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77화 (77/411)

77. 하룻강아지

작곡가 곽찬석은 가이드 녹음을 한 사람이 가수가 아니라고 말했다. 스피커폰을 통해 나온 그 말을 회식에 참석했던 가수들이 모두 들었다.

곡 경쟁을 포기했던 가수 몇 명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럼 저도 다시 도전을….”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이 급히 물었다.

“잠깐만! 그럼 계약된 곳도 없겠네?”

- 무슨 소리야? 그 곡은 너랑 계약했잖아.

“아니, 곡 말고, 가이드 녹음한 그 사람 말이야. 가수가 아니라며?”

곽찬석도 나강인의 사정을 정확히는 모른다.

- 어…. 아마 없겠지?

서재현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찬석아. 그 사람 연락처 좀 주라. 우리 회사랑 계약하게.”

곽찬석이 나강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연예계에서 도는 소문을 들은 게 좀 있다.

- 계약? 어려울걸?

서재현이 큰소리쳤다.

“야. 우리가 가수 라인만 놓고 보면 빅파이브는 아니지만, 배우 라인까지 합치면 규모가 빅파이브에 밀리지 않아.”

- 그게 아니라, 계약하고 싶어 하는 곳이 여럿 있었는데 다 거절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서재현은 당황했다.

“어? 벌써 알 만한 회사는 다 알아? 그런데 난 왜 모르지? 우리 계약팀이 요즘 일을 안 하나?”

- 가수가 아니니까 몰랐겠지.

서재현은 이야기가 자꾸 엇갈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 그럼 어떤 회사들이 그 사람하고 계약하고 싶어 한다는 거야? 빅파이브 중 하나야?”

- 아니. 배우 소속사들. CF 제작사는 급이 안 돼서 제안을 해보지도 못했다더라.

서재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 사람 혹시 배우야? 이야아. 우리 회사가 또 배우 라인이 빵빵하잖아. 가수와 배우 다 하려면 우리 회사가 딱이지!”

- 아니. 요리사야.

“어?”

- 그리고 무술감독이면서 엔지니어?

곽찬석이 들은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나강인이 장비를 고칠 수 있다는 건 곽유선 감전사고 때 알게 됐다.

“잠깐. 이 사람 직업이 세 개나 돼?”

- 더 많다던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서재현은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다.

“아, 됐어. 그게 뭐 중요하겠어? 내가 가서 확 그냥 우리 회사로 납치를….”

곽찬석이 말했다.

- 야. 예의는 지켜라.

“응?”

- 우리 막내 생명의 은인이야.

“어? 유선이 어디 아파?”

곽찬석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화를 벌컥 냈다.

- 넌 친구라는 새끼가. 됐어. 끊어!

전화가 뚝 끊겼다.

서재현이 스마트폰을 멍하니 보며 말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거야?”

***

이튿날 드라마 피디 최진욱이 나강인의 전화번호를 드라마 작가 도주희에게 보여줬다.

“이게 뭔지 알아?”

“전화번호잖아. 누구 건데?”

“‘햇살 좋은 날’ 무술감독.”

“아아. 그 영화….”

최진욱이 투덜댔다.

“왜 이리 반응이 시큰둥하지? 내가 이 전화번호 진짜 어렵게 알아냈는데?”

도주희가 코웃음 쳤다.

“소속사에 전화만 하면 아는 걸 생색은.”

“이 사람은 소속사가 없어. 연락처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도주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그럼 아마추어야?”

“에이. 설마 이 실력에 아마추어겠어? 사정이 있어서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는 것뿐이겠지. 그런데 진짜 왜 이렇게 시큰둥해?”

도주희가 웅얼거렸다.

“아니, 난 우리 드라마에 굳이 무술감독까지 쓸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러지. 그냥 가벼운 다툼인데 무술감독이 오면 괜히 액션이 커지잖아.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촬영 시간이 여유가 없는데 언제 동선 짜고 손발 맞춰보고 연습까지 하냐고.”

최진욱이 장담했다.

“내가 설마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런 거 다 안 해도 돼.”

“그 정도로 간단한 액션이야? 그럼 왜 무술감독이 필요한데?”

최진욱 피디가 씩 웃으며 설명했다.

“내가 결혼식 피로연에서 감독님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햇살 좋은 날’의 모든 액션은 이 사람이 연습 한 번 안 하고 현장에서 바로 만들어낸 거래.”

“응? 그게 어떻게 가능해?”

“진짜로 그랬대. 그러니까 내가 이거다 싶어서 어렵게 연락처를 알아냈지.”

“음….”

도주희는 계속 시큰둥했다. 믿어지지 않는 소리여서다.

최진욱이 제안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이번에 한 번 찍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 영상은 쓰지 말자.”

“그래. 뭐. 뺄 수도 있으면 나도 반대 안 할게.”

최진욱이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자. 전화가 들어간다. 딴따라 딴따….”

- 사용자가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어?”

***

나강인이 스마트폰에 뜬 번호를 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광고인가?”

그는 모르는 번호는 어지간하면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철인기공 설계팀 차지희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 나 팀장님. 드래곤 플레이트 주문이 열 개나 새로 들어왔어요!

“같은 나라에서 온 주문입니까?”

- 아뇨! 이번엔 우리나라예요!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희 씨. 드래곤 플레이트는 방어 장비 인증을 아무것도 받지 않아서 정부에 팔 수 없을 줄 알았는데요?”

- 저희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래도 굳이 쓰고 싶다네요. 이히히히.

“좋나 봅니다.”

- 좋죠. 제가 만든 걸 우리나라의 중요한 분들이 쓸 테니까요. 누구지? 비밀요원? 고위층? 장관급인가? 앗! 혹시 청와대? 꺄아아.

“그거야 신체 사이즈 측정할 때 알게 되겠죠.”

- 아. 그래서 말인데요. 정부 관계자가 팀장님을 만나고 싶대요. 어떻게 할까요?

나강인이 휴대폰을 입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정부에 아는 사람이 생겨서 나쁠 건 없지?”

- 지금 이 시대에 요원님의 신분은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작전 지역 행정관과 접점을 만들면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강인이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오늘은 저녁때 피시방에서 밥을 팔아야 하니까, 그리로 오라고 하세요.”

- 네? 거기로요?

“싫으면 말라고 해요.”

- 네. 그렇게 전할게요.

***

드라마 피디 최진욱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통화 중이네? 뭐야?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거야?”

드라마 작가 도주희가 말했다.

“그냥 포기해.”

“그럴 순 없지. 나도 오기가 있는데. 가서 만나봐야겠어.”

“우리 스케줄 여유 별로 없는데.”

“오늘 잠깐 비잖아. 얼른 갔다 올게.”

***

나강인은 제작 거점에서 새 방탄조끼를 완성했다.

“잘 빠졌다.”

그런데 그 방탄조끼는 허리가 가늘어서 나강인은 입을 수 없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민간인에게 군용 드래곤 플레이트를 제공하는 건 규정 위반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강인이 마네킹에 걸려 있는 드래곤 플레이트를 보았다. 사용자의 늘씬한 몸매가 방탄조끼에 그대로 드러났다.

“현지 협조자잖아.”

- 신은하는 협조자치고는 전투력이 형편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게 더 필요하지. 은하가 총 맞을 뻔한 일이 어디 한 번이냐?”

- 두 번입니다.

“거봐. 규정 따지다가 협조자를 잃으면 되겠어? 안 되겠어?”

- 요원님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강인이 손을 닦으며 말을 돌렸다.

“이제 피시방이나 가자.”

-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제작 거점 바깥 공터에 검은색 승용차가 한 대 주차했다. 그 승용차에서 남녀 두 사람이 내렸다.

그들이 제작 거점 현관의 벨을 눌렀다. 나강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누구십니까?”

남자가 말했다.

“드래곤 플레이트 의뢰 건으로 방문했습니다.”

“정부에서 오신 분이군요. 그런데 피시방에서 보자고 했을 텐데요?”

남자 요원이 씩 웃었다.

“그건 공식 의뢰일 테니까 다른 사람이 찾아갈 겁니다. 저희 의뢰는 비공식이라 기록이 남으면 곤란해서요.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해도 될까요?”

나강인이 일단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여자 요원이 마네킹에 걸려 있는 드래곤 플레이트 방탄조끼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어머. 여성용도 있네요?”

“네, 뭐.”

남자 요원이 침을 삼켰다.

“모델이 누군지 몰라도 몸매가 장난 아닙니다.”

그 방탄조끼는 신은하를 위해 만들었다.

“그 마네킹이 모델입니다. 테스트하려고 만든 거라서.”

남자 요원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역시 현실에서 이 몸매는 말이 안 되죠.”

나강인이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AI 전지인도 불평했다.

- 상대가 신은하의 몸매를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과대는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평가하는 거지.”

나강인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남자 요원이 대답했다.

“방탄조끼 두 벌을 맞춤 의뢰합니다. 우리가 입을 거라서 직접 방문했습니다.”

“정부 주문 물량이 열 벌이나 있는데 따로 두 벌이라. 그것도 기록을 남기지 않고….”

나강인이 두 사람을 슬쩍 훑어보았다.

‘정보기관 소속인가?’

소속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정식 납품한 열 벌을 정부가 정보기관에 넘겨도 나강인이 간섭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찾아온 사람들이 국가 정보기관 소속이란 증거는 아직 없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래서 소속이?”

“김 과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여기는 이 과장이고요.”

“소속을 물었습니다만?”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럼 그냥 돌아가시죠.”

“예?”

“아무나 와서 주문한다고 다 만들어줬더니 그걸 입고 은행이라도 털면 어쩌라고.”

남자 요원이 목소리를 깔았다.

“우리가 어디서 나온 줄 알고 이러는 겁니까? 그러다 크게 후회합니다.”

“오호라. 국가 권력으로 날 핍박하겠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신분을 밝혀야 할 텐데?”

남자 요원이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몇 번 보여주며 말했다.

“비공식 의뢰라고 했습니다만?”

“진짜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는 꼴을 보면 멀쩡한 기관은 아닌 것 같은데.”

“이봐요! 나강인 씨! 당신 그러다 다칩니다!”

여자 요원이 남자 요원의 팔을 당겼다.

“그만해. 너 지금 오버하고 있어.”

“지금 저 사람 태도를 좀 봐! 국가를 위해서 일할 기회를 줬는데 저러잖아!”

“그만하라고.”

나강인이 손을 바깥쪽으로 흔들었다.

“됐으니까 가라. 진짜 국가기관 소속이면 주문은 철인기공에 넣어. 거기서 알아서 만들어주면 알아서 나눠 가져라.”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꺼지라고.”

나강인이 두 사람을 쫓아냈다. 그런 후에 툴툴댔다.

“별 거지 같은 게 다 시비야. 소금이라도 뿌릴까 보다.”

- 사기꾼일 수 있습니다. 붙잡아서 경찰에 넘기십시오.

“국가기관 소속은 맞을 거야. 그러니까 여길 정확히 찾아왔지. 민간인 중에 이곳 위치를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잖아.”

- 그럼 왜 굳이 저 두 사람의 소속을 알려고 하신 겁니까?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 그건 그렇습니다. 잘하셨습니다.

***

소속 기관으로 복귀한 후에 여자 요원이 짜증을 냈다.

“창피해서 혼났잖아. 넌 거기서 왜 싸우려고 드는데?”

남자 요원은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손님한테 기분 나쁘게 하잖아. 그리고 우리가 그냥 손님이야? 대한민국 최고의….”

그들의 대화에 과장이 끼어들었다.

“야.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과, 과장님.”

그들이 나강인에게 과장이라고 소개한 건 직급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소속된 부서의 진짜 과장이 물었다.

“너희들 지금 드래곤 플레이트 제작을 위해서 신체 사이즈 측정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왜 여기 있어?”

“그, 그게….”

과장이 상황을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퇴짜 맞았어? 이야아. 요즘 신입들은 대단하네. 무슨 대단한 작전을 하란 것도 아니고, 사제 방탄조끼 한 벌씩 사는 걸 실패하네?”

두 사람이 훈련받은 기간은 일 년쯤 되지만, 요원이 된 지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아직 정규요원이 아니라 수습요원이다.

남자 수습요원이 변명했다.

“나강인이 우리를 은행강도 취급해서….”

“얼마나 덜 떨어졌으면 물건 사러 가서 그런 취급을 받냐?”

“그래서 따지다가….”

과장이 멈칫했다. 조금 전에 수습요원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어? 따져? 설마 싸운 건 아니지?”

남자 수습요원이 당당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임무 수행 중에는 민간인을 때리지 않습니다.”

과장이 여자 수습요원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봐. 싸웠어?”

“아닙니다. 싸우기 전에 잘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주문은 했고?”

“했는데 저쪽에서 거절했습니다.”

과장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괜히 거절했겠냐? 혹시 쟤가 싸우려는 걸 네가 말렸냐?”

“예. 그렇습니다.”

강남 7층 건물에서 자칼 일당을 때려잡은 사람이 누군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바다 위 선상파티에서 낙귀 해적단을 잡은 사람에 관한 정보도 비공개로 처리됐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사람이 철인기공의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팀장이라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더 적었다.

그런데 과장은 그 두 사건의 합동수사본부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나강인이 어떻게 용병단과 해적단을 잡았는지 안다.

그가 신입 수습요원 두 명을 보낸 건, 드래곤 플레이트를 테스트할 때 몸으로 구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직 아는 게 없는 신입은 그런 용도로 막 굴리기 딱 좋았다.

그런데 그 신입이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왔다.

과장이 얼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미치겠네. 이 하룻강아지 새끼가 죽다 살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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