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쫑파티
나강인은 병원 1인실 탁자에 직접 만든 요리가 담긴 밀폐용기를 올려놓았다.
“넌 이런 맛없는 건 안 먹겠지.”
고등학생 이연지가 얼른 서랍에서 1회용 접시를 찾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에이. 제가 심부름 다 할게요. 자자. 여기 수저도 있어요.”
“접시가 어디 있는지 잘 아네?”
“병실 구조는 다 비슷하거든요.”
“수저는 두 세트만 놔도 돼. 우린 먹고 왔으니까.”
이연지가 배시시 웃었다.
“히히. 잘됐다. 양이 좀 적어 보였는데.”
잡탕 조림의 양은 2인분쯤 되었다.
나강인은 환자의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냥 잡탕 조림을 가져왔다.
- 전장에서는 불잡탕 조림을 더 선호합니다.
“피시방에서는 둘 다 좋아하더라.”
- 둘 다 제가 만들었으니까 당연합니다.
이보라가 먼저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은 후에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맛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요리 실력 장난 아니라는 소문이 진짜였어. 은하 너만 그동안 이 맛있는 요리를 먹은 거야?”
신은하가 실실 웃었다.
“흐흐. 부럽지? 난 자주 먹는다?”
“아니. 하나도 안 부러워. 나도 이제 피시방에 자주 찾아가서 먹으려고.”
“으응?”
“은서한테 이야기 다 들었어. 그래서 내 자리도 고정석으로 하나 준비하라고 했지. 그 피시방에서 나강인표 요리가 나오는 날은 은서가 나한테 연락할 거야.”
신은하가 손을 바깥으로 흔들었다.
“야. 꺼져. 오지 마.”
이연지가 옆에서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었다.
“얼마나 맛있길래 보라 언니가 그렇게까지…. 대박!”
그녀의 눈도 동그래졌다.
“진짜 맛있어! 아저씨.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나와요?”
“MSG 팍팍 치면 돼.”
“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정확한 용량을 정확한 시점에 다른 조미료와 함께 사용해야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생각 없이 팍팍 치면 이런 맛은 안 나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 조미료를 딱 맛있어질 만큼만 쓰고 불도 딱 적당히 썼지.”
“뭐든 다 적당히 대충대충 했구나. 와. 그래도 진짜 맛있어.”
“어…. 틀린 말은 아닌데 말이야. 묘하게 느낌이 그렇다?”
“히히.”
이보라는 배우다. 배우는 몸매관리를 잘해야 한다. 여기서 퇴원하면 사진 찍힐 일도 많다.
평소라면 하루쯤 많이 먹어도 그만큼 운동을 하면 된다.
그런데 지난 며칠은 병실에 있느라 운동을 못 했다. 그동안 쌓인 칼로리가 꽤 많다.
‘진짜 맛있지만, 지금 이걸 많이 먹으면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보라는 칼로리 섭취를 줄이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요리를 조금씩 아껴 먹었다.
이연지는 다르다. 그녀는 고등학생이다. 고등학생은 원래 많이 먹는다.
나강인의 가져온 잡탕 조림의 80퍼센트를 여고생 이연지가 먹어치웠다. 그녀는 같이 가져온 밥도 팍팍 비벼서 신나게 먹었다.
이연지는 밀폐용기에 남은 것까지 싹싹 긁어먹은 후에 등을 의자에 기댔다.
“와. 진짜 잘 먹었다. 이렇게 잘 먹은 거 오랜만이에요.”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너 먹는 거 보니 평소에도 잘 먹을 거 같다만?”
“히히. 어떻게 알았지?”
***
이보라는 약속대로 그날 바로 퇴원했다.
이튿날 저녁때 드라마 ‘푸른 하늘’의 쫑파티가 열렸다.
이보라의 매니저가 말했다.
“오늘 쫑파티 갈 때는 경호원이 너랑 같이 다닐 거야. 그래야 너도 회사도 안심하지.”
그녀가 납치된 사건은 사기꾼 두 명이 저지른 짓이다. 그 두 놈은 체포됐다. 그러니 경호원이 굳이 필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소속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 싶어 했다. 이보라도 기왕이면 경호원이 있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보라는 한 가지가 걱정됐다.
“덩치 큰 아저씨가 갑자기 따라다니면 말이 돌지 않을까? 내가 겁먹었다는 소문 같은 거 나면 싫은데. 난 사람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내가 너 그럴까 봐 회사에 잘 말해서 여자 경호원을 어렵게 섭외했다. 일반인처럼 생겨서 겉만 보면 경호원인지도 몰라.”
“와. 회사가 어쩐 일이야? 이 정도로 신경 써주는 곳은 아니잖아.”
“너 이번 일로 뉴스 많이 탔잖아. 또 사고 나면 누가 그 욕을 다 먹겠어? 사장님은 그런 게 다 주가에 반영된다고 생각하시잖아.”
“그럼 그렇지. 어쩐지 신경 써주더라. 진짜 경호원을 고용한 건 맞지? 경호원 역할 연습하는 배우는 아니지?”
“당연하지. 섭외하기 쉽지 않은 분인데 진짜 어렵게 모셨다.”
이보라의 경호원으로 온 사람은 총권도 수강생 중 한 명인 민영희였다.
쫑파티를 예약한 식당으로 가는 차에서 이보라가 물었다.
“경호 업계에서 엄청 유명하신 분이라면서요? 얼마나 잘하시는 거예요?”
민영희가 대답했다.
“그냥 좀 쳐요.”
“네?”
민영희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잘 쳐요.”
“아…. 그러시구나.”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민영희와 이보라가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식당 앞에는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쫑파티를 취재하러 온 기자였다.
“어? 이보라 씨다!”
그들이 이보라에게 몰려왔다.
“이보라 씨! 병원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퇴원하신 겁니까?”
“후유증은 없는 겁니까?”
이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평소에는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었는데 정신적인 충격이 전혀 없을 리가 없다. 그녀는 평소에는 괜찮은데, 그날 일을 누가 언급하면 바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민영희는 이보라의 표정이 굳자마자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가 기자들을 옆으로 쓱쓱 밀어냈다.
“비키시죠.”
그녀가 손으로 밀거나 당기면 기자들은 바로 끌려다녔다.
“어? 어?”
그렇다고 기자들이 거칠게 밀려난 건 아니다. 그들은 이보라와 민영희가 통과할 공간이 생길 만큼만 밀려났다.
이보라는 민영희의 뒤를 우아하게 걸어가면서 감탄했다.
‘와아. 유명한 경호원은 다르구나.’
민영희는 기자들을 순식간에 뚫고 이보라를 편안하게 식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보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실력 장난 아니시다.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움직일 공간만 그렇게 잘 만들어요? 이래서 유명하시구나.”
“제가 원래 이런 기술로 유명한 건 아닌데요.”
“엄청 잘하시던데요?”
민영희는 원래 이런 기술도 좋긴 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사람들을 밀어내는 게 더 쉬웠다. 다가오려는 사람은 그 힘을 이용해 끌어당겨 뒤로 넘기고, 버티려는 사람은 슬쩍 밀었다. 그랬더니 마음먹은 대로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녀가 손을 쥐었다 펴며 생각했다.
‘나 사범님을 상대로 총권도를 수련했더니 일반인 정도는 껌이네. 확실히 기술이 늘었어.’
효과를 실감했더니 더 배우고 싶어졌다.
‘기초 훈련만 받아도 이렇게 효과가 바로 나오는데, 제대로 된 총권도를 배우면 얼마나 대단할까?’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안다.
‘나도 나 사범님만큼 할 수 있게 될까? 그 반쯤만 되도 진짜 장난 아닐 텐데.’
그들이 있는 곳으로 신은하가 다가왔다.
“보라 왔어?”
이보라는 신은하를 보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그녀가 곧바로 평소처럼 긁었다.
“야. 넌 카메오가 여길 왜 와?”
“카메오라고 하기엔 내가 좀 자주 출연했잖아?”
신은하는 그 드라마에서 이보라와 싸우는 장면을 여러 번 찍었다. 시청자들은 둘이 싸울 때의 느낌이 진짜처럼 실감 난다면서 좋아했다.
신은하가 따졌다.
“그리고 카메오는 뭐 여기 오면 안 되냐? 날 싸게 부려먹었으면 고기라도 사야지.”
“누가 뭐래? 그냥 물어본 거거든? 어쨌든 나 잘 지내나 보러 왔나 본데, 봐. 난 엄청 건강해.”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신은하가 민영희를 돌아보았다.
“영희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일하는 중입니다.”
“어머. 혹시 보라를? 와아. 보라 능력 있네.”
이보라가 놀라서 물었다.
“뭐야? 네가 이분을 어떻게 알아?”
“내가 원래 인맥이 쩔잖아. 영희 씨랑은 좀 알아.”
민영희가 실내를 슬쩍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나 사범님도 오셨나요?”
“아뇨. 아직요. 좀 있다가 올 거예요.”
이번에는 신은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근데 이게 그 정부 외주 안 할 때 한다는 민간 일인가요?”
그녀는 정부 외주 업무와 민간 업체의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프리랜서다.
“그렇죠. 민간 일은 다양하게 하는데, 경호원 일도 종종 해요.”
이보라가 옆에서 물었다.
“무슨 소리냐? 내 경호원님 이야기 같은데 왜 나만 몰라?”
“강인 오빠가 영희 씨한테 무술을 가르쳤거든. 그때 나도 있었어.”
이보라가 눈을 껌뻑였다.
“넌 그런 곳까지 같이 가?”
“심심해서 따라갔지.”
“좋겠다. 나도 그런 거 배우고 싶…. 아!”
그녀가 민영희에게 물었다.
“혹시요. 무술을 가르치다가 막 손목도 잡아주고 허리도 안아주고 그래요?”
“옛날에 나한테 그러려던 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아. 숟가락질은 할 수 있게 오른팔은 남겨놨죠.”
“아…. 그러시구나. 아! 커플끼리는 그래도 괜찮….”
“나 사범님 이야기라면, 아직 커플 아닙니다만?”
“에이. 영희 씨는 아니지만…. 그 무술 저도 배울 수 있어요?”
이보라는 총권도가 목적이 아니다.
민영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보통 사람이 그 훈련량을 소화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저는 살살 가르쳐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나 사범님은 살살이란 말을 모르는 분이에요.”
“쳇. 좋은 생각 같았는데.”
신은하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영희 씨하고 같이 그 무술을 안 배운 거 같아? 다른 분들처럼 배우면 지쳐 쓰러져 죽을 거 같아서 안 한 거야.”
민영희가 이보라와 신은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후에 한숨을 쉬었다.
“후우.”
‘골키퍼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앞에 수비수도 있었어. 혹시 기회가 오면 찔러나 보려고 이보라 씨 경호를 맡았는데.’
민영희는 납치된 이보라를 구출한 사람이 나강인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이보라의 경호를 맡으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이 일을 받았다.
손자병법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불리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양쪽 전력을 비교해 승산이 없는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으면 불리해질 일도 없다.
민영희의 전력은 두 사람과 비교하면 너무 약했다.
그녀가 전술적인 판단을 내렸다.
‘지금 찔러보면 필패다. 일단 후퇴다.’
***
드라마 ‘푸른 하늘’ 제작팀이 통째로 빌린 곳은 실내장식이 멋진 퓨전 횟집이다.
그곳은 회와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차가운 요리가 대표 메뉴였다. 회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요리도 있었지만, 해산물이 더 유명했다.
‘푸른 하늘’은 같은 날 같은 시간대 모든 방송을 통틀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드라마 부문만 따지면 현재 방영 중인 모든 드라마 중에서 제일 시청률이 높았다.
아직 최종화까지 방송된 게 아니라서 시청률은 거기서 더 올라갈 수도 있다.
드라마의 시청률은 높고, 그 드라마를 하다가 망한 배역도 없다. 보너스까지 미리 나와서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사람들은 웃고 즐기면서 먹고 마셨다.
이보라도 한쪽에 앉아 쫑파티를 같이 즐기긴 했지만, 먹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그녀가 최근에 겪은 일을 아는 사람들은 나름 조심하느라 아무도 다가와 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신은하밖에 없었다.
신은하가 이보라의 앞에 앉아서 회를 먹으며 물었다.
“야. 회 킬러가 오늘은 왜 구경만 하는데? 회만 먹으면 살 안 찐다고 잘 먹었잖아.”
“그게….”
이보라가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말했다.
“오늘 여기 오니까 갑자기 살생이 조금 부담스러워져서 말이야.”
신은하가 코웃음 쳤다.
“네가? 그동안 네가 잡아먹은 물고기를 다 모으면 여의도 빌딩에 수족관을 차릴 텐데?”
“야. 내가 그 정도로 많이 먹진 않았어.”
“아주 대단한 동물애호가 나오셨네. 그럼 이제 소고기도 안 먹겠네?”
이보라가 즉시 말을 바꾸었다.
“아닌데? 날것을 먹을 때만 살생 생각이 나는데? 익힌 건 괜찮은데?”
“아주 혼자 편한 대로야. 기준이 없어. 그럼 다른 요리는 왜 안 먹는데?”
“그냥 입맛이 없어. 아.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
“그럼 매운탕 달라고 하든지.”
“내가 벌써 매운탕을 시키면 분위기가 좀 그래질까 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보라가 죽을 뻔했다는 걸 안다. 그 사건 때문에 쫑파티를 연기했는데 모를 수가 없다.
이보라는 사람들이 그녀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했으면 했다. 그런데 그러는 사람은 신은하밖에 없었다.
나강인은 뒤늦게 쫑파티에 참석했다. 그는 신은하와 이보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말했다.
“야전 전술 요리 중에서 국물 요리 리스트 좀 보자.”
그는 피시방에서는 주로 조림이나 덮밥 같은 요리를 만들었다.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글씨로 각종 국물 요리 목록이 주르륵 떴다.
- 추운 곳에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병사들에게 뜨끈한 국물 요리를 제공하면 전투 스트레스를 감소시킵니다.
나강인이 그중 하나를 골랐다.
“이걸 끓이면 되겠네.”
- 향신료와 조미료가 부족합니다.
“주방에서 얻어야지.”