 넘어왔다.
스피커에서 곽찬석이 작곡한 새 노래가 흘러나왔다.
몇 사람은 눈을 감고 그 노래를 들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스피커를 보며 노래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와….”
“좋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래를 듣다가 당황했다.
“어?”
노래가 끝난 후에 가수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사장님. 이거 우리 주는 곡 맞아요?”
서재현도 당황한 상태다.
“그, 그렇지?”
“그런데 이미 가수가 불렀는데요?”
이 파일은 나강인이 가이드 녹음을 한 것이다.
가수들이 수군거렸다.
“와. 누구지?”
“실력 장난 아닌데?”
“노래만 듣고는 누군지 모르겠다.”
“난 포기.”
“나도 포기. 이거 내가 부르면 저렇게 못 부를 거 같아.”
모든 가수가 포기한 건 아니다.
“사장님. 어쨌든 우리 회사에 주기로 계약된 거라면서요? 누가 침을 바르려는지 몰라도 결국 우리 거잖아요.”
“맞다! 그럼 내가 진짜 잘 불러볼게!”
“제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서재현이 왼손을 흔들었다.
“잠깐 기다려봐.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게.”
서재현이 곽찬석에게 전화했다. 곽찬석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서재현이 말했다.
“어. 찬석아. 지금 스피커폰 통화다. 방금 보낸 노래 들었다.”
- 좋지?
“당연히 최고지. 그런데 이거 우리 주는 곡 맞지?”
- 달라며?
“그런데 왜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이미 있어? 이 가수한테도 이 곡을 준 거야?”
- 아냐. 보내준 파일은 가이드 녹음한 거야.”
서재현은 당황했다.
“어?”
- 가이드 딴 거라고.
서재현이 잠시 이유를 궁리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갔다.
“이 정도 급이 되는 가수가 가이드를 왜 불러? 당연히 이유가 있어서겠지. 이 곡 달라고 시위한 거구나? 누구야? 내가 아는 가수지?”
- 가수 아닌데?
“어?”
- 가수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