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오세나
나강인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119에 신고는 한 거지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냈다.
출혈이 멎어 여유가 좀 생긴 손태민 감독이 그걸 보고 버럭 성질을 냈다.
“아니, 이 사람들이! 119에 신고부터 했어야지! 내가 피가 이렇게 많이 났는데!”
김유찬이 투덜댔다.
“감독님이 드론을 술잔으로 격추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태는 안 생겼다고요. 어우. 난 어디 다친 데 없나? 없네. 내가 잘 엎드려서 안 다쳤어. 사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여자 주연배우 오세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감독님! 감독님 때문에 나강인 씨 손 다친 거 안 보이세요?”
손태민은 당황했다.
“어? 어? 강인 씨도 다쳤어?”
“손에 붕대 감은 거 보세요! 날아오는 칼을 맨손으로 잡았다고요!”
“아니, 칼을 왜 손으로….”
“그거야!”
신은하를 보호하면서 오세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가 칼날을 잡지 않았으면 오세나는 죽었다.
오세나가 이제야 그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 칼을 잡아주지 않았으면, 난 죽었나?’
설사 운이 좋아 죽지 않는다 해도, 여자 배우가 얼굴에 칼을 깊게 맞으면 배우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 오세나에게는 그 두 가지가 큰 차이가 없다.
그녀가 갑자기 덜덜 떨었다.
“나, 나 진짜 죽을 뻔….”
나강인이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에요. 분명히….”
“그냥 헤프닝이죠.”
신은하가 옆에서 말했다.
“맞아. 언니. 난 뭐 무너지는 세트장에서도 빠져나오고, 총탄이 빗발치는 곳에도 있어 봤는데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요.”
“그, 그래?”
신은하가 나강인의 팔짱을 슬쩍 꼈다.
“악몽은 좀 꿀 수 있지만, 난 해결법을 찾았으니까.”
***
파파라치가 친구를 다그쳤다.
“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옥상에서 뭐가 폭발한 거야? 드론으로 찍었지? 이야아. 이제 박 기자가 문제가 아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의 축하 파티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요즘 핫한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영상이 우리 손에 있잖아. 그것도 고화질로. 이 영상 진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 드디어 나한테도 행운이란 게 오는구나!”
친구가 손을 덜덜 떨었다.
“드, 드론이….”
“뭐야? 너 왜 이래? 너 이 새끼. 설마 못 찍은 거 아니지?”
“드, 드론이 추락했어. 저거 아무래도 우리 드론 때문에 뭔가 폭발한 것 같은데….”
“뭐? 야. 그럼 내 영상은! 내 사진은!”
“지금 사진이 문제야? 저 폭발이 우리 드론 때문이면, 우린 체포될 수도 있어!”
파파라치가 현실을 깨닫고 당황한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어? 어…. 난 아니지. 드론은 네가 날렸잖아.”
“뭐? 이 새끼가!”
파파라치가 뒤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일단 튀자. 여기 있다가 잡히면 넌 교도소 갈지도 몰라.”
“잡히면 나 혼자 들어가겠냐! 시킨 건 너니까 같이 들어가야지. 이 새끼야!”
***
건물 밖에는 기자들이 몰려있었다. 그런데 옥상에서 뭔가 폭발하고 비명도 들렸다.
기자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전 합의를 무시하고 건물 현관으로 돌진했다.
“좀 들어갑시다!”
“사진만 찍을게요!”
“내가 누군지 알아? 펜대 무서운 거 보여줘? 어? 비켜!”
오늘 파티에 참석한 배우의 매니저들은 다른 층에서 따로 파티를 즐겼다. THO 엔터 직원 중 일부도 따로 모여서 놀았다.
그 사람들이 모두 튀어나와 입구를 틀어막았다. 처음에 건물 안으로 진입했던 기자들도 매니저들에 의해 도로 밀려났다.
매니저들이 소리를 질렀다.
“막아!”
“누가 사고를 쳤는지도 모르는데 기자들을 들여보낼 수는 없어!”
매니저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배우가 이 사고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기자들을 막았다.
잠시 후에 119구급차가 그곳에 도착했다. 근처 지구대의 경찰차도 거의 동시에 왔다.
구급대원들이 기자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비켜주세요! 환자가 있습니다!”
환자라는 말에 기자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누가 다쳤습니까!”
“이름만 말해줘요! 이름만!”
기자들은 구급대원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매니저와 직원들은 구급대원만 들여보내고 기자들은 떼어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난장판이 벌어지는 도중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손태민이 조금 전에 올라간 구급대원들과 함께 걸어서 나왔다.
“어? 손태민 감독이다!”
“팔에 피 묻은 붕대 봐! 다쳤어!”
기자들이 아우성쳤다.
“손 감독님! 무슨 일입니까!”
“배우들과 싸움이 난 겁니까?”
“집단 패싸움입니까?”
“누가 이겼습니까!”
손태민이 걸음을 멈추고 기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싸운 게 아니라!”
기자들이 스마트폰 녹음기를 내밀었다.
손태민이 악을 썼다.
“어떤 놈이 우리가 천만 관객 기념 파티를 하는 곳에 드론을 날렸는데!”
그 드론을 손태민이 술잔으로 격추했다.
“그 드론이 옥상에 추락해서 폭발했습니다!”
“예? 그럼 폭탄 테러입니까?”
손태민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어…. 그건 나도 모르죠.”
“드론에 폭발물이 있었다면서요?”
“그건 아니고, 우리 폭죽이 있는 곳에 드론이 떨어져서 터진 건데 말이죠. 어쨌든!”
드론 슬레이어 손태민이 다시 외쳤다.
“그 드론 날린 놈을 잡아요! 그놈이 범인입니다!”
***
손태민은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으로 이동했다.
의사가 손태민의 상처를 치료한 후에 말했다.
“지혈을 빨리해서 다행입니다. 늦었으면 문제가 생길 뻔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현장에 의사가 있었나 봅니다. 진짜 잘 봉합했는데요?”
“어….”
손태민은 의사 면허가 없는 사람의 의료행위는 불법이라는 게 떠올랐다.
이 치료가 긴급상황에서 해도 되는 수준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설사 문제가 생긴다 해도 변호사와 여론의 도움을 받아 무마할 자신은 있었다.
그렇지만 괜히 일을 키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렇죠? 하, 하하.”
“어느 병원에 계신 선생님이 하셨습니까?”
“그건…. 아. 거긴 약이 없어서 이 병원에서 다시 제대로 치료받으라던데요. 주사도 좀 맞고요. 하, 하하.”
***
드론이 폭발하고 감독이 다쳤는데 파티를 더 할 수는 없다.
파티는 거기서 끝났다.
참석한 배우 중에는 난장판이 된 현장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에서 나강인과 싸우는 역할을 했던 젊은 남자 배우도 현장 사진을 찍어서 그의 SNS에 올렸다.
[오늘 우리 파티에서 드론이 날아와 폭발했습니다.]
#드론공습 #격추 #겨우살았음 #영화가끝나도사건은터진다
여자 주연배우 오세나도 사진을 올렸다.
[정말 위험했지만 덕분에 무사합니다.]
#나죽을뻔 #맴찢 #배꼽인사
팬들은 대부분 ‘덕분에’라는 말이 팬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맴찢은 팔을 다친 손태민 때문인 줄 알았고, 배꼽 인사는 팬에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오세나는 이튿날 예능 방송 ‘주사위’에 출연했다. 이 스케줄은 미리 잡혀 있었는데 방송국에서 빼주지를 않았다.
‘주사위’는 진행자와 출연 배우가 연예계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예능 방송이다. 그 방송에서는 누가 주도적으로 말할지를 수시로 주사위를 굴려서 정했다.
다른 게스트가 주사위를 굴려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오세나도 그렇게 했다.
그러다 진행자가 제일 높은 숫자를 굴렸다. 그러면 진행자는 게스트에게 원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방송의 책임자인 윤 피디는 전날 있었던 파티 사건 이야기를 꼭 방송에 넣고 싶었다. 그 이야기가 방송에 나오면 시청률이 올라갈 게 뻔해서다.
진행자가 그 이야기를 물었다.
오세나는 처음에는 파티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러다 이야기가 드론이 추락하고 폭죽이 폭발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오세나는 그때 일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왜 추락했는지는 모른다고 하면서 넘겼지만, 그 후의 일은 열심히 설명했다.
오세나가 손을 얼굴 앞에 세우며 말했다.
“그게 터지면서 제 쪽으로 칼날이 확 날아오는데, 글쎄 그걸 맨손으로 잡아주신 거예요.”
“예? 맨손으로요? 누가 말입니까?”
“우리 영화 무술감독님이요. 저희도 얼굴 보기 진짜 어려운 분인데, 천만 돌파 파티라서 참석하셨거든요.”
“잠시만요. 날아오는 칼날을 잡았는데 손이 괜찮습니까? 제가 듣기로 크게 다친 분은 손태민 감독님 한 분이셨는데요?”
“그분이 워낙 무술 고수라서 손바닥을 살짝 베이기만 하시고 칼날을 잡으시더라고요.”
“와우. 대단하시네요.”
게스트로 나온 남자 배우가 끼어들었다.
“그 무술감독님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실감 나는 액션을 연출하셨다면서요.”
“네. 맞아요.”
남자 배우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오세나 씨는 그 영화에서 그분의 도움을 받는 씬이 없었던 거 아녔습니까?”
오세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펴졌다.
“이번에는 저는 재촬영할 부분이 없었지만, 다음 영화에서는 같이 일할 수 있죠.”
“다음 영화요? 제가 듣기로 그분 본업이 무술감독이 아니라서 섭외가 굉장히 어렵다던데요.”
“어머. 잘 아시네요?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남자 배우가 웃었다.
“그분이 우리 드라마 ‘푸른 하늘’도 도와주셨거든요. 하하하.”
그 남자 배우는 푸른 하늘에서 이보라의 상대역을 맡은 중요 조연이다.
“그, 그래요?”
“우리 드라마의 자전거 추격 액션에서 그분이 제 대역을 하셨죠. 내일 촬영장에 또 오신다는데 모르셨구나. 안 친하신가 보다.”
“이제부터 친해지려고요.”
오세나가 조금 굳은 얼굴로 피디에게 말했다.
“윤 피디님. 편집하실 때 방금 저분이 저한테 질문한 부분부터 여기까지 다 빼주세요. 꼭이요.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게스트로 나온 배우는 즉시 사과했다.
그런데 윤 피디는 머뭇거렸다.
‘이걸 그대로 내보내면 시청자들이 참 좋아할 텐데.’
***
나강인이 드라마 ‘푸른 하늘’ 촬영장에 나타났다.
최진욱 피디가 인사 삼아 물었다.
“그저께 파티하다가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나강인은 왼손에 큼지막한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예. 뭐.”
최진욱이 걱정했다.
“손은 괜찮으십니까? 다치셨으면 오늘 촬영은….”
칼에 베인 상처는 이미 다 나았다.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상처가 낫는 걸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 아직 상처가 남은 것처럼 위장했다.
“살짝 베인 것뿐이라 오늘 일하는 데는 상관없습니다.”
신은하는 영화가 끝난 후부터 쭉 놀고 있다. CF나 간단한 행사는 괜찮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아직 생각이 없다.
그런 신은하가 이 드라마에 조금만 출연해달라는 작가와 피디의 제안은 받아들였다.
그녀의 분량은 이야기에 영향을 끼칠 만큼 많진 않았다. 그녀는 이보라와 싸우는 씬만 앞으로 몇 번 더 찍기로 했다.
그녀는 오늘도 그런 촬영이 있어서 이곳에 왔다. 그런데 여기 와서 오세나를 발견했다.
“언니가 왜 여기서 나와요?”
오세나가 웃었다.
“난 커피차 쏘려고 왔지. 그러는 넌?”
“난 강인 오빠 일일 매니저도 하고 카메오 출연도 하려고 왔어요. 그런데 커피차는 누구 응원하려고 쏘는데요?”
“나강인 무술감독님?”
신은하가 인상을 썼다.
“뭐죠? 이 상도덕 없는 짓은?”
오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생명의 은인한테 상도덕 따지는 건 너무했다.”
신은하는 그동안 다른 여자가 나강인의 옆에 얼씬거려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는 미모로 눌러버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세나가 참전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오세나는 연기력이 나쁘지 않은 배우지만, 주연을 맡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 건 연기력보다 아름다운 얼굴 지분이 더 컸다.
그런 오세나만 해도 거슬리는데 조연배우인 이보라까지 다가와 참전했다.
“어머. 은하 너 너무했다. 언니가 우리보다 나이도 더 많은데 설마 강인 오빠한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겠니?”
오세나의 고개가 이보라 쪽으로 휙 돌아갔다.
‘얘가 갑자기 나이를 따지네?’
그녀가 이보라를 째려보았다.
“너 누구 편이니?”
“저야 뭐, 강인 오빠 편?”
신은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보라야! 왜 자꾸 오빠라고 부르는데? 호칭 정리 확실히 하지? 너 지난번에 오빠라고 부르겠다고 했다가 대놓고 까였잖아!”
“에이. 너랑 나랑 동갑이고 우린 친구잖아? 너한테 오빠면 나한테도 오빠지.”
***
며칠 뒤에 그날 찍은 드라마 촬영분이 방영됐다. 드라마 중간에 나온 액션은 호평을 받았다.
인터넷 게시판에 그 이야기가 올라왔다.
- 와. 이 드라마 이제 아예 액션으로 가나?
- 취준생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아녔어?
- 애환은 아직도 잘 그리고 있지. 액션이 화려해서 그렇지 무슨 음모가 있는 건 아니잖아.
- 맞아. 엄청 멋지게 싸운 거 같은데, 다시 보면 편의점 의자 테이블 하나 남은 거에 누가 앉는지로 경쟁한 거잖아.
- 추격씬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면 서둘러서 달려가다가 부딪힐 뻔한 사람을 피한 거고.
- 그래도 이렇게 소소한 액션이 툭툭 튀어나오니까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
- 그러게. 이야기도 시원시원하게 바뀌었고.
- 근데 오늘도 신은하가 나왔잖아. 카메오 맞아? 이쯤 되면 조연 아냐?
- 오늘은 오세나도 나왔더라.
- 와아. 드라마 우정 출연 수준 좀 보소. 신은하에 오세나까지. 피디 섭외력 쩌네.
오세나는 그날 예정에 없던 카메오 출연을 현장에서 제안했다. 피디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작가는 현장에서 대본을 고쳤다.
- 잠깐. 오세나는 피디 때문에 카메오로 나온 게 아니지 않나? 무술감독이 섭외한 거 아냐?
- 그러네.
- 무슨 소리인지 나만 이해가 안 가나?
- 오늘 다른 방송국 예능프로 ‘주사위’에서 오세나가 이 드라마 무술감독하고 친해지고 싶다고 말한 거 나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