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범죄분석
신은하는 나강인의 손을 잡은 이보라의 손가락을 모두 편 후에 구급차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너 빨리 병원 가야 해. 사람이 머리 다치면 진짜 조심해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박기정 형사도 조언했다.
“제가 아는 형사도 범인을 잡다가 머리를 다쳤는데, 괜찮은 줄 알고 병원에 안 갔다가 그만….”
신은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죽었어요?”
“예? 아뇨. 흉터가 크게 생겼죠.”
“어머어. 보라야. 들었어? 빨리 치료 안 하면 너 흉터 생긴대. 그것도 이마에. 이따만하게.”
배우 이보라는 흉터가 생기는 게 무서워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신은하가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휴우. 겨우 보냈네. 강인 오빠. 이제 다 끝났으니까 갈비 먹으러 가자. 박 형사님도 같이 가실래요?”
박기정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어, 저기….”
신은하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괜찮아요. 저희가 뭐 청탁 같은 거 할 사람인가요? 아! 정 부담스러우시면 옆에서 갈비탕 드세요. 고기는 저희가 구워서 넘겨드릴게요.”
“그게 아니라요.”
박기정이 산에서 내려오는 이 지역 경찰들을 가리켰다. 납치범들이 수갑을 찬 채로 끌려오고 있었다.
“저놈들도 조사해야 하는 데다가….”
“어머. 바쁘시겠다. 그러면 고기는 우리 둘이서 먹어야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오붓하게.”
“참고인 조사도….”
“네?”
박기정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인기 여자 연예인이 납치됐다가 구출된 사건이잖습니까? 아마 오늘 당장 기사가 뜨고 난리가 날 겁니다.”
“어? 그, 그렇겠죠?”
“그런데 저희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모르면, 기자들이 질문했을 때 대답할 말이….”
“그래서 우리도 조사하시겠다? 와! 이 배신감! 우리가 경찰 일을 대신 해줬는데 밥도 못 먹게 해!”
박기정이 얼른 제안했다.
“대신에 제가 진짜 잘하는 집 설렁탕을 대접하겠습니다.”
“경찰서 취조실에서요? 설렁탕을요? 막 코로 설렁탕 먹이고 그러는 거 아녜요?”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숟가락도 드리고요.”
“그리고 경찰서 앞 그 설렁탕집 저도 알거든요? 거기 우리 동네거든요? 주인 바뀌면서 맛없어진 거 다 아는데!”
“그렇죠? 저도 그게 좀 아쉽더라고요. 하, 하하.”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말했다.
“나도 경찰서에서 이야기할 게 좀 있으니까 가자.”
신은하가 선언했다.
“그럼 경찰서로 초밥 배달시킬 거예요.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하는 집에서!”
박기정이 손이라도 비빌 것처럼 두 손을 맞대며 말했다.
“아유. 당연히 그러셔야죠.”
신은하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밥값은 오늘은 내가 내지만 나중에 보라한테 다 돌려받을 거야. 이게 다 보라 구하려다가 벌어진 일이니까.”
“당연하지. 초밥 제일 비싼 거로 많이 주문해라. 어차피 우리 돈도 아닌데.”
***
그 지역 병원 의사는 이보라의 머리와 발목 부상이 심한 상태는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녀는 그 병원에서는 기본적인 치료만 받고 곧바로 그녀의 부모님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옮겨 입원했다.
이 사건은 포천에서 범인을 체포하고 피해자를 구출했다. 그런데 이보라가 납치되고 그녀의 차량이 버려진 장소는 남양주이고, 피해자를 찾아다닌 경찰은 서울에서 근무한다.
관련된 지역이 여러 곳이다 보니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만큼 기자들이 소식을 접하는 것도 빨랐다.
이보라 납치사건은 금방 뉴스를 탔다. 처음에는 인터넷에 뉴스가 뜨고 그날 저녁때는 공중파에서도 다뤘다.
경찰에서 이 사건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박기정이다. 다른 지역 경찰은 전체 상황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박기정이 근무하는 경찰서는 재빨리 수사 상황을 발표했다.
담당 형사 박기정이 직접 기자들 앞에서 설명했다.
“범인들은 유명 연예인인 피해자의 차량과 추돌사고가 나자, 일이 커지면 이미 진행 중이던 사기 행각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피해자를 납치, 살해하려 하였으며….”
박기정이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한 후에 물었다.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곧바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보라 씨가 실종된 때부터 구출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네 시간쯤 걸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출동해서 구출할 수 있었습니까? 이보라 씨가 신고했습니까?”
“피해자의 지인들이 이상함을 깨닫고 신고했으며, 우리 경찰은 그 신고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즉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피해자의 지인들도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그 지인이 누구입니까?”
“개인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보라 씨의 지인이면, 혹시 연예인입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박기정은 입을 다물었지만 신고한 지인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려졌다.
기자들은 포천 지역 현장에 출동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아. 거기 있던 분이요? 신은하 씨였죠.”
기자가 놀라서 다시 물었다.
“예? 신은하 씨가 거기 있었다고요? 확실합니까?”
“그럼요. 제가 햇살 좋은 날을 진짜 재미있게 봐서 아는데요. 확실히 신은하 씨였습니다.”
“와…. 신고한 지인이 신은하 씨였구나.”
이보라가 위험하다는 걸 눈치채고 신고한 사람이 동료 연예인 신은하라는 기사가 곧바로 떴다.
이보라는 병실에 입원해 있어서 기자가 함부로 찾아가 인터뷰할 수가 없다.
신은하는 기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소속사를 통해 연락해도 인터뷰를 거절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박기정 형사도 신고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기자들은 경찰 발표와 현장 목격자가 말한 것만 가지고 기사를 썼다. 그러다 보니 기사 내용이 다들 비슷해졌다.
어떤 기자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 그는 이보라와 신은하의 주소지나 출신 학교 등을 알아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추측하는 기사를 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그 기사가 올라왔다. 곧바로 댓글이 붙었다.
- 이보라와 신은하는 초등학교 동창에, 중고등학교도 근처고,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 살았네? 되게 친하겠다.
- 엄청 친한 친구가 납치되니까 신은하가 바로 눈치채고 신고했겠지.
- 이 정도면 인생의 베프 아닙니까?
윤아름이 그 글을 보고 차은서에게 물었다.
“은하 언니는 이보라 씨하고 안 친하다면서요? 근데 인터넷 반응은 완전히 다르네요? 뭐가 진실이에요?”
“음…. 그러니까 그 언니들은 초등학교 때는 되게 친했어. 집도 가깝거든. 나도 같은 놀이터에서 놀고 그랬는데.”
“그럼 친해요?”
“중학교 때부터 학교가 갈라졌는데, 그 언니들은 중고등학교 내내 자기네 학교의 퀸카였어. 예쁘고 성격도 밝아서 다들 좋아했어.”
“와. 부럽다.”
“그런데 그 언니들이 누가 이 지역에서 제일 예쁜지를 놓고 경쟁하더라?”
윤아름은 감탄했다.
“우와. 클래스가 다르네요. 학교가 아니라 지역 패권을 노렸구나.”
“응. 그래서 자주 싸웠어.”
“그럼 안 친해요?”
“아니 뭐, 옛날에는 얼굴만 보면 싸우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안 보는 데서 심한 욕을 하지는 않았어. 그 언니들 관계는 되게 독특해서 설명하기 힘들어.”
***
연예인 이보라는 병원에서 1인실을 쓴다. 그녀의 어머니가 옆에서 말했다.
“내가 오늘 은하네 부모님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보라가 투덜댔다.
“뭘 그렇게까지 해?”
“은하 아니었으면 너 큰일 날 뻔했어. 걔가 경찰에 신고도 하고 따로 돌아다니면서 널 찾았잖아.”
“알아. 나도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했을 거야.”
“네가 퍽이나 그랬겠다.”
“엄마는 누구 편이야?”
“오늘은 은하 편이다. 그리고 은하가 너 퇴원하면 밥값 내라더라.”
“밥값?”
“네 앞으로 달아두고 많이 먹었다더라.”
“알았다고.”
이보라가 손을 내밀었다.
“근데 엄마. 내 스마트폰은?”
“네 폰은 경찰이 증거물로 가져가서, 여기 새로 사 왔다. 네 매니저한테만 새 전화번호 가르쳐줬다.”
“연락처는?”
“새 폰에 다 옮겨놨어.”
이보라가 새 스마트폰을 켜며 말했다.
“엄마. 약속 많지? 얼른 가. 난 혼자 있는 게 편해. 얼른.”
이보라는 그녀의 어머니를 억지로 내보낸 후에, 스마트폰 주소록에서 나강인의 전화번호를 찾으며 혼잣말을 했다.
“강인 오빠한테 먼저 뭐라고 말하지? 고맙다고 하나? 밥 산다고 할까? 술 산다고 할까?”
이보라가 혼자 실실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나강인은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잘 안 받는다.
신호가 하염없이 가다가 음성이 들렸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
배우가 납치됐다가 구출된 사건은 당연히 뉴스가 된다.
그런데 그녀는 겨우 몇 시간 만에 구출된 데다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다.
이보라의 소속사도 이런 식의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그 회사는 그녀가 밝고 예쁜 이미지만 가지기를 바랐다. 이번 사건에 관한 건 사람들의 머리에서 빨리 사라졌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소속사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이보라는 괜찮다는 식의 간단한 입장문만 발표했다.
이보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예 병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불을 더 피우려면 장작이 필요한데,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녀의 납치 기사는 처음에만 확 퍼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기사와는 별개로, 이보라를 범인들의 손에서 구출한 남자가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의 무술감독이라는 소문이 조금 돌았다.
그 이야기를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누군가 아는 사람에게 들었다면서 올렸다.
곧바로 댓글이 붙었다.
- 이거 진짜일까요?
- 뇌피셜 확률 90%입니다.
- 근데요. 푸른 하늘의 무술감독이면, 햇살 좋은 날의 무술감독이랑 같은 사람이잖아요.
- 그러네요.
- 그 사람은 그 영화 찍을 때도 납치범을 잡지 않았어요?
- 맞다. 납치범 전문 해결사네.
-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하네요.
- 막 키가 2미터 넘고 온몸이 근육 덩어리일 듯.
- 인터넷을 검색해도 사진 한 장 나오는 게 없네요. 연예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 사진은커녕 이름도 안 나옵니다.
***
국제 용병 자칼이 강남 7층 건물을 점령했던 사건 때문에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졌다.
합수부가 그 사건을 정리해갈 때쯤에 낙귀 해적단 사건이 터졌다. 낙귀 사건도 합수부가 맡았다.
이제 낙귀 해적단 사건도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요즘 합수부 회의는 가끔가다 한 번씩 열렸다.
그런데 그 회의에 나강인이 이보라 납치범들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참석자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걸 또 나강인이?”
“와. 이 사람은 진짜네.”
불만도 터져 나왔다.
“그럼 우리 합수부 활동 기간은 또 연장되는 겁니까?”
“제가 원래 업무에 합수부 일까지 하느라 요즘 집에 못 들어갑니다.”
“전 이러다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경찰 간부가 손을 흔들었다.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이번에는 단순 납치 살인미수 사건입니다. 우리가 맡을 일이 아니에요.”
합수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납치 살인미수가 단순한 사건은 아니지만, 나강인이란 이름이 나오니까 되게 단순하게 느껴지네요. 하, 하하.”
경찰 간부는 박기정 형사가 제출한 자료와 다른 경찰서에서 올라온 자료를 정리해 화면에 띄웠다.
“그래도 다들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경찰 간부가 스크린을 보며 이번 납치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해결됐는지 설명했다.
이런 자료는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다.
합수부의 사건이 아니라는 말에 다들 편안한 마음으로 브리핑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브리핑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씩 변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사람들이 허리를 폈다.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었다.
스크린에 마지막 화면이 나오고 경찰 간부의 설명이 끝났지만, 합수부 회의실은 조용했다.
합수부장이 그 침묵을 깼다.
“그러니까, 나강인이 인터넷에 공개된 SNS와 게시판 글만 분석해서 용의자 셋을 골랐는데, 그때 소요된 시간이 한 시간이 안 된다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엄청나네요.”
다른 정부기관 간부가 말했다.
“게다가 이 납치사건의 범인이 아닌 다른 용의자 두 명도, 각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었고요?”
“예. 한 명은 여자친구를 감금해 폭행하는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여자의 속옷을 훔치는 변태 스토커였습니다.”
“심지어 그중 한 놈은 나강인이 찾아가서 잡았고요?”
“감금 폭행을 당하다 구출된 여성은,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한 말을 들어보면 나강인이 구해준 게 맞을 겁니다. 하필 그때 그런 무술 고수가 거길 찾아갔으면 뻔한 거죠.”
“나강인은 진짜 정체가 뭡니까? 대인 전투 전문가인 줄은 알았는데, 범죄분석 분야도 전문가였습니까?”
다른 기관 사람도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인터넷에 공개된 것만 분석해서 범죄 상황을 눈치챌 정도로 탁월한 전문가죠.”
“와.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인가?”
합수부장이 물었다.
“설마 우연이겠죠?”
경찰 간부가 대답했다.
“당연히 우연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어쨌든 수상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까진 해냈으니까 그 우연이 당첨된 것 아니겠습니까?”
회의에 참석한 각 부처 간부들이 한마디씩 했다.
“우리 부서로 스카우트하고 싶다.”
“나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