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녹음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은 나강인이 누군지 안다. 소속 배우인 신은하가 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구해줬는데 모를 수가 없다.
서재현이 탁자 아래를 보면서 물었다.
“박 실장. 나강인 씨가 우리 회사를 싫어하지는 않겠지?”
“예. 전에는 회사에 놀러 와서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 갔습니다.”
“아니,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데?”
“예?”
서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신은하 씨와 박 실장하고 잘 아는 사이에, 회사에 놀러도 왔었어. 이야아. 이거 인연이네. 인연이야. 당장 전속 계약서를….”
곽찬석과 곽유선이 인상을 확 썼다.
서재현은 더 떠들었다가는 한 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게 아니라….”
곽찬석이 욕을 했다.
“너 이 새끼. 나강인 씨가 유선이를 구해줬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어? 그랬지.”
“그런데도 유선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지도 않았어? 그 사고가 신은하 씨 CF 현장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누가 구해줬는지도 몰랐던 거야?”
“어? 아니, 그게, 유선이는 괜찮다길래…. 그리고 내가 배우 라인은 터치를 잘 안 해서 그 일은 잘 몰랐….”
“그런 놈이 곡은 따박따박 받아가? 내 곡 도로 내놔!”
“아니. 야. 내가 나강인 씨에 대해 아는 건….”
나강인은 국제 용병 조직 자칼 일당과 낙귀 해적단을 혼자 때려잡았다.
SAH 엔터 직원 중에서는 딱 두 명만 그 사실을 제대로 안다. 한 명은 매니저인 박우섭이고 다른 한 명은 사장인 서재현이다.
서재현은 나강인의 전투 이력을 뒤늦게 떠올리고 침을 꼴깍 삼켰다.
“어…. 나강인 씨는 보통 분이 아니시니까, 내가 막 밀어붙이면 안 되겠네?”
곽찬석이 말했다.
“좋게 잘 처리해라. 이번 일로 아무도 서운해하지 않게 말이야.”
서재현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어…. 강인 씨가 서운하면 큰일 나지. 나야 뭐 좀 서운해도 될 거 같다. 내가 양보 많이 할게. 그래야 내가 안전할 거 같아.”
***
서재현은 마음 같아서는 나강인에게 전속 계약서를 들이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곽찬석 남매에게 맞을 거 같았다.
게다가 혼자서 용병조직과 해적단을 쓸어버린 나강인이 좀 무섭기도 했다.
서재현이 이튿날 박우섭 실장을 불러 물었다.
“신은하 씨하고 나강인 씨가 많이 친한가?”
박우섭이 적당히 둘러댔다.
“두 사람만 친한 건 아닙니다. 같이 영화를 찍었던 김유찬 씨도 종종 만나고, 손태민 감독이나 오규철 셰프와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혹시 나강인 씨가 가깝게 지내는 회사가 있어?”
“THO 엔터와 상당히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THO? 거긴 영화와 공연만 하지 배우나 가수 소속사는 아니잖아. 음반을 내는 곳도 아니고.”
“그건 그렇습니다.”
서재현이 손을 비볐다.
“그럼 말이야. 신은하 씨가 나강인 씨한테 이야기 좀 잘해줄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서재현은 어젯밤에 고민했다.
나강인이 좀 무섭긴 한데,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나강인의 노래만 듣고도 탐냈는데, 영화와 드라마 쪽 명성까지 들으니 더 탐났다.
“나강인 씨를 노린 기획사들은 다 배우 쪽이라며? 그럼 가수를 제안한 곳은 없겠지. 우리 회사와 계약하라고 이야기를 잘해줄 수 있을까?”
“은하는 계약이 반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은하가 이번에 ‘햇살 좋은 날’로 확실히 떴으니까 이제 아쉬운 건 우리 쪽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시키면 하려고 할지….”
“그렇지? 나도 그럴 거 같더라고.”
서재현이 A안을 포기하고 B안을 꺼냈다.
“그럼 박 실장이 가서 제안 좀 해봐. 전속 계약 말고, 한 곡만 내는 거로.”
“아. 그 정도라면야….”
“가능하겠지? 찬석이가 나강인 씨에게 따로 이야기할 텐데, 우리 쪽에서도 만나서 잘 이야기할 사람이 있어야지. 판매 수익도 적당히 나누고.”
“음원 판매는 우리 회사가 지원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이거 대충 처리하면 찬석이가 날 때릴지도 몰라. 그리고.”
서재현이 은근히 기대했다.
“이번에 잘 되면 나강인 씨가 다음에도 우리하고 계약하지 않을까? 가수든 배우든 우린 다 커버할 수 있으니까.”
***
박우섭 실장이 나강인을 만나 SAH 엔터의 조건을 설명했다.
“우리 회사는 주로 음원 판매 수익과 공연 수익, CF로 돈을 버는데…. 혹시 행사를 뛰거나 CF에 출연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방송 카메라 앞에도 안 서는 분이시니까.”
가수가 얼굴 노출을 거부하면 수익이 나올 곳은 크게 줄어든다.
“그럼 음원 판매 수익을 나누는 조건으로 저희가 음반을 내겠습니다. 수익 배분은 반반입니다.”
신은하가 옆에서 물었다.
“박 실장 오빠. 다른 수입은 없어?”
“음원이 뜨면 CF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될 수도 있어. 카페에서 틀어주거나 노래방에서 손님이 부를 때도 수익이 들어오고, 라디오 수익도 있지.”
“그 돈이 강인 오빠한테도 가나?”
“가수한테도 조금은 가지.”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 활동하지 않아도 예산으로 쓸 돈이 들어온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강인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 그러시죠.”
박우섭 실장이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회사에 가면 사장님한테 할 말이 있겠네요.”
박우섭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업계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작사작곡 저작권료 이야기도 나왔다.
박우섭이 농담 삼아 물었다.
“강인 씨가 직접 작사나 작곡까지 하시면 행사를 뛰지 않아도 수입이 들어올 텐데요. 하하하.”
AI 전지인이 얼른 말했다.
- 다양한 지구연합군 군가가 초기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군가라면 몇 곡 있습니다만.”
박우섭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예. 군가요. 그러시군요. 하, 하하…. 군가를 누가 듣겠습니까? 그런 건 발표해봤자 녹음비도 안 나옵니다.”
곽찬석이 만든 노래 ‘오늘도 걷는다’는 정식으로 녹음한 후에 발표하기로 했다.
SAH 엔터에서는 큰 수익을 기대하고 디지털 싱글을 내는 건 아니다. 곡을 다른 회사에 넘겨주긴 싫고, 묻어둘 수도 없어서 진행하는 일이다.
게다가 이미 가이드 녹음 파일이 유출돼서 정식 녹음을 서둘러야 했다. 회사는 그 핑계를 대고 뮤직비디오와 화보는 생략했다.
그래도 앨범 표지는 있어야 한다.
그건 사진을 찍어서 후처리한 후에 쓰기로 했다. 그런데 전문 사진사를 고용할 예산이나 시간도 없었다.
박우섭이 카메라를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강인 씨가 모델로 나선다면 스튜디오를 긴급으로 섭외하겠지만, 아니면 이 카메라로 우리가 직접 찍으라던데요?”
신은하가 불평했다.
“와. 사장님 너무하네. 이런 식으로 강인 오빠를 압박해서 어떻게든 얼굴을 공개하게 하겠다는 거 아냐?”
“아마 그렇겠지?”
나강인이 말했다.
“사진은 그냥 제가 찍겠습니다.”
“어? 직접 모델을 하시게요?”
“아뇨. 그 카메라로 풍경 사진이라도 찍으려고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정찰 촬영 스킬을 사용하면 사물과 지형지물을 정확히 찍을 수 있습니다.
신은하가 물었다.
“강인 오빠. 혹시 예술 사진도 잘 찍어?”
예술 사진과 정찰용 사진은 목적이 많이 다르다. 정찰용 사진이 예술적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아닐 확률이 더 높다.
“아니.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 찍는 걸 좀 해.”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차라리 손태민 감독님한테 부탁하는 건 어때?”
“손 감독님은 요즘 새 영화를 준비한다고 바쁘시다던데?”
“그분이 원래 사진 엄청 잘 찍으셔. 컬렉션도 따로 있으시대. 거기서 노래랑 잘 맞는 거 한 장 쓱 하는 거지.”
“뭐, 손 감독님이 허락하면 나야 상관없지.”
신은하가 얼른 손태민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손태민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와서 맘대로 골라가! 그리고 강인 씨는 내 영화에 꼭 나오는 거다? 나 지금 당연히 나오는 줄 알고 시나리오 쓰고 있거든?
“제가 강인 오빠한테 압력 팍팍 넣을게요! 근데요. 그 시나리오에 제 자리도 있는 거죠?”
- 은하 씨는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지 일단 오디션을 봐야지?
“와. 슬쩍 묻어가려고 했더니 안 넘어오시네.”
- 대신에 시나리오 다 쓰면 남들 모르게 비공개로 살짝 보자. 떨어져도 창피하지 않게.
“자꾸 떨어뜨릴 생각 말고, 찰싹 붙일 생각을 해주세요.”
그들은 손태민을 찾아가서 그의 사진 컬렉션 중에서 표지로 쓸 것을 골랐다.
정식 녹음은 SAH 엔터 녹음실에서 했다. 녹음 책임은 곽찬석과 곽유선 남매가 맡았다.
나강인이 테스트 삼아 노래를 불렀다.
곽찬석이 그걸 듣고 감탄했다.
“이야아. 가이드 녹음할 때 했던 걸 하나도 안 놓치고 다 기억하고 있네요?”
그때 했던 모든 것은 AI 전지인이 기억하고 있다.
“강인 씨가 그때와 똑같이 부를 줄은 몰랐습니다.”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도 맞장구를 쳤다.
“이러면 녹음이 편해져요. 역시 강인 씨는 대단하세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모두 기억하는 겁니다.
“알지. 너 대단한 거.”
곽찬석은 그때 미처 말하지 못한 것과 나중에 생각난 것을 조언했다. AI 전지인이 추가 정보를 반영해 나강인을 보조했다. 덕분에 나강인의 노래가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
녹음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후처리는 곽찬석과 곽유선이 책임지기로 했다.
이제 가수 이름을 정해야 한다.
나강인이 말했다.
“가명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가수가 가명으로 활동하는 건 흔한 일이다. 온갖 이름이 후보로 나왔다. 하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어차피 한 곡만 낼 건데 간단히 가죠. 개발 어떻습니까?”
신은하가 물었다.
“개발보다는 강아지발이 귀엽지 않아?”
“그 개발이 아니라 뭔가 개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곽유선이 얼른 손을 들었다.
“아예 댕댕발이라고 하죠! 그게 더 귀엽잖아요!”
곽찬석이 말했다.
“발은 뺄까?”
“그럼 댕댕!”
이름 짓는데 지친 사람들이 즉시 찬성했다.
그렇게 나강인의 가수 이름은 댕댕으로 정해졌다.
***
16부작 드라마 ‘푸른 하늘’은 마지막 촬영에 들어갔다.
조연 배우 이보라는 아쉬웠다.
“딱 20편만 채우면 나도 확실히 뜰 수 있는데.”
나강인은 이 드라마의 다양한 액션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보라도 액션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워낙 주연 위주로 돌아가는 데다가, 나강인이 중반 이후에 참여하는 바람에 이보라는 신은하처럼 많이 뜨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래서 아쉬웠다.
“진짜 딱 네 편만 연장 안 하나?”
신은하가 옆에서 놀렸다.
“어머. 난 상영시간 두 시간도 안 되는 영화로도 충분했는데, 넌 열여섯 시간짜리 드라마로도 부족하나 봐?”
“야! 너 때는 손 감독님이 팍팍 밀어줬잖아! 그리고 넌 영화 처음부터 무술감독님이 도와줬고 난 중간 넘어서 처음 나왔다고!”
“그래. 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야지.”
“야!”
신은하가 이보라를 실컷 놀려먹고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나강인은 이 드라마의 마지막 액션을 찍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가리고 복잡한 지형지물 사이를 날아다녔다.
신은하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참 잘한단 말이야.”
이보라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그치. 안 반할 수가 없어.”
“야. 상도의는 좀 지키지?”
“무슨 상도의?”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도 먼저 집은 사람이 있으면 다음 사람은 손을 떼는 게 예의잖아. 내가 먼저 잡았다.”
이보라가 받아쳤다.
“그래서 계산은 하셨고?”
“응?”
“계산 안 했으면 네 건 아니지?”
“너 그러다 상처받아.”
“상처? 야. 너 옛날에 나한테 졌던 거 생각 안 나? 발렌타인데이 때 말이야.”
“고등학교 때 초콜릿 누가 더 많이 받나 한 거? 그거 내가 이겼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이겼지. 그때 심판이 은서였잖아. 은서한테 물어볼까?”
신은하가 곧바로 차은서에게 전화를 걸어 그때 일을 물었다. 통화는 스피커폰을 켜고 했다.
차은서는 당황했다.
- 그거요? 그게 얼마나 옛날 일인데요. 그때 그러니까….
이보라가 얼른 말했다.
“은서야? 대답 잘해야 할 거다.”
- 앗! 설마 보라 언니? 와아! 오랜만이에요! 언니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나도 반가운데 말 돌리지 말자? 그래서 그때 누가 이겼어?”
- 아. 생각났다. 초콜릿 맛만 나는 과자도 숫자에 포함해야 하는지 가지고 엄청 싸웠잖아요. 그게 결론이 안 나서, 언니들이 서로 이겼다고 선언했어요.
이보라가 주장했다.
“그건 당연히 초콜릿이 아니지!”
신은하가 반박했다.
“색깔이 까맣고 먹어서 초콜릿 맛이 나면 그게 초콜릿이야!”
차은서가 물었다.
- 언니들은 아직도 만나면 싸워요? 옛날에도 그렇게 싸우더니.
“우리 사이가 어디 가겠니? 내일 피시방 갈 테니까 내 자리 잘 치워놔.”
- 네!
신은하가 전화를 끊었다.
이보라가 제안했다.
“그럼 승부를 새로 내자! 나강인 무술감독님을 놓고 공정하게 경쟁하는 거야!”
신은하가 코웃음을 쳤다.
“싫은데? 안 할 건데? 이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나한테 도전하고 싶으면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와!”
드라마 작가 도주희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메모했다.
“그래. 다음 작품에는 저 대사를 꼭 넣어야겠어. ‘나한테 도전하고 싶으면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와.’ 본격 액션 청춘드라마에 딱 좋은 대사야.”
촬영을 마친 최진욱 피디가 다가오다가 그 말을 듣고 걱정했다.
“도 작가. 우리 차기작이 하드코어는 아니지? 진짜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