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드라마 액션 II
SAH 엔터 박우섭 실장은 신은하의 매니저다. 그는 신은하 외에도 연예인 두 명을 더 관리하고 있다.
박우섭이 신은하의 전화를 받았다.
“어. 은하야.”
- 박 실장 오빠. 요즘 시간 많지?
“네가 노니까 시간이 좀 생겼지. 왜? 다시 활동하게? 난 좀 바빠도 되니까 그럴까? 대본 들어온 거 갖다 줘?”
- 아니. 강인 오빠 일 하나만 더 처리해줘.
“응? 이번엔 무슨 일인데?”
- 강인 오빠가 드라마 무술감독으로 잠깐 일하기로 했어. 많이는 아니고 딱 하루, 한 회만 나가. 관련 절차 좀 처리해줘.
“그래? 어, 그러면 말이야.”
박우섭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강인 씨가 그냥 우리 회사랑 계약하면 지원 빵빵하게 해줄 텐데.”
- 이거 왜 이러셔? 내 계약도 반년밖에 안 남았는데 어딜.
“야. 너도 재계약해야지. 너 이번에 확실히 떴잖아.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할 수 있어.”
- 사장님이 너무 가수 라인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내가 요즘 생각이 많네?
“어…. 우리 사장님이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
- 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
“해줘야지. 네가 강인 씨에게 신세 진 게 많은데 내가 그 정도 못 해주겠냐?”
- 오케이. KMTV 최진욱 피디야. 연락처 알지?
“알지. 당연….”
박우섭은 최진욱이 어떤 드라마를 찍는지 안다.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다.
“어? 그럼 그 드라마가 ‘푸른 하늘’이야? 취준생들의 애환과 러브스토리를 담은 청춘드라마에 고급 액션이 왜 들어가?”
- 최 피디님이 강인 오빠만 믿고 넣는다던데?
***
나강인이 금요일에 마포구에 있는 난지 한강공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선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최진욱 피디와 도주희 작가가 나강인을 만났다.
최진욱이 설명했다.
“대본을 보내드릴 때 콘셉트도 이야기했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현장에 오셨으니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 한강 공원에서 이보라 씨가 가방을 날치기당하는 장면을 찍을 건데요. 그 가방에 디자인 공모전 작품이 들어있습니다.”
이보라는 여자 주인공의 친구 역할로 출연한다. 비중은 주인공 다음으로 비중이 큰 조연이다.
도주희도 설명을 보탰다.
“그 공모전에서 우승해야 지금까지 고생만 하던 이보라가 드디어 빛을 보게 돼요. 그러니까 그 작품을 날치기당하면 이보라는 망하는 거죠. 날치기하라고 시킨 건 경쟁자 쪽이고요.”
“나강인 씨의 역할은 한강 공원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그 날치기를 잡은 후에 쿨하게 사라져야죠.”
“그런데 그 도와준 사람이 사실은 이보라와 평소에 자주 부딪히는 남자예요. 그 남자는 이보라를 알아봤지만, 이보라는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고글까지 낀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거죠. 당연히 나중에 다 알게 됩니다.”
“나강인 씨는 마스크를 쓴 채로 여기서 화려하게 날치기를 잡아주셔야 합니다. 나중에 우리 배우가 다른 장소에서 마스크를 슬쩍 내리는 장면을 따로 찍을 겁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제가 할 일은 간단하군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날치기를 잡고 떠난다. 끝.”
드라마 작가 도주희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최 피디님이 하도 졸라서 찍기는 하는데, 영상을 사용할지는 아직 결정된 게 아니에요. 전 아직도 우리 드라마에 이런 화려한 액션이 필요한지 의문이….”
신은하가 쓱 다가왔다.
“어머. 피디님. 작가님. 안녕하세요?”
최진욱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 신은하 씨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녀가 방긋 웃었다.
“일일 매니저로 따라왔어요.”
“이야아. 박 실장님도 조건 깐깐하게 따지더니 은하 씨까지 나섰어? 나강인 씨는 SAH 소속도 아니라면서?”
“우리가 강인 오빠한테 신세 진 게 좀 많아요. 이렇게 하나씩 갚는 거예요.”
“진짜 그게 다야?”
신은하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흐흥.”
도주희가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잠깐만요. 신은하 씨?”
“안녕하세요. 도주희 작가님.”
“은하 씨가 여길 왜 와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도 아닌데….”
“저 오늘 여기서 카메오 정도는 출연해도 되는데요.”
“진짜요? 그럼 우리야 좋죠! 최 피디. 좋지? 그치?”
“아니, 김 작가. 그러면 나야… 사랑합니다. 배우님.”
신은하가 카메오로 출연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강인 오빠 씬이 안 잘려나가지.’
그녀는 나강인의 상대역인 여자 조연과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대본은 도주희가 현장에서 썼다.
난지 한강공원 한쪽이 통제됐다. 공원이 워낙 넓고 평일 낮에는 사람이 적어서 촬영장소를 확보하는 건 쉬웠다.
조금 늦게 도착한 여자 배우 이보라가 신은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머. 은하야. 여긴 어쩐 일이야?”
“응원하러.”
“응? 나를?”
“설마.”
“그니까.”
이보라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앗. 잠깐. 카메오로 나오는 윤미가 혹시 너야?”
“벌써 수정 대본 봤구나?”
“오는 길에 차에서 톡으로 받았어. 너 말이야. 이런 건 미리 좀 진행하지?”
“나도 여기 와서 출연이 결정된 거거든? 불만이면 피디님한테 따지든가.”
“피디님한테 인사해야겠다.”
이보라가 최진욱에게 다가갔다. 최진욱은 나강인과 액션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 피디님.”
“보라 씨. 시간을 딱 맞춰 왔네?”
“오늘은 안 늦었어요.”
“그래. 안 늦은 게 어디야.”
“그런데 이 분은 누구세요?”
“오늘 액션을 맡아주실 나강인 씨.”
“아. 스턴트맨이시….”
이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나강인 씨요? 혹시 햇살 좋은 날 무술감독님이신 나강인 씨요?”
“보라 씨도 아나 봐?”
“그럼요! 저 그 영화 보고 진짜 감동했잖아요. 특히 그 액션에 반해서 누가 하셨는지 알아봤는데….”
매니저를 졸라서 알아봤지만 나오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이름이 나강인이라는 것과, 요리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만 겨우 들었다. 그나마도 그녀가 연예계에 있으니까 들을 수 있는 정보였다.
이보라가 나강인을 향해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이름 이보라. 이 드라마의 중요 조연입니다. 대표작은 영화 ‘돈가방’인데, 정작 본인은 신인 시절 찍은 ‘천년의 사랑’을 제일 좋아합니다.
“천년의 사랑?”
이보라가 두 손을 맞잡았다.
“어머! 천년의 사랑을 보셨구나!”
- 그 영화에서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한동네 여자 동생 역할을 맡았습니다. 출연 비중은 적지만 그때의 그 애틋한 연기가 꽤 호평을 받았습니다.
“애틋한 연기?”
“와. 대박. 진짜 내 팬이신가보다. 저도 나 감독님 팬이에요!”
“어….”
신은하가 쓱 다가왔다.
“네가 강인 오빠를 어떻게 알고 팬이래?”
이보라가 즉시 아는 걸 읊었다.
“이름 나강인. 영화 촬영장에 밥차 몰고 왔다가 무술감독이 된 분. 무술 대박, 요리도 대박. 나도 그 유명한 디저트 먹어보고 싶다.”
“스토커세요?”
“팬이라고! 그리고 이 정도는 액션에 관심 있는 배우나 감독 중에 아는 사람 많아!”
최진욱 피디가 손뼉을 쳐 주의를 끌며 말했다.
“자자. 올 사람 다 왔으니까 시작합시다!”
촬영이 시작됐다.
이보라는 취업준비생이다.
그녀는 어깨에 기다란 원통을 매고 있었다. 그 통에는 공모전에 제출할 디자인 원본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이 원본을 제출하기 전에 이곳에서 넓은 한강을 보며 에너지를 얻고 싶어 했다.
그녀가 두 팔을 쫙 펼치며 말했다.
“아. 좋다.”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한강을 볼 만큼 봤으니 이제 도전하러 가야 할 때다.
갑자기 그녀를 향해 자전거가 달려왔다.
한강에는 원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뒤로 좀 물러났다.
그런데 달려오던 자전거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꺄악!”
자전거 날치기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어깨에 걸려 있던 공모전 그림이 들어있는 원통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디자인 원본이 날치기의 손에 넘어갔다.
이보라는 깜짝 놀랐다.
“어? 안돼! 야! 서라!”
사람이 자전거를 쫓아가는 건 어렵다. 지금처럼 하이힐을 신고 있으면 더 어렵다. 그래도 그녀는 뛰었다.
갑자기 날치기의 자전거의 맞은편에서 새로운 자전거가 그들 쪽으로 질주했다. 나강인이 탄 자전거였다.
그대로 달리면 두 자전거는 충돌한다. 당황한 날치기가 방향을 틀었다. 자전거가 도로에서 벗어나 공원으로 뛰어들었다.
나강인이 날치기의 자전거를 추격했다.
날치기는 이보라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도망쳤다. 하지만 나강인이 탄 자전거가 훨씬 더 빨라서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날치기 역할을 맡은 배우도 자전거를 꽤 잘 탔다. 그가 피디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 공터를 벗어나지만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카메라로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배우가 아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난 도망만 열심히 치면 나머지는 저 사람이 다 알아서 한다고?’
딱히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배우는 진짜 열심히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어디 쫓아올 수 있으면 쫓아와 보라고!’
앞쪽에 소품으로 갖다놓은 캠핑용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보였다. 그 옆에는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저거다!’
그는 자전거를 두 물건 사이의 좁은 통로로 통과시키며 왼손을 옆으로 쓱 뻗었다. 손에 등받이가 높은 캠핑 의자가 툭 닿았다.
날치기의 자전거가 그곳을 지나가자마자 의자가 넘어졌다. 좁은 통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치기 배우가 뒤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어디 쫓아올 수 있으면 쫓아와 보….’
나강인이 자전거를 탄 채로 점프했다. 단번에 자전거 뒷바퀴가 탁자 위로 올라갔다. 앞바퀴는 번쩍 들려 있었다.
그 정도는 자전거 묘기를 하는 사람이면 할 수 있다. 그런데 나강인은 그 탁자 위에서 한 번 더 점프했다. 캠핑용 탁자가 그 반동으로 부서졌다.
나강인의 자전거가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대로 날아가면 배우를 덮칠 수도 있었다.
자전거를 탄 채로 뒤를 돌아본 배우는 겁을 덜컥 먹었다.
“어? 어어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앞으로 바짝 낮추며 왼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자전거를 옆으로 던진 후에, 날치기 배우의 옆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가 던진 자전거는 반대쪽으로 날아가다 타이어부터 땅에 떨어졌다. 떨어진 후에도 넘어지지 않고 혼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굴러갔다.
나강인이 날치기의 어깨에 걸려 있는 원통을 도로 가져갔다.
날치기 배우는 이미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겁에 질렸다.
혼자 커다란 원을 그리며 굴러가던 자전거가 나강인이 서 있는 곳까지 굴러왔다. 나강인이 왼손으로 자전거를 잡아 세웠다.
날치기 배우는 이제 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이 살짝 놓였다. 동시에 그가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지금은 드라마 촬영 중이다.
‘저항?’
그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강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연기이기 때문에 빠르게 날린 건 아니지만, 주먹의 방향은 정확히 얼굴을 향했다.
나강인은 자전거에서 손을 놓고 적의 손목을 잡은 후에, 다리를 걸며 가볍게 당겼다.
날치가 배우가 그대로 딸려왔다가 잔디밭에 나동그라졌다.
배우는 땅바닥을 구르는 순간 결심했다.
‘난 할 만큼 했어! 이제 기절한 척하자!’
나강인과 더 싸우는 건 겁이 나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 배우는 얼른 기절한 척 눈을 감았다.
자전거는 그때까지도 넘어지지 않고 혼자 서 있었다. 나강인이 자전거에 다시 손을 댄 후에 가볍게 올라탔다. 그런 후에 자전거를 타고 이보라에게 갔다.
이보라는 놀란 얼굴로 나강인을 보고 있었다. 대본에도 그런 표정을 지으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놀라서 표정 연기가 정말 실감 나게 나왔다.
나강인이 공모전 작품이 든 원통을 이보라에게 툭 던졌다. 이보라가 얼른 두 손으로 원통을 받았다.
나강인은 쿨하게 그곳을 떠났다.
대본에는 이보라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외치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보라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애드립으로 튀어나왔다.
“와. 대박. 진짜 내 스타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