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몸풀기
드라마 피디 최진욱이 외쳤다.
“컷! 거기까지!”
이보라는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사를 실수했어요! 다시 할게요!”
최진욱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냐. 잘했어. 아주 잘 어울렸어. 표정에 진심이 묻어난 것처럼 연기해서 더 좋더라. 연기력 많이 좋아졌네. 하하하.”
혼날 줄 알았던 이보라는 당황했다.
“네? 그, 그래요?”
“난 원래 대사보다 이게 더 마음에 든다. 도 작가도 그렇지?”
도주희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 그럼. 괜찮아. 잘했어.”
이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나강인과 이보라의 촬영은 끝났다.
남자 조연배우가 나강인과 똑같은 옷을 입고 마스크를 벗는 장면은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찍어야 한다.
최진욱 피디가 박수를 쳤다.
“야. 진짜 모두 멋있었습니다. 그림도 진짜 잘 나왔어요.”
그가 도주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치? 도 작가. 만족하지?”
“음….”
“조금 전부터 왜 혼자 심각한데? 잘 찍었잖아. 이 촬영본 그대로 가자고.”
“그게 아니라….”
도주희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대본에 액션을 좀 더 넣을까?”
최진욱이 씩 웃었다.
“느낌 왔구나?”
도주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완전. 손태민 감독님이 왜 햇살 좋은 날의 장르를 바꿨는지 알 거 같아.”
“나도 오늘 직접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나강인 씨의 액션은 진짜 느낌이 강렬하지?”
“난 서 있는 곳으로 굴러오는 자전거를 느긋하게 잡았다가, 날치기가 덤빌 빌 때 잠깐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는 장면이 정말 좋더라. 사람이 아주 여유가 철철 넘치잖아.”
“흐흐. 대본 수정은 가능하겠어? 써놓은 거 꽤 많잖아.”
드라마 대본은 여유분이 좀 있긴 하지만 아직 완결까지 나오진 않았다.
“나도 좀 알아봤는데, 손태민 감독님은 밤에 잠도 안 자고 시나리오를 수정하셨다더라? 그분이 그 촉박한 상황에서도 그러셨는데 내가 자존심 세울 건 아니지 싶어.”
“도 작가. 우린 드라마라서 시간이 더 많으니까 밤은 안 새도 돼. 햇살 좋은 날은 배우가 영화 개봉 직전에 마약파티 사건으로 체포된 특수한 상황이었잖아.”
“알아. 그리고 아직 나오지도 않은 후반부 대본이야 어차피 새로 쓰는 거니까 괜찮아.”
최진욱 피디는 당황했다.
“어? 도 작가. 줄거리는 다 써놓은 거 아녔어?”
“어? 어…. 그, 그래. 줄거리만 고치고 새로 쓴다는 말이었어.”
“와. 도 작가 되게 수상한데?”
“그냥 다 써 놨다고 믿어. 그래야 최 피디가 스트레스 덜 받을 거야.”
조연배우 이보라는 나강인의 액션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게 많았다. 그중에서 제일 큰 깨달음은 신은하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였다.
‘은하가 그 영화로 뜬 건 나강인 씨의 액션 덕이 진짜 컸지.’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
‘저런 고품격 액션이 저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어. 그 영화를 은하가 아니라 내가 했어도 떴을 거야.’
그녀가 피디와 작가를 슬쩍 보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흥분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은근히 기대했다.
‘혹시 우리 드라마도 햇살 좋은 날처럼 방향전환을 하나?’
그럼 누가 혜택을 볼까 생각해 보았다.
햇살 좋은 날은 여자 주인공의 촬영본을 다시 찍을 시간이 없었다. 스케줄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남자 주인공 김유찬과 여자 조연 신은하가 나오는 부분에 나강인의 액션이 집중됐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여주인공과 남자 조연이 같이 나오는 장면이 많다. 남녀 주연과 조연 두 명, 그 네 명이 같이 움직이는 씬도 자주 찍는다. 그러면 액션의 효과도 다른 배우들에게 분산된다.
‘은하가 부럽다. 그때 아주 혼자서 로또를 맞았구나.’
부러워만 하면 바뀌는 건 없다.
나강인이 옷을 갈아입고 왔다.
이보라가 나강인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저기요. 나 무술감독님.”
“감독이라고 부르시면 어색합니다. 저기 피디님도 계신데.”
“그럼 앞으로 강인 씨라고 부를게요.”
그녀가 휴대폰을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액션 연기를 도움받고 싶을 때 연락해도 되죠? 여기 전화번호 좀….”
갑자기 하얀 손이 끼어들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신은하였다.
신은하가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 이게 무슨 짓이지?”
“아, 왜!”
“내 앞에서 이러는 건 상도덕이 아니지!”
이보라가 둘러댔다.
“뭐, 뭐! 그냥 액션 연기 연습 좀 도와달라고 한 건데! 우리 드라마에 나강인 표 액션이 이번 한 번으로 안 끝날 거 같아서!”
“이제 그런 거 안 나와! 강인 오빠는 이번 한 번으로 끝이야!”
최진욱 피디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이제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싸우는 사이 나쁜 친구 역할을 찍어야 하는데, 벌써 감정 잡는 겁니까?”
신은하가 고개를 휙 돌리며 제안했다.
“그 씬 아주 실감 나게 찍고 싶은데요. 피디님. 그냥 머리채도 잡게 해주시죠?”
이보라는 한술 더 떴다.
“따귀도 때릴까? 짝 소리 나게!”
“좋지! 따귀 받고 업어치기 추가!”
최진욱 피디는 두 사람이 진짜로 싸운다는 걸 깨닫고 얼른 설명했다.
“한강을 배경으로 말싸움만 할 겁니다! 따귀도 없고 업어치기도 없어요! 서로 손끝도 터치하기 없기!”
이보라는 신은하의 견제 때문에 나강인의 번호를 따지 못했다.
신은하와 이보라는 말만 요란했지 촬영에 들어간 후에는 머리채도 잡지 않았고 따귀도 때리지 않았다.
대신에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날 촬영은 큰 탈 없이 끝났다.
드라마 작가 도주희가 푸념했다.
“괜히 신은하 씨를 카메오로 넣었나? 촬영하다가 둘이 진짜 머리채 잡는 줄 알았어.”
최진욱 피디는 실실 웃었다.
“그래서 긴장감 있게 영상 진짜 잘 나왔지. 도 작가. 은하 씨를 카메오 한 번으로 끝내는 건 너무 아쉽지 않아?”
도주희도 씩 웃었다.
“그치? 우리 드라마에 매운 고춧가루를 살살 뿌린 느낌이었지?”
“설득은 내가 할 테니까 다음에도 씬 한두 개 추가 콜?”
“콜!”
“하는 김에 나강인 씨도?”
“어디서 감히 우리 강인 님을 덤 취급이야?”
“와. 처음엔 반대하더니 촬영 한 번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태도가 확확 바뀌나? 손바닥이세요?”
***
나강인은 이튿날 경호관 최남수와 그가 데려온 사람 네 명을 만났다. 목적은 총권도의 기초 훈련이었다.
훈련 장소로는 최남수의 친구가 하는 체육관을 빌렸다. 그 체육관은 나강인이 사는 동네에 있었다. 최남수는 일부러 그 체육관을 잡았다.
총권도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간단히 했다. 그렇다고 모두 소속을 밝힌 건 아니다.
“김 과장입니다.”
정보기관 요원은 그렇게 이름도 직책도 적당히 둘러댔다.
나강인도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잠시 후에 웅성거렸다. 나강인의 일행 두 명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은하?”
“와. 실물로 보니까 미모가 아주 미쳤는데?”
“그런데 옆에는 누구야? 무수리야?”
무수리 윤아름이 신은하에게 물었다.
“언니. 그러니까 저분들이 전부 다 진짜 경호원이라는 거죠?”
“그렇대. 그것도 정부기관 요원이래.”
“그런 사람들이 강인 오빠한테 무술을 배우는 거죠?”
“그렇지? 강인 오빠 실력이 장난 아니잖아.”
“외줄타기는 확실히 잘하던데…. 그래도 저쪽은 국가기관 소속 경호원들이잖아요.”
윤아름이 나강인의 실력을 직접 본 건 건물 사이에 줄을 걸고 그녀를 구했을 때뿐이다.
강원도 세트장 납치 사건은 영상으로 보긴 했는데, 그건 화질이 나빴다.
신은하는 다르다. 그녀는 두 번이나 총격전에 휘말렸다. 그때마다 나강인이 싸우는 모습을 곁에서 보았다. 그녀가 아는 나강인의 실력은 윤아름이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너도 보면 알 거야. 왜 저 사람들이 배우러 왔는지 말이야.”
나강인이 정부 소속 요원 다섯 명에게 말했다.
“총권도를 제대로 배우려면 태백산맥에서 2년쯤 살아야 하니까 공무원 신분인 여러분에게는 무리입니다. 제가 다시 산에 들어갈 생각도 없고요.”
총권도라는 무술은 없다. 예전에 형사가 사연을 캐물을 때 그냥 둘러대려고 지어낸 이름이다.
그런데 그때 한 이야기가 정식으로 보고서에 적혀 위로 올라갔다. 그 정보는 다시 각 기관의 담당자에게 전해졌다.
이제 정부기관에는 대외비인 나강인의 이름보다 총권도를 아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나강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무술이야 다들 잘할 테니까, 오늘은 총권도의 기초 동작 몇 개만 배워봅시다.”
경찰 소속 요원이 손을 들었다.
“근접 사격술도 배웁니까?”
그 요원은 나강인의 전투 기록을 읽어보았다. 그래서 그가 근거리 전투에서 권총을 얼마나 잘 쏘는지 안다.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영상으로 남아있는 건 없지만, 목격자의 말과 현장의 흔적을 모으면 자칼 사건이나 낙귀 사건을 어느 정도는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차를 쓰면서까지 이 자리에 나왔다. 그들이 읽거나 들은 전투 기록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건 오늘 하는 거 봐서요. 물론 근접 사격술 훈련은 비비탄 권총으로 할 겁니다.”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여기 모인 다섯 명 중 네 명은 개인 권총이 소속 기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단 보호장비부터 착용하시죠.”
다섯 요원은 태권도용 헬멧과 몸통 보호구를 익숙한 동작으로 착용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럼 시작합시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훈련 프로그램 ‘올빼미는 굴려야 한다.’를 시작합니다.
나강인이 손을 까닥였다.
“일단 덤벼요. 바닥에 좀 굴러봐야 적응이 빠릅니다.”
경호관 최남수가 물었다.
“누가 먼저 들어갈까요?”
“다섯 분 다 오세요.”
“예?”
“들어오시라니까?”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했다. 다섯 명이 서로 눈짓을 한 후에 동시에 나강인에게 달려들었다.
나강인이 뒤로 슬쩍 빠졌다가 다시 옆으로 빠졌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상대 진형의 측면으로 진입해 한 명을 집어 던졌다.
“헉!”
그런 후에는 상대가 반응하기도 전에 다른 요원의 뒤로 이동했다. 뒤를 잡힌 요원도 날아갔다.
이제 상대는 셋만 남았다. 그 셋은 당황하지 않고 나강인을 세 방향에서 포위하려 했다.
나강인이 더 빨랐다. 그는 상대가 포위하기도 전에 먼저 달려들어 한 명씩 다리를 걸며 툭툭 던졌다. 상대가 버티려고 하면 압도적인 힘으로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바닥을 굴렀다.
다들 태권도용 보호복과 헬멧을 입고 있는 데다가 낙법도 할 줄 알았다. 게다가 바닥에는 훈련용 매트가 깔려 있어서 충격은 크지 않았다.
그들이 당황한 얼굴로 일어나자 나강인이 말했다.
“이제 타격기도 경험해봅시다. 들어오시죠.”
다섯 명은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들이 일제히 나강인을 향해 돌진했다.
나강인의 대응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상대를 던지지 않았다.
대신에 발로 걷어찼다.
“케엑!”
보호구에 맞았는데도 충격이 확 들어왔다.
그때부터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요원이 덤비면 나강인이 날려버렸다.
요원들은 다치지는 않았지만, 나강인이 걷어차면 날아가고, 집어 던져도 날아갔다.
나강인이 요원들을 날려버리면서 물었다.
“이게 여러분의 최선입니까?”
“아닙니다!”
다들 체력 하나는 좋았다. 요원들은 날아가면 다시 달려오고 자빠지면 벌떡 일어났다.
윤아름이 손을 움찔거렸다.
“와. 이거 찍어서 너튜브에 올리면 대박인데.”
신은하가 말렸다.
“저분들 다 정부 요원이라잖아. 그런 거 올리면 널 체포할지도 몰라.”
“웅….”
윤아름이 잠시 고민하다 손뼉을 쳤다.
“아! 강인 오빠의 호신술 교육 영상을 만들어서 올리는 건 어때요? 대박 날 거 같지 않아요?”
“얼굴 나오는 거 안 좋아할 텐데?”
“가면 쓰면 되죠. 너튜브에는 가면 쓰고 콘텐츠 만드는 사람 많아요.”
신은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도 그럼 가면 쓰고 같이 나갈까?”
윤아름이 말렸다.
“언니는… 아무리 가면 써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까요? 연예인인데.”
“그치?”
첫 훈련은 약 20분간 진행됐다. 3분 굴리고 1분 쉬는 방식이었다.
다섯 명은 결국 바닥에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했다.
나강인은 멀쩡히 서 있었다.
경찰 요원이 숨을 헉헉거리며 물었다.
“이런 실력으로 왜… 격투기 선수가 안 된 겁니까?”
군 특수부대 요원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우리 다섯 명이 한 명을 동시에 공격하면 격투기 세계 챔피언도 묵사발을 만들 텐데, 이건 진짜….”
나강인은 공식 대회에는 나갈 수가 없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예선은 도핑 테스트를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런 대회는 관심이 없어서요. 자. 몸은 충분히 풀었으니까 이제 기초 훈련을 시작합시다.”
“예? 지금까지 한 게 훈련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총권도가 어떤 무술인지 몸으로 체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튜토리얼 같은 거죠.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