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문병
피시방 사장 조카 차은서와 나강인이 이보라의 병실로 병문안을 갔다.
이보라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어머어. 바쁘면 안 와도 되는데.”
차은서는 살짝 당황했다.
“네? 언니가 꼭 문병 오라면서요. 강인 오빠도 데리고요.”
“호호호. 은서야. 넌 눈치가 더 없어졌네?”
나강인은 그녀가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라서 받지 않은 것뿐이지만, 이보라는 그가 일부러 안 받는 줄 알고 문자도 보내지 못했다.
그녀는 대신에 차은서에게 연락해 나강인과 함께 문병을 와달라고 부탁했다.
나강인은 차은서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별소리 없이 따라왔다. 그는 이보라가 멀쩡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외상성 스트레스의 증상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관찰 시간이 짧아 확실하진 않습니다.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는 거잖아. 그게 어디냐.”
여기 온 목적은 해결했다.
이보라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강인 오빠. 그때 안 오셨으면 저는 진짜 큰일 났을 거예요.”
“제때 갔으니까 됐죠. 잊어버리고 치료 잘 받고 퇴원해요.”
그녀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저기요. 제가 그때 강인 오빠가 이기면 해준다던 거 말인데요.”
그녀는 나강인이 납치범들과 싸워 이기면 뽀뽀해주겠다고 외쳤었다.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사람이 급하면 아무 말이나 할 수도 있죠.”
이보라는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핑계 삼아 지금이라도 뽀뽀를 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나강인이 먼저 괜찮다고 했다.
이보라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제가 그래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서….”
“에이. 그런 건 안 지켜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나강인은 이보라가 멀쩡한 걸 확인했으니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나가기 전에 병실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손님이 있는 걸 보고 살짝 당황했다.
“어? 보라를 문병 온 손님들이 계시네요?”
이보라가 소개했다.
“우리 외사촌오빠가 이 병원 의사예요. 그러니까 우리 이모 아들이요. 오빠. 날 구해준 무술감독님이셔. 여기는 차은서라고 나랑 친한 동네 동생이야.”
이보라는 이 병원이 부모님 집에서 거리가 가깝고 외사촌오빠도 근무하는 곳이라서, 일부러 이곳에 입원했다.
외과 의사 김중석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아! 이분이 네가 말한 그 무술감독님이셔? 정말 고맙습니다. 보라가 감독님 덕분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뭐. 예. 제가 도움이 되긴 했죠.”
김중석은 몇 번이나 나강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큰소리쳤다.
“나중에 우리 병원에 오셔서 절 찾으시면 제가 잘 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나강인은 김중석과 인사한 후에 병실을 나섰다. 김중석도 잠깐 상태를 보러 들린 것뿐이라 바로 다른 병실로 갔다.
차은서는 병실에 남아야 했다. 이보라는 그녀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
나강인은 병원을 나가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AI 전지인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 유사시 의약품 확보를 위해 약품 및 의료도구 보관 장소를 확인해야 합니다. 최대한 많은 곳을 자연스럽게 정찰하십시오.
“약은 약국에도 있잖아.”
- 약국을 털어도 구할 수 없는 약과 장비가 병원에는 있습니다.
“넌 왜 또 극단적으로 가냐? 병원을 왜 털어?”
- 작전 지역에 고립된 상황에서는 돌발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나강인과 AI 전지인은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아직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작전 지역에 고립되었다고 가정하고 자체적으로 현지 적응 활동 중이다.
“알았어. 대충 둘러보고 나가자.”
나강인이 복도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AI 전지인이 빠른 목소리로 경고했다.
- 모퉁이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계속 걸어가면 충돌합니다. 3, 2, 1.
나강인이 걸음을 멈췄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녀가 복도를 뛰면서 모퉁이를 돌다가 나강인과 부딪힐 뻔했다.
“앗!”
나강인은 옆으로 슬쩍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고등학생이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아!”
그걸 본 간호사가 한소리 했다.
“연지야! 병원 복도에서 뛰지 말랬지!”
“네에!”
이연지는 말로만 그렇게 하고 다시 뛰었다. 간호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진짜. 쟤는 넘어지면 안 되는데.”
***
그날 저녁때 외과 의사 김중석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응급실 의사 이정현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수술 있어?”
“아니.”
“그런데 왜 여기서 저녁을 먹어?”
“우리 엄마랑 이모가 오늘 보라 상태 좀 잘 챙기라신다. 봐야 할 논문도 있고 해서 그냥 병원에서 먹는 거야.”
“논문?”
“연지 수술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아. 이정호 과장님 딸?”
“어.”
“성과는 있어?”
김중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없어. 아니, 전혀 없는 건 아니지. 그 재봉틀 봉합법을 쓰는 의사만 찾으면 방법이 있긴 한데, 그 의사를 찾을 수가 없다.”
“아직도 못 찾았냐?”
김중석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여기저기 알아봐도 아는 의사가 없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의사가 아닌 거 같다.”
“어…. 그래. 꼭 찾아라. 그런데 말이야.”
이정현이 주변을 슬쩍 보며 말했다.
“이보라 씨 말이야. 소개팅할 생각 없대?”
“응? 소개팅? 누구랑?”
이정현이 씩 웃으며 엄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당연히 나지.”
“미쳤냐?”
“아, 왜! 내가 의사니까 배우하고 소개팅 정도는 할 급이 되잖아.”
“응. 안되니까 꺼져. 걔는 남자 얼굴만 본다.”
***
드라마 ‘푸른 하늘’의 쫑파티는 연기됐다.
이보라가 파티 당일에 납치당했다가 죽기 직전에 겨우 구출됐는데, 쫑파티나 하자고 할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없었다.
드라마는 아직 방영분이 남아있어서, 굳이 지금 쫑파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작곡과 곽찬석과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 남매는 나강인이 부른 신곡의 후처리를 마쳤다.
SAH 엔터는 손태민 감독이 준 사진으로 앨범 표지를 제작했다.
나강인이 부른 ‘오늘도 걷는다’가 댕댕이란 이름으로 발표됐다. 대규모 홍보 이벤트는 없었다.
대신에 연예인 몇 명이 개인 SNS에 그 노래를 올렸다.
김유찬의 SNS에는 짧게 한 줄이 올라왔다.
[난 이런 느낌의 노래가 좋더라.]
신은하는 부모님 집에 있는 그녀의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SNS를 썼다.
[힐링된다아….]
이보라는 병실에서 좀 더 적극적인 글을 썼다.
[댕댕 님이 부르신 ‘오늘도 걷는다.’ 정말 좋아해요.♡]
신은하는 집에서 그걸 보자마자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가 이보라의 병실로 쳐들어갔다.
그녀가 이보라를 향해 불을 뿜었다.
“야! 나도 못 붙인 하트를 네가 왜 붙이는데!”
이보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어. 은하야. 그냥 SNS 한 줄 썼다고 뭘 문병까지 오고 그래? 기왕 왔으니까 사과나 깎아.”
“야!”
이보라가 이번에는 손으로 이마를 살짝 짚었다.
“나 환자야. 환자.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아파.”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너 이미 다 나았는데 기자들 피하느라고 여기서 쉬는 거잖아!”
“쳇. 어디서 들었대?”
“내가 널 모르니? 뻔하잖아! 그리고 너 오늘도 걷는다를 강인 오빠가 부른 건 어떻게 알았어?”
“은서가 알려주던데?”
“차은서!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이보라가 슬쩍 물었다.
“혹시 강인 오빠도 내 상태 알아?”
“알아! 너 꾀병인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너 전에 그렇게 부르겠다고 했다가 까였잖아!”
그들이 투덕거리는 병실에 외과 의사 김중석이 들어왔다.
그는 신은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신은하 씨!”
신은하는 의사가 보는 앞에서 이보라와 싸우지는 않았다. 그녀가 얼른 배우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안녕하세….”
“팬입니다! 옛날부터 팬이었습니다!”
이보라가 구박했다.
“쟤 팬 하지 말라고! 내 사촌오빠 맞아?”
신은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김중석이 누군지 깨달았다.
“아. 보라의 그 공부 잘한다는 친척 오빠….”
“네! 아시는군요!”
“순진한 여고생한테 소개팅 나오라고 졸랐다던 그 정신 나…. 아, 아니에요.”
“예?”
김중석이 이보라를 돌아보았다.
“보라야?”
이보라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맞잖아. 오빠가 옛날에 쟤 소개해달라며.”
“야.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인데….”
신은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그분 확실히 맞나 보네요? 와. 나 그때 고딩이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
새로 발표된 ‘오늘도 걷는다’를 유명 연예인 몇 명이 나서서 홍보했다. 자연스럽게 그 연예인의 팬이 그 노래를 들어보았다.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 유찬 오빠가 알려줘서 들은 노래인데, 이거 그거네. 저번에 인터넷에서 들었던 그 노래.”
“그때보다 좀 더 좋은데?”
“이야아. 작곡가가 곽찬석이야. 곽찬석의 이번 신곡은 이거구나.”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댕댕이 도대체 누군데 곽찬석이 곡을 주고 배우들이 SNS로 띄워주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노래가 참 좋다.”
곡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곡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른다. 듣고 있으면 진짜 힐링 된다.”
***
피시방 삼인방 차은서가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며 말했다.
“강인 오빠는 어떻게 노래도 이렇게 잘해?”
윤아름이 맞장구쳤다.
“요리도 잘해.”
대학생 해커 안성환도 말했다.
“해킹도 잘해.”
두 사람이 안성환을 돌아보았다.
차은서가 물었다.
“해킹이라니?”
안성환은 그가 해커라는 걸 이 두 사람에게 숨기고 있다. 이 피시방도 안성환에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 내가 뭐라고 했나?”
윤아름이 안성환의 목을 팔로 감았다.
“야! 순순히 불어!”
“켁켁!”
***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이 ‘오늘도 걷는다’의 반응을 확인하며 손을 비볐다.
“그래프가 장난이 아닌데?”
신은하의 매니저 박우섭은 가수가 아니라 배우를 전문적으로 관리한다. 그런데 그는 실장이 되기 전에는 가수 쪽 지원을 가끔 나가곤 했다. 그래서 그쪽 일을 모르는 건 아니다.
게다가 ‘오늘도 걷는다’는 SAH 엔터 소속 가수가 부른 노래가 아니다. 공연이나 방송출연 계획도 없다. 그쯤 되면 통상적인 곡 관리와 섭외 전화를 거절하는 것 외에는 매니저가 할 일이 없다.
가수 파트의 매니저들은 이 노래를 맡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음악방송 피디의 출연 섭외를 거절하려면 사과도 해야 하고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여러 이유로, 나강인과 ‘오늘도 걷는다’에 관한 건 가수 라인의 매니저가 아니라 배우 매니저인 박우섭이 관리하기로 했다.
박우섭이 사장 서재현에게 말했다.
“역시 곽찬석 작곡가입니다. 반응이 굉장히 좋습니다.”
“노래도 진짜 잘했어. 이런 사람을 우리 가수로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야. 어떻게 잘 꼬셔볼 수 없어?”
“아시다시피, 나강인 씨는 손태민 감독이 다음 영화에 꼭 출연해달라고 하는데도 튕기는 사람이라서….”
손태민은 국내 감독 중에서 가장 최근에 천만 감독이 된 사람이다.
“지금 대세인 손태민 감독의 제안을 튕기다니…. 대단하긴 해.”
“사실 강인 씨가 참여하지 않았으면 그 영화가 천만을 찍기는 어려웠죠. 극장에 걸어보지도 못할뻔했으니까요.”
“섭외 연락은?”
“다른 매니저나 홍보팀에서는 섭외 요청이 들어오면 다 저한테 돌립니다. 그럼 저는 거절하죠.”
“어떤 식으로 거절하는데?”
“우리 소속 가수가 아니라 음반만 내준 거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긴 한데…. 그때마다 나강인 씨에게 물어보고 거절하는 건가?”
“아뇨. 강인 씨는 그냥 다 거절하라던데요.”
서재현은 미련이 남았다.
“혹시 그중에 출연하고 싶은 방송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손태민 감독이 부탁해도 안 통한다니까요?”
“나강인 씨는 진짜 왜 그런데? 설마 수배자나 그런 거 아니지?”
박우섭이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강남 자칼 사건이나 낙귀 해적단 사건으로 합동수사본부까지 생겼는데, 나강인 씨가 수배자면 합수부에서 가만있었겠습니까?”
서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수배가 아니라 범죄 혐의만 있어도 바로 걸렸겠지. 그럼 진짜 왜 방송에 안 나가는데?”
“워낙 특이한 사람이라서, 그건 잘….”
서재현이 몸을 뒤로 젖히고 천장을 보았다.
“환장하겠네. 우리 회사로 데려오면 가수는 물론이고 영화와 드라마까지 날아다니게 할 자신이 있는데, 데려올 방법이 없어. 그럼 방송은 앞으로도 안 하겠대? 영원히?”
“글쎄요. 그건 저도 잘….”
***
윤아름이 피시방에서 나강인의 자리에 라면을 올려놓았다.
“히이. 이거 제가 쏘는 거예요.”
AI 전지인은 직접 만든 요리보다 남이 끓여준 라면을 더 좋아한다.
- 역시 윤아름은 개념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신은하와는 다릅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네가 이걸 공짜로 줄 녀석이 아닌데?”
“히히. 그게요. 저 인터넷으로 게임 방송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