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대안
SAH 엔터 사장 서재현과 가수 세 명은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유출된 음원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서재현이 말했다.
“가이드 녹음 파일 복사본이 너무 많이 퍼지기 전에, 정규 싱글을 빨리 녹음해서 발표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가 부를래? 자꾸 서로 한다고 싸우지만 말고 제발 좀 정하자.”
주사위를 탁자 밑으로 떨어뜨린 가수가 다른 가수들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낙이 맞는 것 같아. 내가 양보할게.”
줄기차게 ‘낙’을 외쳤던 가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다들 미끄러지거나 추락한 경험이 있잖아. 그리고 그걸 극복하고 지금 자리까지 올라왔잖아.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라고 해서 무시할 순 없지. 내가 졌어.”
주사위 두 개의 합이 3이 나온 가수도 말했다.
“나야 뭐 꼴등이니까 당연히 빠져야지.”
가수 세 명이 언제 싸웠냐는 듯이 서로 양보했다.
서재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들이 이렇게 순순히 양보할 놈들이 아닌데? 무슨 생각이냐?”
“그거야….”
서재현이 콕 집어서 물었다.
“가이드가 유출돼서?”
주사위를 바닥에 떨어뜨린 가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곡은 이쯤 되면 이미 반쯤 발표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정식으로 녹음한 건 아닌데?”
“그러니까 더 문제지. 사실 내가 부르면 그 가이드 녹음한 사람보다 못할 리가 없잖아?”
“그치.”
“그런데 더 잘 부를 자신도 없거든.”
다른 가수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정식 앨범을 발표했는데, 가이드 녹음보다 나은 게 없으면 쪽팔리잖아.”
주사위의 합이 3이 나온 가수도 말했다.
“그 사람 정식 데뷔한 가수가 아니라며? 만약 정식으로 음반을 냈는데 가이드 녹음한테 지기라도 하면, 평생 따라다니는 흑역사가 될걸? 아마추어 가이드보다 노래 못 부르는 가수라고.”
서재현도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야. 그럼 이 노래는 어쩌라고?”
“그거야 사장님이 결정하셔야지?”
“이 새끼들이. 평소에는 형형 거리더니 이럴 때만 사장님이야.”
그중 한 명이 제안했다.
“부르고 싶어 하는 애들 많으니까 다른 애들 주든지.”
서재현은 어이가 없었다.
“너희들도 가이드를 이길 자신이 없는데, 다른 녀석 줬다가 일방적으로 깨지면? SAH 엔터가 맛이 가서 좋은 곡 망쳤다는 소리 듣고 싶냐?”
이 세 명은 SAH 엔터 소속 가수 중에서 이 노래를 제일 잘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 회의실에 모였다. 다른 가수들은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탈락했다.
탈락한 사람을 불러서 녹음해봤자 이 세 명보다 나을 확률은 낮다.
주사위가 3이 나온 가수가 제안했다.
“그럼 아이돌 애들한테 줘서 부르게 하면….”
“겨우 밥값만 벌면서 사는 애들을 이 기회에 매장해 버리게?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놈이구나?”
“그럼 어쩌지? 곽 작곡가님한테 곡 돌려줘야 하나? 다른 회사에 팔라고?”
서재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다른 회사 좋은 꼴은 내가 또 못 보지.”
그렇다고 이 곡을 쥐고만 있으면 작곡가 곽찬석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서재현이 말했다.
“내가 찬석이를 만나봐야겠다.”
***
인터넷에 유출된 음원은 피시방 삼인방도 들었다.
“와. 이거 노래 좋다.”
“누가 부른 거지?”
신은하가 옆에서 듣고 말했다.
“응? 강인 오빠 가이드 녹음이 왜 인터넷에 돌아다녀?”
그녀는 나강인이 곽찬석의 녹음실에 갔을 때 따라갔었다.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누나. 이거 강인이 형이 부른 거라고요?”
“응. 가이드 녹음한 거야. 근데 이런 건 기획사 내에서만 돌아다녀야 하는데 왜 여기 있지?”
윤아름이 손뼉을 쳤다.
“와. 강인 오빠 노래 진짜 잘 부른다.”
신은하가 자랑했다.
“강인 오빠는 기타도 엄청 잘 쳐.”
“나중에 노래 불러달라고 해야지.”
“으응?”
“왜요?”
신은하가 활짝 웃었다.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끼리 미니 콘서트라도 하자고 할까?”
“그냥 노래방 가면 되는 거 아녜요?”
“아. 맞다.”
***
서재현이 작곡가 곽찬석이 빈대떡과 각종 전을 파는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가수로 데뷔하기 전부터 친구다. 서재현이 데뷔 초반에 삽질할 때 곽찬석도 곡이 안 팔려서 같이 삽질했다.
서재현이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크으. 옛날에는 이 집에서 우린 왜 못 뜰까 한탄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옛날에 같이 고생한 친구라서 곽찬석은 이번 곡을 만들기도 전에 넘겨주겠다고 계약했다.
곽찬석이 막걸리를 마셨다.
“그때도 넌 여기 오면 소주만 고집했지.”
“넌 전은 막걸리랑 먹어야 한다고 했고.”
그 시절에는 김치전이나 파전 하나만 안주로 시켜놓고 술을 마셨다. 안주를 두 개나 시킬 돈이 없어서, 김치전 하나만 시켜놓고 조금씩 아껴먹다가 차갑게 식은 걸 먹는 날도 많았다.
서재현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땐 내기해서 이긴 쪽이 고른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각자 먹고 싶은 술 알아서 시켜먹을 수 있잖아? 안주도 김치전이냐 파전이냐로 싸울 필요도 없고. 찬석아. 우리 성공했지? 이제 성공한 거 맞지?”
곽찬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을 꺼내기 전에 약부터 칠까?”
서재현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어…. 표 많이 나냐?”
“내가 널 모르냐? 너 전에 곡 나오기도 전에 계약할 때도 여기서 그 이야기 꺼냈다. 이번엔 뭔데?”
서재현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네가 준 그 곡 말이야. 부를 사람이 없다.”
곽찬석은 가볍게 생각했다.
“다들 싫대? 그럼 다른 사람 줄 테니까 도로 뱉어.”
“어허. 급발진하지 말고. 가이드 녹음이 워낙 잘 됐잖아. 그런데 그 파일이 유출됐다.”
곽찬석도 알고 있다.
“알아. 유선이가 알려주더라. 너희 회사 곡 관리 참 잘한다. 그치?”
“야. 미안. 우리 회사가 예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좀 자유로운 분위기잖아.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원래 그 곡을 부르고 싶어 하던 가수들이, 다들 포기했다.”
“왜?”
“괜히 신곡 발표했다가 가이드 녹음이랑 비교되면 말이야. 이기면 당연한 일이니까 남는 게 없지만, 지면 망하는 거잖아. 비슷하단 평가를 들어도 쪽팔린 거고.”
곽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잘 부르긴 했지. 나도 처음에는 가이드만 따려다가 도중에 그만둘 수가 없어서 작정하고 녹음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서재현이 곽찬석의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 가이드 녹음한 가수 소개 좀 해줘라. 우리 회사에서 그 가수랑 그 곡으로 디지털 싱글이라도 발표하게.”
“응? 너희 회사 소속 가수도 아닌데?”
“소속시켜야지. 음반 내고 싶으면 계약서에 사인하겠지.”
곽찬석이 짜증을 냈다.
“이 새끼가. 내가 너 이럴까 봐 소개 안 해준 거야. 유선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잖아.”
갑자기 옆에서 곽유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요. 재현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좀 폐기물 같네요.”
서재현은 당황했다.
“어? 유선이 너 언제 왔…. 아니, 잠깐. 너 지금 쓰레기라는 말을 고급지게 한 거야?”
곽찬석이 말했다.
“우리 막내가 근처에 있다길래 집에 갈 때 운전 좀 해달라고 내가 불렀다. 그리고 너 쓰레기 맞아. 넌 친구라는 새끼가 어떻게 유선이 생명의 은인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냐?”
곽유선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재현 오빠처럼 잔혹하게 굴어야 회사 사장이 되나 봐요.”
남매의 공격을 받은 서재현이 얼른 두 손을 들었다.
“야야. 알았어. 우리 회사에 소속되지 않아도 돼. 그냥 디지털 싱글만 내자.”
그게 서재현이 생각한 대안이다.
“좋은 곡을 샀는데, 우리 회사에서 가이드와 비벼볼 만한 가수 중에는 부르겠다는 사람이 없어. 부르겠다는 가수는 가이드보다 실력이 떨어져.”
SAH 엔터에서 정식으로 발표한 디지털 음반이 가이드 녹음 파일보다 못하면 회사 전체가 욕먹기 딱 좋다.
“그렇다고 이 곡을 폐기하면 너도 손해, 나도 손해잖아.”
곽찬석이 따지고 들었다.
“넌 곡만 샀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녹음도 내 녹음실에서 나랑 했는데?”
“녹음은 새로 하면 되지! 그리고 홍보, 판매 다 우리 회사가 할 거야. 앨범 표지도 만들어야지.”
“음….”
노래는 녹음 파일만 판매 사이트에 덜렁 올려놓는다고 팔리는 게 아니다. 노래가 좋아도 적당한 홍보가 없으면 사람들은 그런 곡이 있는 줄도 모른다. 그러면 조용히 묻혀버릴 수도 있다.
“기다려봐. 할 생각이 있는지부터 물어보고 이야기하자.”
곽유선이 얼른 말했다.
“큰오빠. 내가 물어볼게.”
“그래라.”
***
나강인은 곽유선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상황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 곡은 이미 팔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 이건 그 곡을 산 회사의 사장님이 직접 제안한 거예요.
“저는 방송출연이나 공연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 그런 건 협의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음…. 일단 생각 좀 해보고 연락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신은하와 피시방 삼인방이 옆에 있었다.
신은하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저번에 가이드 녹음한 그거. 정식으로 음반을 내자네?”
“앗! 곽찬석 작곡가님이?”
“아니. 그 곡을 산 회사에서 제안했대.”
신은하가 찜찜해 했다.
“흐음…. 이 바닥에 등쳐먹는 사기꾼 많은데.”
“하지 말까?”
“아니지. 무조건 해야지. 대신에 먼저 전문가에게 좀 물어보고.”
신은하가 그녀의 매니저 박우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실장 오빠. 내가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 뭔데?
신은하가 나강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 후에 말했다.
“그러니까 박 실장 오빠가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 야. 난 네 매니저이지 강인 씨 매니저가 아니잖아. 강인 씨는 우리 회사 소속도 아닌데.
박우섭은 SAH 엔터의 배우 라인 매니저다.
“그래서 안 해줄 거야? 강인 오빠한테 신세 진 거 많다며!”
- 한다. 해. 그냥 이렇게 내가 고생하는 거 너나 강인 씨가 알아달라고 한 거다.
“땡큐.”
- 고마우면 강인 씨가 만든 잡탕 과자 한 통 챙겨줘. 우리 와이프랑 애들이 그거 참 좋아한다.
“두 통 챙겨달라고 할게.”
- 오케이. 그래서 강인 씨에게 제안한 회사는 어디래?
“몰라. 그걸 제안한 관계자가 지금 곽찬석 작곡가님하고 같이 있대.”
나강인이 곽유선에게 톡을 보내 위치를 확인했다. 신은하가 그 장소를 다시 불러주었다.
장소를 들은 박우섭이 말했다.
- 여기서 가깝네. 내가 가서 간이라도 살짝 볼게. 곽찬석 작곡가의 곡을 살 정도면 허접한 회사는 아니겠지만, 이 바닥은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통수 치는 놈들이 꽤 있으니까.
“땡큐!”
- 대신에 강인 씨가 만든 요리도 하나 추가.
“밀폐용기에 꽉꽉 담아줄게!”
***
곽유선이 말했다.
“그분이 아는 사람이 지금 여기로 와서 이야기라도 들어본대요.”
서재현이 물었다.
“아는 사람?”
“이쪽 업계 일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데요? 자세한 건 재현 오빠가 직접 물어봐요.”
서재현이 살짝 걱정했다.
“벌써 다른 회사가 있는 건가? 소속사 없다며?”
“제가 알기론 없어요. 배우 소속사들이 탐낸다고는 들었지만요.”
잠시 후에 술집에 신은하의 매니저 박우섭이 들어왔다.
박우섭은 술집에서 서재현을 보고 당황했다.
“어? 사장님.”
“응? 박 실장이잖아? 이야. 이런 데서 만나네? 찬석이 넌 처음 보지? 우리 배우 신은하 씨 매니저 박우섭 실장이야. 난 누구 기다리고 있으니까 박 실장도 볼일 봐.”
“어…. 그게요.”
박우섭은 그가 만나야 하는 사람이 곽찬석과 같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곽찬석의 앞에는 서재현이 앉아 있다.
“저기, 사장님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래도 저 같은데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곽찬석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재현아. 그분이 신은하 씨하고 친하더라. 가이드 녹음할 때도 신은하 씨가 따라왔었어.”
“어?”
“그래서 신은하 씨 매니저가 오셨나 보네.”
서재현은 당황했다.
“아니, 잠깐. 신은하 씨랑 친해? 왜?”
신은하의 매니저 박우섭이 공식적인 이유를 댔다.
“그거야 은하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줬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사람이 설마 나강인 씨야?”
“예. 사장님.”
“나강인 씨가 노래도 해?”
“굉장히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서재현이 왼팔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며 손을 흔들었다.
“잠깐만. 무슨 상황인지 이해 좀 하게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