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이보라를 찾아라
나강인이 드라마 ‘푸른 하늘’의 마지막 액션씬 촬영을 완전히 끝냈다.
최진욱 피디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강인 씨. 고생 많이 했습니다. 하하하.”
최진욱은 요즘 신났다. 평행선을 그리던 시청률 그래프가 나강인이 참여한 후로 확실히 위로 올라갔다. 현재는 같은 시간대 드라마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이래서 손태민 감독님이 나강인 씨 칭찬을 그렇게 했나 봅니다.”
“손 감독님을 만나셨습니까?”
“어, 아뇨. 그러셨다는 소문만 들었죠.”
드라마 작가 도주희도 웃으면서 다가왔다.
“진짜 나강인 씨가 우리 드라마에 참여한 건 신의 한 수였어요. 강인 씨가 있으니까, 대본 쓸 때 이야기가 술술 풀리는 거 있죠.”
“도 작가는 강인 씨가 싫다더니?”
“내가 언제 싫댔어? 신중하게 판단하자고 한 거지.”
그녀가 나강인을 보며 방긋 웃었다.
“다음에는 본격 액션 청춘드라마를 쓰려고 해요. 그때도 도와주실 거죠?”
최진욱 피디가 얼른 말했다.
“강인 씨. 우리 셋이 다시 뭉치는 겁니다. 이번에 봤잖아요. 나도 액션 드라마 잘 찍을 수 있다고요.”
나강인이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하시죠. 제가 이런저런 일이 많이 생기는 편이라서, 그때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최진욱 피디는 나강인이 무술감독이라는 것만 안다. 최근에 SAH 엔터에서 신곡을 녹음했다는 것도 모르고, 드래곤 플레이트 방탄조끼는 존재 자체를 모른다.
강남 자칼 사건이나 낙귀 해적단 사건을 나강인이 해결했다는 것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다.
“하하하. 다른 일이 생기시면 제가 일정을 조정하면 되죠. 스케줄을 여유 있게 잘 짜겠습니다.”
“아, 예.”
“아. 나흘 뒤에 우리 쫑파티 할 건데, 그때 강인 씨도 오실 거죠? 제가 회식비 빵빵하게 받아오겠습니다. 하하하.”
***
드라마는 아직 방영 중이지만 쫑파티는 미리 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나흘 뒤에, 신은하가 옷장을 열어놓고 고민했다.
“오늘 저녁때 쫑파티 가야 하는데 옷장에 옷이 너무 없다.”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네 집에 옷 많잖아.”
“안 되겠어. 여기도 좀 채워놔야겠어.”
“그래라. 나도 좀 입게.”
신은하가 웃었다.
“훗. 엄마. 나 배우야. 엄마가 내 옷을 입는 건 무리 아닐까?”
“네가 누구 유전자 덕분에 배우를 하는 거 같아? 설마 네 아빠겠니?”
신은하가 바로 인정했다.
“맞아. 아빠 닮았으면 난 영석이처럼 생겼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소파에 누워서 배를 긁으며 TV를 보던 신영석이 항의했다.
“뭐지? 이 불쾌한 유탄은? 왜 화살이 나한테 날아오는데?”
“이유가 궁금하면 거울 줄까?”
“꺼져.”
그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런데 너 보라하고 연락되니?”
“보라? 이따가 쫑파티에 오겠지. 왜? 걔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보라 엄마가 전화했더라. 보라하고 연락이 안 된다고.”
“응? 언제부터?”
“오늘 아침부터.”
“어디 갔는데?”
“바람 쐬러 간다면서 아침에 차 가지고 나갔는데 전화를 안 받는대. 그래서 보라 엄마가 너한테 좀 물어봐 달라더라.”
“내가 걔가 어디서 바람 쐬는지 어떻게 알아.”
신영석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누나.”
“어? 뭐지? 갑자기 이 친근한 태도는?”
“보라 누나한테 연락 좀 해봐. 혹시 모르잖아.”
신은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신영석을 보았다.
“뭐야. 너 아직도 보라 좋아하냐?”
“좋아하는 게 아니라! 팬이라고!”
“팬은 무슨. 너 옛날부터 보라 엄청 좋아했잖아.”
“나 중학교 때 우리 학교 애들 삼 분의 일이 보라 누나 팬이었다고! 나도 그런 거라고!”
신은하가 머리를 휙 넘겼다.
“야. 그때 너희 학교 전교생의 절반은 내 팬이었지?”
“자의식 과잉도 그 정도면 병이야.”
“전화하지 말까?”
신영석이 즉시 항복했다.
“마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앞으로 잘해라.”
신은하가 피식 웃으며 이보라에게 톡을 날렸다.
답장이 없었다. 읽지도 않았다.
“하긴. 바로 연락이 될 거면 걔네 엄마가 걱정을 안 하셨겠지.”
그녀가 이번에는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에 목소리가 들렸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어?”
신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얘는 전화를 안 받을 때는 많아도 스마트폰을 끄는 일은 잘 없는데….”
신영석이 걱정했다.
“진짜 보라 누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신은하도 좀 찜찜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쫑파티가 있는 날이라서 스마트폰을 꼭 쥐고 있을 텐데 이상하다. 배터리가 다 됐나?”
신영석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느낌이 안 좋아. 누나 아는 형사 없어?”
“아는 형사는 없는데, 더 잘할 것 같은 사람을 알아.”
“응? 누군데?”
신은하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오늘 쫑파티 준비해야 한다며? 옷 그냥 그렇게 입고 가게?”
“가까워. 쫑파티는 저녁때니까 늦지 않게 올게!”
***
그녀는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나강인은 제작 거점에 있었다.
그녀의 본가에서 나강인의 제작 거점까지는 차로 가면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가 나강인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보라는 최 감독님과 도 작가님의 다음 드라마에 꼭 출연하고 싶어 해. 그러니까 적어도 쫑파티가 있는 오늘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리 없어. 장소가 바뀌거나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겨서 연락이 올 수도 있잖아.”
“그런데 휴대폰이 꺼져 있으니까, 보라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냥 느낌이 좀 싸해서.”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위험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너 보라 씨를 어느 정도로 잘 아냐?”
“그게….”
신은하가 이보라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나랑 보라는 어릴 때부터 우리 동네에서 살았어. 우린 어린이집이랑 초등학교 동창이야. 그때는 되게 친했어.”
“근데 요즘은 왜 만나기만 하면 싸워?”
“중학교 때, 우리 지역 양대 얼짱이 나랑 보라였거든. 그 근처 학교 다 통틀어서 우리 둘이 최고로 예뻤어.”
“그러니까 배우를 하겠지.”
“중2 때부터인가? 서로 잘났다고 싸우기 시작했지.”
“주먹으로?”
“아니! 발렌타인데이 때 누가 초콜릿을 더 받았는지 같은 거로 싸우고 그랬어.”
“그런 날은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거 아녔냐?”
“우리한테는 남자들이 주더라고. 아. 그때 누구 초콜릿이 더 많은지 비교해준 애가 은서야. 은서도 한동네 살았거든.”
차은서는 아직도 이 동네에 산다.
“그렇게 중학교 때도 싸우고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서로 잘났다고 싸우다가, 고2 때 서로 다른 소속사에 들어갔어.”
나강인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금 깨달았다.
“그러니까 둘 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예쁘기로 유명했고, 같은 시기에 데뷔하고, 비슷한 속도로 연예계에서 성장했구나.”
“맞아. 그러다가 내가 이번에 햇살 좋은 날로 빵 떴지. 걔가 그게 많이 부러웠나 봐. 자기도 이번 드라마로 꽤 떴지만 나보단 못하잖아. 그래서.”
신은하가 살짝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걔가 지금 노리는 게 최 피디님과 도 작가님, 그리고 오빠가 참여하는 새 드라마야. 그런 애가 세 사람이 다 모이는 쫑파티가 있는 날 휴대폰을 왜 꺼놓겠어?”
“난 아직 그 드라마를 한다고 하진 않았지만, 상황은 알겠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됐을 가능성은?”
“아침에 차 몰고 나갔대. 차에서 충전하면 되잖아.”
“스마트폰이 고장 났으면?”
“그럴 수는 있는데, 하필 오늘 고장 나는 건 이상하잖아?”
나강인이 신은하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둘이 사이 나쁜 거 맞냐? 걱정하는 거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신은하가 즉시 반박했다.
“그냥 느낌이 싸해서 이러는 거거든? 휴대폰이 꺼졌다고 신고해봤자 경찰이 당장 뭐 해주진 않을 거 아냐!”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아. 수상하긴 하지?”
- 신은하의 추측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일단 이보라부터 찾자. 그러려면 정보가 더 필요해. 시간이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개인정보를 털어야겠어.”
- 제 해킹 스킬은 요원님의 작전 수행을 위한 개인정보 위조 등에만 쓸 수 있습니다.
“알아. 난 지금 이보라를 해킹하라는 게 아니야. 실종자 구출 임무를 하자는 거지. 민간인 구출은 지구연합군의 기본 임무라며.”
-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널려있잖아? 먼저 인터넷을 뒤져서 이보라가 흘린 개인정보를 싹 다 긁어모아.”
- 이해했습니다. 민간인 구출을 위한 개인정보 수집을 시작합니다.
AI 전지인이 작업 거점의 고성능 컴퓨터로 인터넷에 공개된 이보라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이보라는 오늘도 SNS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AI 전지인이 그 사진부터 찾아냈다.
- 사진 촬영 각도와 스마트폰 카메라까지의 거리를 계산했습니다. 이보라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보라를 목격하고 올린 글이나 사진, 그냥 우연히 찍힌 사진도 다 수집해.”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으로 그 작업을 신속하게 수행했다.
나강인은 네 대의 모니터에 뜨는 정보와 AR 렌즈에 혼자만 볼 수 있게 뜬 정보를 동시에 보며 신은하에게 설명했다.
“보라 씨는 오늘 오전에 양평 두물머리에서 사진을 찍어서 SNS에도 올렸어.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의 배경에 이보라의 차가 찍힌 것도 있어. 그리고 도로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음? 양평을 떠나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응? 여기?”
“아마도?”
신은하가 화를 냈다.
“와. 보라 요게 여기 주소를 어떻게 알았지? 강인 오빠를 직접 공략하러 오나? 이 여우 같은 것이! 괜히 걱정했어!”
“괜한 걱정이 아닌 것 같다.”
“응?”
“이 사진이 찍힌 건 세 시간 전이야. 난 오늘 계속 여기 있었어. 그럼 보라 씨가 벌써 도착했어야 하는데….”
“어? 어?”
나강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인아. 범죄 상황을 고려해서, 오늘 이보라와 동선이 겹친 사람을 전부 다 찾아. 최근에 인터넷에서 어떤 형태로든 관심을 보인 사람도 찾아. 그중에서 사람을 납치할만한 놈을 따로 분류해.”
- 관련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겠습니다. 다만, 최종 판단은 요원님이 하셔야 합니다.
AI 전지인은 이보라와 오늘 같은 장소에 있었던 사람, SNS에 사소한 정보라도 올린 사람, 최근에 인터넷에 이보라에 관한 글을 쓰거나 그 글에 댓글을 남긴 사람들을 찾아냈다.
나강인의 제작 거점에는 설계용으로 쓰는 고성능 컴퓨터 한 대와 대형 모니터 네 대가 있다.
그 네 대의 모니터에 이보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이 줄줄이 떴다.
나강인은 AI 전지인이 대상자를 찾아낼 때마다 내용을 읽고 그중에서 수상한 사람은 따로 빼냈다.
나강인 혼자 모니터 네 개를 다 보는 것보다는 일을 분산하는 게 나았다.
신은하도 모니터 두 개를 보면서 대상자를 분류했다.
“이 사람은 아니야. 이 사람은 애매하니까 일단 킵. 이 사람은 되게 수상해!”
그러다 나강인이 보는 모니터에 신은하의 사진이 나타났다.
신은하가 얼른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 용의자가 나와야 할 화면에 왜 내 사진이 나와?”
“어….”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신은하가 실종된 이보라와 싸우는 모습이 최근에 자주 목격됐습니다. 데이터만 보면 제일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지인이가 유머 감각이 있네? 빼.”
화면에서 신은하의 사진이 사라졌다.
신은하가 옆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설마 날 의심한 거야?”
“아니야. 손이 미끄러져서 잘못 눌렀다.”
“아닌 거 같은데!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나강인이 화면을 가리켰다.
“어? 이놈 수상하다.”
“말 돌리냐?”
“아니. 이놈이 보라 씨를 스토킹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 진짜?”
AI 전지인이 모니터 한 대에 관련 자료를 띄웠다.
- 해당 인물과 이보라의 동선이 겹친 횟수가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된 것만 12건입니다.
“사진은?”
다른 모니터 세 대에 사진 열두 장이 떴다.
- 용의자가 이보라를 따라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모든 사진에 이보라가 있습니다.
어떤 사진은 멀리서 지나가는 이보라가 찍혔다. 여러 사람 사이에 이보라가 있는 것도 있었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이보라는 사진의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고 크기도 작게 찍혔다. 그래서 그녀가 그 사진에 있다는 걸 알고 보지 않으면, 그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사진이 열두 장이나 있었다.
신은하가 화면을 손으로 짚었다.
“여기, 여기, 여기 전부 다 보라야?”
“어.”
“그런데 왜 다 작게 나왔어?”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은 따로 보관하고 있겠지. 이놈은 일부러 이보라를 알아보기 어려운 사진만 인터넷에 올렸어. 그렇게 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거겠지.”
신은하가 팔을 문질렀다.
“와. 소름 끼쳐. 변태 스토커 맞네! 이놈이 범인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