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86화 (86/411)

86. 주사위

영화 ‘햇살 좋은 날’의 여자 주연배우 오세나가, 예능 방송 ‘주사위’ 녹화에서 무술감독과 친해지려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녹화 당시에 그 부분을 삭제해달라고 윤 피디에게 요구했다.

그 방송의 책임자인 윤 피디는 고민하긴 했지만, 시청률 욕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그 부분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

‘오세나 씨가 무슨 위험한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기사는 좀 날지 몰라도,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일이 생겼다.

오세나는 드라마 ‘푸른 하늘’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방송된 날 예능 방송 ‘주사위’도 방송됐다. 오세나가 말한 무술감독이 ‘푸른 하늘’의 액션도 맡았다는 말도 그대로 나왔다.

두 방송을 다 본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댓글을 달았다.

- 와. 오세나 추진력 장난 아니네.

- 스캔들이 나도 상관없다는 건가?

- 제가 ‘주사위’를 먼저 보고 ‘푸른 하늘’을 봤습니다. 이 정도면 공개적으로 선언한 거 아닌가 싶더군요.

오세나의 소속사는 난리가 났다.

팬들은 옛날보다는 여배우의 연애에 관대하다.

하지만 오세나처럼 얼굴이 경쟁력인 배우는 열애설이 독이 될 순 있어도 이득이 되진 않는다.

매니저가 한숨을 쉬었다.

“세나야. 내가 자주 말했잖아. 연애를 안 하는 게 제일 좋지만, 하게 되면 제발 들키지만 말라고.”

오세나도 투덜댔다.

“내가 윤 피디한테 분명히 빼달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피디는 뭐래요?”

“전화 안 받아. 잠수 탔다.”

“와 씨.”

“이제 어떻게 해야겠냐?”

“여기서 끝내면 내가 먼저 덤비다가 차인 것 같잖아요. 나 오세나예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참아요?”

“그러면 어쩌게?”

오세나가 눈을 빛냈다.

“확 그냥 꼬셔버려야겠다.”

당황한 매니저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세나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실장님도 알죠? 지금까지 내가 꼬셔서 안 넘어온 남자가 없었다는 거.”

“그러니까 왜 결론이 그렇게 나냐고!”

***

신은하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세나는 천 년 묵은 거미 같은 여자야. 인면지주나 아라크네 같은 거. 남자를 유혹해서 거미줄에 걸어놓는 게 취미거든.”

배우 김유찬이 옆에서 약간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세나가 남자를 유혹하는 게 취미이긴 한데, 사귀는 경우는 잘 없잖아?”

신은하가 쌍심지를 켰다.

“유찬 오빠는 왜 또 끼어드는데! 그래서 잘했다는 거예요?”

김유찬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당연히 유혹만 하고 차버리는 게 더 잔인하지. 걔는 남자가 뭔가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하면 걷어차. 차인 쪽은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어?”

“하여간 악취미라니까.”

“맞아. 오세나는 좀 미친 거 같아.”

나강인이 물었다.

“그래서 너는 그 이야기를 하러 피시방에 온 거야?”

“뭐래. 그냥 밥 먹으러 왔다가 강인 오빠가 걱정돼서 해주는 이야기야. 진짜야.”

김유찬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진짜는 무슨.”

“유찬 오빠는 안 가요?”

“밥이 아직 남아서.”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말했다.

“넌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신은하의 표정이 확 펴졌다.

“그치? 이거 다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역시 철벽남!”

김유찬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이게 꼭 좋아할 일은 아닐 텐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모르면 됐다.”

오늘은 나강인이 피시방에서 밥을 파는 날이다. 그들은 피시방에 모여서 나강인의 요리를 즐겼다.

신은하는 이 피시방에 고정석이 있다. 한 달 요금을 미리 낸 상태라 다른 사람은 앉지 못한다. 요즘 자주 와서 피시방 삼인방은 그녀를 보는 게 익숙하다.

그런데 그들은 인기 배우 김유찬까지 피시방 직원 휴게실에서 밥을 먹을 줄은 몰랐다.

대학생 알바 윤아름이 말했다.

“이러다 우리 피시방이 연예인 사랑방으로 소문나는 거 아냐?”

사장 조카 차은서가 눈을 반짝였다.

“진짜? 우리 삼촌 부자 되겠네?”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나. 그런 소문이 나면 저 두 스타가 여기 오겠어요? 은하 누나도 지금은 아무도 못 알아보게 구석에 자리를 줬으니까 오는 거겠죠.”

차은서가 안성환의 팔을 때렸다.

“야. 너 왜 초를 치는데? 너 집에나 가. 일하라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안성환은 피시방이 바쁠 때만 오는 파트타임 알바다.

윤아름이 차은서의 옆에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래서 이과는 안된다니까. 데이터만 따지지 감성이 없어. 감성이.”

안성환이 항의했다.

“아름아. 너도 이과잖아.”

“아. 맞다.”

윤아름이 얼른 태도를 바꾸었다.

“은서 언니. 데이터를 분석해서 나온 결론이니까 믿으세요. 성환이가 그런 거 잘하잖아요.”

차은서가 따졌다.

“박쥐가 여기 있었네? 아름이 너도 야간 근무면서 왜 지금 여기 있는데!”

윤아름은 당당했다.

“밥이 여기 있으니까?”

“다들 나가! 혼자 있고 싶다.”

다 같이 밥을 먹다가 신은하의 소속사인 SAH 엔터 이야기가 나왔다.

신은하가 설명했다.

“우리 회사는 배우와 가수를 담당하는 부서가 달라. 보통은 담당 업무에 따라 가수 라인과 배우 라인이라고 불러.”

차은서가 물었다.

“그러면 서로 다른 라인 일은 전혀 몰라요?”

“아니. 대규모 공연처럼 바쁠 때는 가수 쪽에 배우 매니저가 투입될 때도 있고, 홍보팀 같은 지원부서는 양쪽을 다 관리해.”

SAH에 소속된 가수는 대부분 솔로다. 듀엣은 딱 한 팀이 있다.

그리고 아이돌 팀이 두 개 있다.

그 두 팀은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망한 건 아니라서 가끔 행사가 잡힌다.

신은하가 말했다.

“아이돌 팀 애들은 가수 라인이라고만 하기는 좀 애매해. 우리 배우 라인이 걔들을 영화나 드라마 단역으로 종종 꽂아주거든.”

“그럼 언니 보면 인사 잘하겠다.”

“당연하지. 걔들 되게 착해.”

“그럼 SAH 엔터에서는 배우가 잘나가요? 가수가 잘나가요?”

“잘나가는 건 비슷한데 말이야.”

신은하가 불평했다.

“사장님은 자꾸 가수 라인만 챙기셔. 자기가 가수 출신이다 그거지. 난 그게 불만이야.”

***

SAH는 중견 가수인 서재현이 차린 회사다.

그가 젊었을 때는 히트곡을 많이 발표했다. 요즘도 가끔 디지털 싱글 음반을 낸다. 다만 이제는 행사는 뛰지 않는다.

소속 가수 중에는 서재현이 옛날부터 친하게 지낸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배우는 대부분 업무로 만난 사이다.

그래서 서재현은 배우보다는 가수 라인을 더 챙겼다. 술도 가수들과 마실 때가 많았다.

서제현은 한 달 전에 작곡가 곽찬석과 곡 계약을 맺었다.

곽찬석은 노래를 만들기도 전에 파는 일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데, 서재현은 절친이라서 잘 조르면 가끔 곡을 사전에 계약해주곤 했다.

회의실에 서재현과 남자 가수 세 명이 모였다.

오늘은 곽찬석이 만든 노래 ‘오늘도 걷는다’를 누구에게 줄지 결정하는 날이다.

다른 때라면 회사에서 사들인 곡을 어느 가수에게 줄지는 회사가 결정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가수 회식 도중에 공개됐다가 그 자리에서 치열한 경쟁이 붙었다.

지금 회의실에 모인 세 명은 그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선 사람 중에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나머지는 신곡이 가수의 노래하는 스타일과 안 맞거나, 그 노래를 가이드 녹음보다 못 불러서 탈락했다.

이 세 명은 모두 그 노래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중에 최종 승자를 뽑는 날이다.

테이블 위에는 ‘오늘도 걷는다’의 악보와 보드게임용 주사위 두 개가 있었다.

서재현이 말했다.

“자.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나온 숫자를 더하고, 제일 높은 숫자를 굴린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는 거다. 다들 동의했지?”

세 사람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서재현이 운에 맡기는 이런 방법을 쓰는 건, 이 방법밖에 없어서다.

여기 모인 가수 세 명은 모두 노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차고 넘쳤다. 그런 가수들을 모아놓고 실력을 점수로 평가해 1등에게 곡을 주면, 다른 두 명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게다가 셋 다 납득할 정확한 평가 방법도 없다. 음정이나 박자의 정확도를 계산해서 점수로 환산하겠다고 하면 세 명 다 화를 낼 게 뻔했다.

서재현은 직원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나온 방법이 운에 맡기는 거였다.

주사위 숫자가 낮아서 탈락하면 적어도 가수의 자존심이 상할 일은 없다.

첫 번째 가수가 보드게임용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 두 개를 더하면 2부터 12까지 나올 수 있다.

“열둘 나와라!”

주사위가 탁자 위를 또르르 구르다 멈췄다. 3와 5.합이 8이 나왔다.

가수가 아쉬워했다.

“으…. 중간은 넘었는데….”

두 번째 가수가 실실 웃으며 주사위를 흔들었다.

“라스베이거스 황금손이라고 들어봤어? 그게 바로 나야. 중간도 못 넘으면 죽어야지.”

그가 익숙한 손동작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탁자 위로 주사위가 구르다 멈췄다. 1과 2.합이 3이 나왔다.

첫 번째 가수가 통쾌하게 웃었다.

“으하하! 라스베이거스 황금똥손이네! 으하하하!”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마지막 가수가 주사위를 흔들었다.

“9, 10, 11, 12중에 하나가 나오면 저 노래는 내 거지?”

“야. 포기해. 안 나와. 그리고 난 절반은 넘겼으니까 내가 너보다 유리해.”

마지막 가수가 주사위를 굴렸다.

하나는 금방 멈춰 6이 나왔다.

“아자!”

다른 주사위가 계속 굴러갔다.

그 가수가 다급히 외쳤다.

“삼사오륙!”

그중 하나만 나오면 그의 승리다. 2가 나와도 동점이니 다시 던질 수 있다.

“하나만 아니면 돼!”

문제가 생겼다.

주사위가 멈추지 않고 계속 구르다가 탁자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 가수가 재빨리 탁자 아래를 보았다. 탁자 밑으로 떨어진 주사위는 6이었다.

그 가수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육이다! 합이 열둘! 내가 이겼어! 이 노래는 이제 내 거야!”

갑자기 주사위 숫자의 합이 8이 나온 배우가 외쳤다.

“낙!”

“어?”

“주사위가 탁자에서 떨어졌잖아! 이건 낙이야!”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탁자 위에서만 굴려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거야 상식이지!”

“그런 상식도 있냐!”

3이 나온 가수도 참전했다.

“맞아. 형. 이건 낙이야!”

“넌 왜 쟤 편을 드는데! 넌 상관없잖아!”

“상관있어! 낙이니까 주사위를 처음부터 다 다시 던져야지!”

“이게 무슨 개소리야! 탁자 위에 육! 탁자 아래에 육! 난 열둘이 나왔다고! 내가 압도적인 일등이야!”

첫 번째 가수가 다시 외쳤다.

“낙!”

“그래! 낙!”

“야! 낙 같은 거 없다고!”

점점 개판이 되는 상황을 보며 서재현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와. 뭐 이런…. 주사위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일이 왜 또 이렇게 되냐?”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기도 이미 문제가 많은데 또 무슨 문제?”

직원이 회의실 탁자 위의 악보를 가리켰다.

“그 노래의, 가이드 녹음한 파일이 인터넷에 유출됐습니다.”

“어? 뭐?”

서재현은 잠깐 멍했다가 상황을 이해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게 왜 유출돼! 가이드가 왜 인터넷에 돌아다니냐고!”

“노래가 좋아서, 직원들이 복사해서 듣다가 실수로 유출된 것 같습니다.”

“뭐? 그 파일을 몇 명이나 복사했는데?”

“가수 라인 직원들은 거의 다….”

“환장하겠네.”

***

나강인이 가이드 녹음한 파일이 인터넷에 유출됐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그 글의 링크가 올라왔다.

- 이거 너튜브에서 찾은 건데, 노래도 좋고 가수도 잘 부르네요. 가수와 제목을 몰라서 그런데, 누가 부른 건지 가르쳐 주세요.

- 저도 궁금합니다.

댓글이 여러 개 달렸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 자작곡인가?

- 작곡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거 전문 작곡가가 만든 겁니다. 편곡까지 완벽하게 끝나 있어요.

- 맞아요. 가수가 노래 엄청 잘 부르네요. 어느 기획사에서 음반 내려고 녹음한 게 유출된 거 아닐까요?

- 그건 아닐 겁니다. 노래는 잘하는데 연주는 작곡 프로그램을 그냥 돌린 것처럼 좀 딱딱한 느낌이라서요.

- 맞습니다. 이런 좋은 곡을 음반으로 낼 때는, 보통은 돈을 좀 들여서 녹음합니다.

- 그럼 녹음하려고 연습하던 곡이 유출된 건가?

- 그럴 수도 있겠죠.

- 어느 회사인지 몰라도 난리 났겠네.

- 그런데요. 연습한 노래가 이렇게 좋으면 진짜 음반이 나왔을 때는 어떨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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